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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 역사 정리와 핵심 비법 해설 | 60분 완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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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 역사 한번에 다보기 (60분 순삭ver.) l 한국사 통합본 4부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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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 역사 한번에 다보기 (60분 순삭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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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여러분은 500년간 지속된 조선의 역사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로빈의 기록을 [음악] 시작합니다 고려말 홍건적과 외고의 침입을 물리친 최영 이성계 등의 신흥무인 세력들은 백성의 신망을 받으며 새롭게 성장하였습니다 한편 1968년 원을 몰아내고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고려의 천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명예 요구에 반발한 최영 등의 명령에 요동 정보를 나선 이성계는 1388년 암록 하구의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여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이 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자 신진 사대부들은 개혁 방안의 차이에 따라 온건파와 급진파를 나뉘어졌습니다 정몽주 이색 등의 온건파 사대부들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고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 사대부들은 새로운 왕조 개청과 다른 성씨로 왕조를 교체하자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고려는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토지 제도의 문란이 지속되자 조준 등의 권위로 1391년 과전법 시행하여 토지를 재분배하고 권세가의 토지 사유화를 축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로써 민생이 안정되고 국가재정이 되었으며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공양왕 3년 도평 의사가을 올려 과전을 주는 법을 정하자고 요청하니 왕이 따랐다 경계는 사방의 근원이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경성에 살며 왕성을 호위하는 자는 과 무직 임관을 막론하고 과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과전법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듬해인 1392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을 비롯한 급진파 사대부들은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며 조선을 건국하였다 뜻에서 국호를 조선 이라 하고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여 경복궁 종묘 사직 관화 등을 건설하였으며이를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하였습니다 조선건국의 가장 큰 공을 세운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 운영을 주장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 경제문감 고려국사 등을 저술하였고 불시 잡을 통해 고려할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훌륭한 재상을 얻으면 육전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임금이 할 일은 한 사람의 재상을 정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모든 관리를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자리이니 그 직분이 매우 큰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경전을 통해 전의 재상중심 정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신이었지만 1398년 제 1차 왕자인 난때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태주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이방원은 정몽주 등을 제거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지만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후 막내 이방이 세자에 책봉 정도전은 세자 이방석을 보좌 이방을 중심한 공신과 력을 하였습니다이 위기를 느낀 이방원은 제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세자 이방석을 무력으로 제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태조 이성계가 째 아들인 이방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정종이 하였고 이방원은 왕자로 책봉되어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을은 이방이 정을 넷째 이방은 포와 함께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난은 이방원에 의해 제압 되었고 그 결과 정종이 양하여 이방원은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으로 하였습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먼저 국정의 총괄 기구인 의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큰 것을 하였습니다 이에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의 판서가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여 재가를 받도록 하는 6조 직계제 실시함으로써 의정부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사를 관원으로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를 위해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성과의 소통을 위한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영 대군이었다 품위를 손상시키는 사건들을 일으키자 태종은 양영 대군이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중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영 대군에게 떠난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세자를 폐할 것을 청하였고 이에 양영 대군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태중의 마음은 셋째 아들 충령 대군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1418년 태종은 충령 대구는 천성이 총명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지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며 대군을 세자에 책봉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달뒤 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의를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충영 대구는 조선의네 번째 임금 세종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모여 유교 경전 등을 공부하며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인 경연과 세자가 장차 올바른 군자가 될 수 있도록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는 교육인 서연을 활성화하였다 지편전 설치하여 젊은 학자들의 학문과 정책 연구를 장려하였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하여 재상들이 권한을 보장하는 한편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황위 맹사성 등 유능한 재상을 용함으로써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습니다 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다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보내 시행한다 다만 2조 병조의 재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이와 