[단독] 조선은행 장기영, 학력 극복하고 경제 부총리 된 비결은?
장기영, 금융계에서 언론계, 그리고 경제 정책의 리더로!
지난 시간에는 장기영 선생님이 조선은행 청진지점에서 일하다가 남한으로 내려오신 이야기까지 들었지? 이번 시간에는 그가 어떻게 금융계를 거쳐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갑자기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되었는지 그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풀어볼 거야.
조선은행 조사부장, 능력으로 인정받다!
장기영 선생님은 조선은행 조사부 차장을 거쳐 1948년 12월에는 조사부장이 되었어. 비록 학력은 조금 부족했지만, 뛰어난 능력과 성실함, 책임감으로 이 핸디캡을 극복하고 중요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거지.
조사부에 있을 때, 장기영 선생님은 다른 기관들을 제치고 한국 최고의 조사기관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어.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하고, 해외의 좋은 자료들을 얻기 위해 발로 뛰었기 때문이야.
당시 조선은행의 채용 방식과는 다르게, 추천받은 사람을 임시 직원으로 뽑아서 실력을 보고 정식 직원으로 추천하는 방식을 썼어.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가능했던 방법이었지. 장기영 부장은 "경제 흐름을 분석하는 데 주판 계산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며 이런 방식이 옳다고 주장했대.
또, 조사부에서 매달 발행하는 보고서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해외 서적과 자료를 구하는 데 엄청 노력했어. 해외에 나가는 것도 힘들고, 책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지. 재일교포들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사실 이때는 좀 편법이나 불법적인 요소도 있었다고 해. 이렇게 구한 자료를 번역해서 보고서에 실었고, 이게 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고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어.
이런 장기영 선생님의 조선은행 시절 활약은 그의 일단 저지르고 보는 추진력을 잘 보여줘. 법이나 규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일단 일을 추진하고, 나중에 생기는 문제는 해결하는 스타일이었지. 앞으로 그의 삶을 보면 이런 성향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한국은행 탄생의 숨은 조력자!
장기영 선생님은 한국은행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 당시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이 중앙은행 자리를 놓고 경쟁했는데, 처음에는 식산은행이 유리했거든. 하지만 장기영 조사부장이 조선은행에서 중앙은행 추진을 책임지고 나서서 결국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이끌었지.
또 하나는 한국은행법을 만드는 과정이야. 미국의 경제 전문가가 초안을 만들었는데, 이게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익숙한 방식과 달라서 반발이 심했어. 이때 장기영 선생님이 직접 국회와 법제처를 찾아다니며 설득해서 법이 통과되도록 도왔어.
한국전쟁, 위기 속에서 빛난 능력!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장기영 선생님의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어. 전쟁 직전, 그는 도쿄지점 개설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쿄지점을 열었어. 이 도쿄지점은 전쟁 중에 한국의 외화 자산을 관리하고, 은행권을 인쇄해서 보내고, 물자를 수입하는 등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지. 전쟁을 예측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의 제안이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해.
전쟁이 터진 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어. 한국은행 후발대를 이끌고 은행을 지키다가 한강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에 강을 건넜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인천으로 올라가 금융기관들이 다시 문을 열도록 독려했어. 또 전쟁 중에 임시 부흥본부 책임자가 되어 비상 업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50년 12월, 34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했어.
갑작스러운 사임과 언론계 진출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장기영 선생님은 1952년 3월, 갑자기 한국은행 부총재직을 사임하게 돼. '군표 사건'과 '특혜 대출' 문제가 터지면서 총재가 물러나고, 그 역시 3개월 뒤 사임하게 된 거지. 군표 사건은 일본에서 인쇄된 은행권 운임을 달러로 주기 어려워서 암시장에서 구한 미군 군표로 갚으려다가 생긴 일인데, 이건 국제법 위반이었어.
한국은행을 떠난 장기영 선생님은 같은 해 4월, 조선일보 사장이 되면서 금융계를 떠나 언론계로 뛰어들었어. 1954년에는 한국일보를 창간하고 사장이자 발행인, 편집국장, 기자 역할까지 1인 다역을 해냈지. 4.19 혁명 이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아쉽게 고배를 마시기도 했어.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불도저'의 등장!
그렇게 언론인으로 자리를 잡는 듯했던 장기영 선생님은 1964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발탁돼. 이때부터 한국 경제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지.
경제기획원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 만들어졌는데,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어. 특히 재무부의 예산국과 내무부의 통계국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는데, 예산 기능까지 갖춘 것이 큰 특징이었지.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이한빈 선생이 예산 업무를 경제 개발 부처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서 가능했던 일이야.
처음에는 다른 부처와의 의견 충돌 때문에 경제기획원이 힘을 못 썼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부총리 직책을 겸하게 하면서 경제기획원이 경제 부처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줬어.
이런 상황에서 언론계에 있던 장기영 선생님이 부총리로 임명된 거야.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의 뛰어난 업무 추진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일 거야. 1963년, 박정희 의장이 그를 일본에 특사로 보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맥 10만 톤을 도입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그는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어. 이 과정에서 박정희 의장은 장기영 선생님의 추진력을 눈여겨봤을 가능성이 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영 부총리 발탁은 신의 한 수가 되었어. 그는 '왕초'라는 별명 외에 '불도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는데, 부총리가 된 후 불도저처럼 뚝심 있게 경제 정책을 추진했지. 박 대통령도 그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경제기획원이 한국 경제의 중심이 되도록 도왔어.
장기영 부총리가 재임한 3년여 동안 재무부 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대부분 장기영 부총리와의 갈등이 원인이었을 정도야. 대통령의 지지와 그의 뛰어난 역량이 합쳐져서, 장기영 부총리 시절 경제기획원은 위상을 확립했고 한국 경제는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르게 되었어.
다음 시간에는 장기영 부총리의 구체적인 활약상을 더 자세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