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적 아버지와 사또 아들, 운명을 바꾼 기적의 조선 이야기 (반전주의)
산이 이야기
옛날 옛날 충청도 깊은 산골에 아주 높은 산이 있었어. 거기엔 '체풍원'이라는 산적 두목이 살고 있었는데, 원래는 똑똑한 선비였대.
어느 날, 고을 원님이 흉년인데도 백성들 먹을 곡식을 자기 뱃속으로 챙기니까 체풍원이 그걸 못 참았어. 그래서 창고를 털어서 백성들한테 나눠줬지. 그날 밤, 아내랑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몰래 도망쳐서 산으로 숨어들어 산적이 된 거야. 그 아들이 바로 '산이'야.
산이가 스무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산이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칼 하나만 들고 누렁이 한 마리랑 같이 산을 내려왔어.
돌아다니다가 '월봉골'이라는 곳에서 '박찬판'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할아버지가 산이를 거둬줬어. 할아버지는 짐승을 잘 따르는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다고 생각했거든. 산이는 시키기도 전에 먼저 일을 하고, 무거운 곡식도 맨발로 나르고 그랬어. 누렁이도 쫓아다니면서 심부름을 도왔지.
근데 밤만 되면 산이는 좀 달랐어. 어느 날 밤, 할아버지가 마당을 봤는데 산이가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한자를 엄청 열심히 쓰고 있는 거야. 누렁이는 옆에서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지. 할아버지는 속으로 '저놈은 산적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어.
다음 날, 할아버지가 책 한 권을 슬쩍 놓아뒀는데, 사흘 뒤에 산이가 그 책 여백에 글씨를 빼곡하게 써서 돌려줬어.
3년 뒤, 박찬판 할아버지가 마을 어른들 앞에서 산이를 사위로 삼겠다고 했어.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고 난리였지만, 할아버지는 "나는 사람의 됨됨이를 본다"고 딱 잘라 말했지.
소박하게 결혼식이 끝나던 날, 누렁이는 마당 한쪽에 앉아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어.
산이는 과거 시험을 봤지만 첫 시험에서 떨어졌어. 사람들은 "역시 산적은 산적이다"라고 비웃었지만, 집 앞에서 꼬리 흔들며 기다리는 건 누렁이뿐이었지. 할아버지가 물었어. "어디서 막혔느냐?" 산이는 "글만 알고 세상은 몰랐습니다"라고 답했어. 할아버지는 "그걸 깨달았으면 됐다"고 말했지.
산이는 책을 덮고 세상으로 나갔어. 장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계산법을 배우고, 흉년이 든 마을에서 굶주리는 사람들 틈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었지. 누렁이는 어디를 가든 산이 옆에 있었고, 굶주린 아이들 옆에 가만히 누워서 따뜻함을 나눠주기도 했어. 산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왜 모든 걸 버리고 칼을 들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어.
결국 산이는 과거에 급제해서 고을 원님이 되었어. 청탁도 거절하고, 잘못된 세금도 바로잡았지. 아버지가 칼로 하려던 일을 아들은 붓으로 해낸 거야.
박찬판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누렁이랑 같이 산이를 바라보고 있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