같이 세종실록을 통해 세종이 실시한 의정부 서사제 용을 있뿐만 아니라 세종은 북방의 여진을 토벌하고 최윤덕 김종로 하여금 각각 4군과 육진을 개척하게 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이종무로 하여금 외구의 근거지인 스시마 섬을 벌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계속된 요청으로 부산포 제포 연에 해당하는 포를 개하고 1443년 일본과 개해 약조를 체결하여 인에게 제한적으로 무역을 허가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의 훈민정음을 1443년 창제하고 1446년에 [음악] 반포하였다 통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훈민정음 해리 에보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 등을 등용하여 천문을 관측하는 천히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강우량을 측정하는 구기 등 농사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발달된 인수를 이용하여 금속활자인 갑인 자를 제작하였습니다 또한 글과 그림으로 유교 윤리를 표현한 삼강 행실도 효행록 등 유교윤리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였으며 국산 약제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 집성방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종합한 서인 농사직설 등을 편찬하였다 수시력 명예 대통력 아라비아의 회회력 참고해서 제작하였지만 기존의 역법서이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였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 4후 문종을 거쳐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치의 실권이 김종서 등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에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고명 대신 중심의 국정운영에 불만을 품고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후 2년 후인 1455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로 주게 하였습니다 세조가 주기한 이후 지편전 학자 출신 중 일부는 단종의 보기를 꾀하였고 계획이 누설되어 성삼문 박팽년 등의 사육신을 비롯한 70회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삼문이 아버지 성승 및 박백년 등과 함께 상황의 보기를 모의하여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푸는 날에 거사하기로 기약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자 왕이 친히 궁하면 꾸짖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하였는가 하니 성삼문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상황을 보기시 했을 뿐이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듯이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라고 하였다 단종 보기 운동이 벌어지자 세조는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지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중지하였습니다 또한 의정부 사제를 폐지하고 육조 직제를 다시 실시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세조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 법을 실시하고 호적 조사를 통해 인구를 파악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의 난을 진압하였다 하기 위하여 각종 법전과 명령 등을 종합하여 경국대전에 편찬을 시작하였고 이에 법전의 초안이 작성되었습니다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예종은 주이한지 13개월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예종의 뒤를 이어 기한 성종은 유교 정체를 바탕으로 한 통치 체제의 틀을 완성하였습니다 지방 출신의 선비들을 뽑아 중요 관직에 등용하며 편전의 기능을는 학문연구 기관인 홍문관을 설치하여 및 주요 관리들을 경연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경연은 왕과 신하들이 함께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종은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거두어 관리에게 지급하는 관수 관급제 시행하였고 세조 때 폐지되었던 유향소를 부활시켰습니다 아울러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조선의 기본 통치 이념과 유교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종 때에는 고조선부터 고려까지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동국 통감 조선 시대의 의계 악보를 정리한 음악서 악학 궤범 각도의 풍속과 지리 등을 소개한 지리서인 동국 여지 승남 역대 문학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한 동문선 국가 행사의 유교적 의뢰를 정리한 국조 오래이 일본의 정치 외교 사회 풍속 등을 기록한 해동제국기 등이 편찬되었다 조선 건국에 참여한 급진파 사대부 계열인 훈구파는 세조의 집권을 도우며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부국강병과 중앙집권을 추구한 훈구파는 성리학 이외 학문에 관대하였다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대지주가 되고 상공업을 독점하는 등 막대한 불을 쌓았고 비와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 였습니다 한편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쓰며 정몽주 길제 등 온건파 사대부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들은 경기 충천 기반의 기호 지방과 경상도 지역인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체로 중소 지주 출신이었던 사림들은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추구하였고 향촌 자치를 지향하며 서원과 향약을 세력 하여 하였습니다 이들은 유교의 기본적 철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경학을 중시하였으며 과학 기술을 천시하고 성리학 이외 사상을 배격하였다 직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의 노력으로 훈구와 사림은 세력 균형을 이루었으며 국가적 편찬 사업과 문물 정비에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과 사의 관직에 임용되어 언론 활동을 한 사림들이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고 정치개혁을 주장하자 두 세력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습니다 성에 이어 한 연산군은 훈구 세력과 살림을 누르고 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언론 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 세력을 탄압하였다 훈구 세력들은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이 쓴 조의 제문을 올린 것을 문제삼아 살림들을 축출하는 무호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김종직이 쓴 조이 재무는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초나라 의제의 죽음을 기리는 내용이었으나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기리는 의미로 해석되어 무호 사화에 발단이 되었습니다 세조의 후손이었다 연산군은 이에 자극을 받아 1498년 이와 관련되었던 사인파를 제거하였는데이를 가리켜 무호 사화 부릅니다 전하기를 지금 김일손이 사초의 부도덕한 말로서 선왕의 일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한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 제문을 실었다 대간 홍문관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 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연산군 일기를 통해 무호 사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호 사화가 일어나자 이미 세상을 떠났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김굉필 정여창의 유배되었으며 김일선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많은 사림이 중앙 전개에서 제거되었습니다 6년 후인 1504년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투기로 인해 폐비 되고 사사된 사건과 관련하여 이와 관계된 훈구 세력과 사림들이 제거되었을 가리켜 갑자 사화로 부릅니다 생모 윤씨를 패비 의논에 참여한 자와 존호를 올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자를 모두 중형으로 다스려 죽은 자는 그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가족이나 친족은 연주하였다 살아 있는 자는 매로 때리며 신문한 후 멀리 귀양 보냈다 이와 같이 연산군 일기를 통해 혹하여 갑자 사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속자 신와 성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훈구 세력은 1506년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중종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연산군을 축출하고 왕으로 지한 중종은 중종반정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전국을 주도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비롯한 살림 세력을 대거 하였습니다 조광의 언론활동을 활성화하고 경을 강화하여 정치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양과를 시행하여 살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양과는 전국 각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를 말합니다이 제도는 중앙과 지방 관청에 추천을 받은 인물들을 왕 앞에서 직접 시험을 치르게 하여 관리로 선발하였으며이는 사림이 관직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 지 소을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시켰으며 위훈삭제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대사헌 조광조 등이 아뢰기를 반정 공이 있었다면 기록되어야 하겠으나 이들은 또 그다지 공도 없습니다 무 이들을 공신으로 중이 여기면 공과 일을 탐내게 되니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다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임금 라를 다스리고 한다면 이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종 실록을 통해 조광조 등이 중종 반정의 공신 중 부당하게 공신이 된 일부 훈구 세력의 공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훈구 세력은 1519년 김묘 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을 제거하였습니다 후 중종과 인종의 제위 시기를지나 명종 때에는 외척 세력간의 권력 다툼이 살림 세력에게 미친 또 하나의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1545년에 일어난 을사 사화는 명종의 외척인 소윤 일파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사로서 이로 인해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더이 자백하기 평소 대윤 소의 말리지 않으려고 심하였는데 그들과 함께 모반을 꾸민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계속 추궁하자 그는 윤님이 제게 이르되 경원 대군이 왕위에 올라 윤원로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의 집안은 멸족 될 것이니 봉성군 옹립하고 하였습니다라고 실토하다 이처럼 명종 실록을 통해 대윤과 소윤 세력이 어떻게 대립하였습니다 을사 사와의 결과 사림세력은 또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또한 신에 의한 정치 문란으로 사회 혼란이 야기되고 민생이 궁핍해지자 임정과 같은 도적들이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된 사화로 큰 피해를 입은 사림은 향촌 사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16세기 이후에는 중앙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서원은 훌륭한 학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성 맥을는 립 교육기관을 말합니다이는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이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며 이후 사림이 중앙 전기에 진출하면서 그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국가에서는 국왕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사액 서원을 지정하여 토지와 노비 서적 등을 지급하고 항문 연구를 하였는데 동 서원은 이의 권로 소수 서원이라는 현을 받아 최초의 사핵 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은 성리학의 확산과 향촌의 문화 수준을 높이고 정치 여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원의 수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면세 면역의 특권을 이용하여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고 같은 학파의 결속을 강조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향약은 향촌의 자치 규약을 의미합니다이는 중종때 조광조가 중국의 시 향약을 들려와 한글로 번역하고 4대 동목 전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풍속의 유교 윤리가 더해져 만들어진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살림의 세력 기반을 이루었고 백성에게 성리학적 윤리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덕업 상권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 잘못된 것은 서로 규제한다 예속상교 예의바른 풍속으로 서로 교제한다 환난 상율 재난과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 이처럼 향약의 4대 덕목을 통해 향약이 향촌사회 풍속을 교화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이황은 예안 향약을 이인은 해주 향약과 서원 향약을 만들어 보급하였고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의 농민을 교화하고 향촌 사회를 안시켰으면 수령이나 향리 못지않은 큰 영을 였 송학은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유학입니다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핵심 원리인 스스로를 수양한 후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에 수기와 인을 정치와 생활에 적용하였습니다 계 이황의 사상은 이의 절대성을 주장하였으며 근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하였습니다 그는 군주의 도를 개의 도식으로 설명한 성 10도에서 스스로가 식을 수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황의 사상은 영남학파 동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임진란 이후 일본에 전파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성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이황을 동방의 주자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길를 강조한 율곡 이인은 이황에 비해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을지 그는 호문을 술하 개혁과 통치 체제의 정비 등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성악 지배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군주의 수양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하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의 사상은 기호 학파와 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이인은 방납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납을 쌀로 걷자고 한 개혁 아닌 수미법 주장하였고 외세 침략을 맡기 위한 방책으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악 도와 성악 지요 모두 군주의 학문인 성악에 대한 내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황의 성악 10도가 구왕 스스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에 성학 지은 신화가 국왕을 잘 필해야함을 강조하였다 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 되는이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며 만물을 구성하는 기는 선과악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한이는 존귀 하고 선악이 함께 내재한 기는 비천한 것이다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여 물인 것 같지만 다른 점은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으며이는 작용이 없고 기는 작용이 있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와 기는 이미 두 가지 물건이 아니요 또한 한 가지 물건도 아니다 이처럼 이황과 이의 이론을 통해 두 성리학자 사상을인할 수 있습니다 선조 주기 후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살림 세력은 신정치 청산에 대한 문제를 놓고 기성 사림과 신진 살림으로 나뉘어 대립하였습니다 신 정치란 12세의 어린 나이의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되면서 임금의 외척이 되는 관료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을 말합니다이 갈등은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심해져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붕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조 전랑이란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의 정란과 좌랑을 함께 이르던 말로이는 3사의 인사권을 가졌으며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 이겸이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여 이조 전으로 천거되어 외척이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에 양편 친지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배척하여 동인 서인이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은 동쪽 천동에 있고 겸의 집은 서쪽 정릉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들의 생각은 결코 외척을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서인 쪽에서는 심의 겸이 공로가 많은 선비인 어찌 앞길을 막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연려 실 기술을 통해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붕당의 형성에는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 그리고 지역적 차이 등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기성 살림의 지지를 받은 서인은 신이라도 믿을만한 인물과는 협력할 것을 주장하여 신정치 청산에 소급 적었습니다 서인혜는 이와 성운의 문인들이 주로 가담하였고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의 기호학파 선비들이 가세하였다 척신정치 청산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동이는 서경덕 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신진 세력이 적극 가담하였으며 개성 경상도 일때의 영남 학파 선비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붕당정치는 붕당 상호간의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견해를 인정하면서 비판과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진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전국을 주도하는 경향을 뛰었습니다 하지만 1589년 동인이었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인물들이 박해를 받은 기추 곡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서인이 전국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에는 서인인 정철이 선주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을 것을 제의하였다 유배된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였고 그로 인해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두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화되어 정철을 온건하게 처벌하 임란 이후에는 많은 병장을 한 북인이 주도하였고 광해군에 이어서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북으로 나뉘어 대립하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 정도전이 추진한 요동정벌 문제로 명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이 집권한 이후 명과 사대 외교를 추진하여 불필요한 충도를 피하고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등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의 외교관계는 조공과 책봉에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은 명예 연호를 사용하며 사대의 예를 갖추었고 명예 매년 하정사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 등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사대 문서와 조공품을 보냈습니다 명 역시 조공에 대한 담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조선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 상호간 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 선진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인 동시에 조공품 회례 품의 공식적인 교환을 통한 일종의 공무역이었습니다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는 교린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조선에 협력하거나 귀화한 자들에게는 관직이나 정착할 토지 등을 주어 조선인으로 화시키고 하였고 국경지역인 경성과 경원의 무소를 설치하여 경 과 조공 무역을 실시하였으며 한양에는 여진족 사신의 숙식과 접대를 위하여 북평관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여진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약탈을 자행하는 경우에는 분대를 동원하여 대응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암록 지역에 최윤 덕을 파견하여 군을 설치하였고 두만강 지역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육진을 설치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정책을 실시하여 삼남 지방의 주민들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토창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도 교린 원칙에 따라 회유책 강경책을 병행하였습니다 화포와 병선을 동원하여 왜구를 격퇴하기 하였고 일본측이 평화적인 무역관계를 요청해 오면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통신사를 보내고 일본의 막부 정권은 조선의 일본 구사를 파견하며 서로 교류하였다 아도아 조공의 형식으로 교육하였을 일본에 마포 면포 명주 화문석 포피 약재 대장경 문방구 서적 등을 제공하였고 일본으로부터 구리 유황 물감 향료 소목 후추 등 무기 원료와 기호 을 사드렸습니다 특히 조선에서 보내준 8만대장경 인쇄본은 일본 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고 모화는 일본의 의생활에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본 해적인 외구 있습니다 조선 해안에서 외구의 침탈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은이 종물을 통해 외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 하였고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이 다시 교역을 요청하자 세종때 부산포 제포 연포 포를 개방하였고 1443년 매년 50척의 배만이 왕복할 수 있도록 하는 개해 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교육을 허가하였습니다 16세기에 들어 산포에 거주하는 외인이 늘면서 사회적 문제가 증가하였습니다 조선이 외인에 대한 통제와 무영을 제한하자 이에 반발한 외인은 중종때 1510년 삼포 외란 을 명종 때인 1555년 을묘 외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은 군사 전략 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하고 일본과의 외교를 단절하여 조선은 유구 시암 자화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조선의 옷감 문방구 등과 교환하였습니다 특히 구화의 교역이 불상 등을 전래하는 기여하였습니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는 통일 이후 반대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대륙 진출의 야욕을 실현하고자 조선 침략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내 일본은 1592년 명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임진 외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은 전쟁 초기 국방력의 열쇠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위력에 밀려 해전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부산진 동래성을 빼앗겼습니다 이후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지만 조총 부대로 구성된 외군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충주 방어선 무너지고 일본군이 빠르게 북상하여 한성에 근접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봉하여 전 수습을 위한 임 조정을 구성하게 하였고 한성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여 명예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한성에 이어 평양까지 점령하였습니다 또한 함경도 지역에 쳐들어가 조선의 왕자 두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일부 병력은 두만강 건너 여진과 충돌하였습니다 하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 그리고 수근의 활약으로 전세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근은 옥포 회전에서 첫 승리를 거은 후 거북선을 앞세워 당포 회전 한산도 대첩 등에서도 연이어 승리하였습니다 특히 한산도 대첩은 조선수군이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작전을 저지하는데 기여하였고 그 결과 외 진출로 및 보급로를 차단하여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홍의장군 제후 고경명 등을 비롯한 의병들은 전국 제에서 전직 승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 고장의 익숙한 지과 그에 맞는 전술로 군수의 병력으로도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조선의 수군과 의병이 활약하는 가운데 조선의 요청에 따라 명군이 전하자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시민이 진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명군과 조선 관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나였습니다 또한 권율 장군이 행주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한양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명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자 일본군도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나며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명과 일본은 3년에 걸친 휴전 협상을 추진하였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은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혀를 재정비 하였습니다 유성룡의 권위로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으며 소구법 실시해 지방군은 양반 천민까지 포함시켜 조직된 소고 개편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조선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직산 전투에서 북진하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이순신의 수근은 명양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오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조선과 명 일본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삼국의 내전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조선의 국토는 황폐해져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구가 감소하였으며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적 등의 소실로 세금을 부과할 근거가 사라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 또한 불국사와 경복궁 실록과 사고 등이 불타고 그림과 도자기 서적을 약탈당하는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정부는 돈이나 쌀을 치면 을주는 속 책을 시행하였고 성명을 적재하는 관직 명장인 공명첩을 대량 발급하며 이로 인해 조선의 신분 질서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은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의 무리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만주의 여진은 명예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조선에서 약탈해간 문화재와 포로로 끌고간 학자 을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수한 활자 인쇄과 23평 등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출판 및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유학자들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에 전래되기 하였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후 에도의 새 막부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조선은 1907년부터 181 1년까지 일본의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요청으로 국교가 재개되자 부산포에 외관을 설치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역을 허용하는 기유의 약조를 체결하였습니다 선주 이어 주의한 광해군은 외란의 피해를 복구하고자 민생 안정 국가재정 확충 사회질서 유지 등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토지대장과 호적을 정리하여 정확한 인구와 토지 파악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제도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이원익의 권위로 경기도의 대동법을 실시하였습니다 대동법은 다양한 품목으로 거두던 공납을 쌀로 통일하여 납세하는 성을 수리하고 불타버린 창덕궁과 사고를 제거하였으며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건강을 보살피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급성장한 여진족은 1616년 만주에서 하였 후금이 명을 공격하자 명은 외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의 지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광해군은 명예 요청을 거절할 수도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이해 강홍립을 명의 원군으로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명령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강홍립이 장를 올리기를 동관에 도착하여 먼저 통역관을 보내어 밀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하지 않을 계획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료를 통해 광해군이 펼친 중립 외교의 방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광해군과 북인 정권의 외교는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양반층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서인 세력은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 제가 일어나자이를 유교 윤리에 어긋난 정치라 비판하였습니다 결국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에 올리는 인조반정을 일으켰습니다 후군은 영창대군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그 시기와 의심이 나리 쌓여갔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해도에 안치하여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였다 이와 같이 인조 실록을 통해 인조반정 당시의 정세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운 이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인조가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진압되어 이과의 나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괄의 잔당 세력이 후금에 투항하여 정묘 호란의 배경이 되었고 심상치않은 백성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호패법을 재실시 되었습니다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 배금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한편 이괄은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었던 것에 불만을 품고 1624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난이 평정된 이후 일부 잔당은 후금에 투항하여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주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의 태종은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 을 일으켰습니다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까지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용골 산성의 정봉수 의주 지방의 이립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맞서 싸웠습니다 이에 복음로얄아파트 조선의 군신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명기를 중심으로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해결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김상헌 윤집 중심으로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1636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 을 일으켰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전하였던 조선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인조는 청 태종에게 아홉번의 절을 하며 예를 갖춰 항복하는 삼전도의 구력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은 천과 군신 관계를 체결하고 명과 국교를 단절하며 소연 세자와 훗날 종으로 지게하는 봉림대군 그리고 할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과 막사을 비롯하여 많은 백성들이 청의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두 차례의 호안으로 천군이 거쳐간 평안도 황해도 일 때는 크게 황폐해졌고 해마다 청에게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여진을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은 문화적 자부심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는 사대관계 입각하여 다양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신의 왕래가 하였지만 한에서 는 조선의 문화가 명 못지 않게 우수하다는 소중 화을 내세우며 청을 정벌하여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청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기한 효종은 주전론 펼쳤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 서인 세력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였습니다 효종은 성과과 무기를 정비하고 어영청 등을 설치하여 군대 양성에 힘을 쏟았지만 강력한 군사 중을 장악한을 정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대신들이 북벌을 반대하였고 북벌을 추진하던 마저 사망하자 청 정벌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한편 표정 때 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의 출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두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하여 총을 도와 러시아군과 전하였습니다 사대관계를 맺은 조선은 매년 청의 사신을 보내 청과 자주 왕래하였다 북학론이 제기되었습니다 한편 17세기 말 국경 지역의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인삼 채취와 냥을 하다 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 양국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숙종 대인 1712년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는 백두산 1대를 답사하고 압록강과 토문강은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습니다 이후 조선과 청은 19세기에 이르러 토문 강의 위치해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림은 선조 때 이조 전랑 임명과 척신 정치 청산 문제를 놓고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 후 붕당을 이루어 정치를 운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동인의 세력이 강하였고 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개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습니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득세하여 광해군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과 제도 개편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북인과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으로 몰락하였고 이후 서인은 남인과 붕당 연합 체제를 이루어 전국을 이끌었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양난 이후 사회 안정과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이 시기에는 분당간 상호 공존과 비판이 비교적 잘 이루어졌으며 서원이나 향약을 통해 지방 사림의 여론을 모아 중앙정치에 반영하였습니다 따라서 향촌에서 산림이 불리던 제야 사림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중앙에서는 공론을 주도하는 삼사의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이후 효종 때에는 북벌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다 현종의 이어서는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나면서 당간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예성은 효종과 효비가 모인 자의 대비보다 먼저 죽자 자의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1959년과 1674년 버린 두 차례의 논쟁을 말합니다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은 주자 가리에 따라 왕과 일반 사대부의 예법이 같다고 주장하였고 민을 대표하는 목과 윤효은 주나 예기 등을 근거로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의 예법이 똑같이 적용될 수 없으며 최고의 예우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659년 효종의 죽음이 발단이 된 기해 예성은 둘째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효종을 왕위를 계승한 장남으로 해석해야 할지 차남으로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서인과 남인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인는 효종은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니 기연 복을 입어야 한다 주장하였고 남미는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3년 복을 주장하였습니다 양측은 팽팽이 맞섰지만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었던 서인에 의해 연설이 채택되었습니다 효종이 돌아가셨을 때 관이 장 자유 왕대비 복재를 논하려 하였는데 전지 만이 홀로 3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을 주장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자위 왕비서 대행 대왕의 상해에 입어야 할 복재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떤이는 3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이는 기복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근거할 예문이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이와 같이 현종 실록을 통해 기예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갑 송이라고도리는 은 1674년 정비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벌어졌습니다 서인은 공복을 남인은 기복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대비서 서거하셨습니다 효정 대왕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하였으므로 장자로 대우하여 대왕대비의 상복입는 기간을 1년으로 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대왕대비 대왕의 어머니라서 신하가 될 수 없고 대왕은 둘째 아들이므로 대왕 대비해 상복 입는 기간을 9개월로 해야 합니다 이처럼 갑인 예송에서 서인과 남인은 팽팽하게 맞섰고 예속 논쟁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성은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두 붕당의 정치적 학문적 대립이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현중의 뒤를 이어 주게한 숙종은 전국적으로 대법 을대 시행하였습니다 수도 및 궁궐 수비를 위해 금형을 설치하여 근형 체제를 완성하였고 전국적으로 상평 통보를 유통시켰다이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며 전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을 여러 차례에 거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서인과 나미는 번가라 집권하게 되었고 집권 세력은 상대 붕당을 역적으로 몰아 배척하는 등 서로 가혹한 보복과 탄압을 가하였습니다 1980년에 벌어진 경신 환국은 남인인 허적이라는 사용하고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영물을 모의하여 죄목을 받은 것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숙종은 남인 견제를 위해 허적 윤휴 등 남인을 축출하였다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서인은 남인 처벌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일어난 기사 환국은 왕비인 인현왕후가 오랫도록 후사가 없자 숙종이 훗날 경정이 되는 희빈 장시의 소생을 원자로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으려 한 것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서인이이를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5년 후인 1994년에 벌어진 갑술 환국은 인현왕후의 보기 문제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숙종이 패비 사건을 후회하던 중 서인이 폐비 보규 운동을 전개하자 남인이이를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인현왕후와 송시열이 보규 및 복구되고 희빈 장신은 강등 당하며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환국의 결과 조선은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당간 공존과 견제의 원칙이 무너지고 특정 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화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사의 언론기능 역시 변질되어 공보다는 자기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특히 숙종이 환국을 직접 주도함에 따라 왕과 가까운 외이 종실 관리들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으며 사익 추구를 비롯하여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개입하는 상황마저 벌어졌습니다 이해 숙종은 점점 격화되는 붕당의 대립 조정을 위해 탕평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와 대리 청정 문제로 대립하던 중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일찍 사망하자 경종의 이복 동생이었던 영조가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영조 주기 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는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노론의 집권에 반대하는 이인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영조는이를 진압하며 강력한 왕권을 얻었습니다 이후 영조는 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이에 동의하는 탕평을 육성하고 이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전국을 운영하였습니다 히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각당의 인물들을 고르게 용하여 세력균형을 꾀하고 탕평의 의지와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자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각 붕당의 여론을 주도하는 살림의 존재를 부정하고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붕당의 집권 기반이든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삼사의 관리를 추천하던 관행을 폐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붕당 간의 극단적인 갈등이 점차 완화되었습니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심재를 시행하여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를 방지하였습니다 또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의 의견에 귀기 울리고자 신문고를 부활시키고 청계천을 준설뿐만 아니라 법전인 속전을 편찬하여 법령과 도를 정비하고 우리나라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 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영주의 탕평 정치로 인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지만이는 붕당의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실상 영조는 노론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였고 국왕과 혼인 관계로 이어진 측근 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신 정치의 단이 발생하였습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할아버지였던 에 의해 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시파와 벽파의 갈등 속에 기하였습니다 정조는 영조의과는 달리 론 탕평을 펼쳐 각 당파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렸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부터 세력을 키워온 외척과 환관 세력을 배척하여 영조때 탕평을 비판하였던 노론 소론 일부와 그동안 권력에서 제외되었던 남 당의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학술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책자문 기구로 삼고 젊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하여 재교육하는 초개 신재를 실시하여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육성하며 국왕 직속 친위 부대인 장을 설치하여 왕권을 뒤받침하는 군사도 확보하였습니다 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곳에 정약용의 주도로 화성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자신의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화성에 자주 행차하여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민생에 관한 백성의 의견을 직접 듣고자 하였으며이를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뿐만 아니라 1791년 신의 통공을 실시하여 기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란 전권을 폐지하였습니다 금란 정권이란 허가받지 않은 상인이 장사하는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데이를 폐지함으로써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였다 등 노비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서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여 서울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사관에 등용하기 하였습니다 정조는 다양한 편찬 사업을 통해 문화 발전과 학문 장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경국대전 속대전 및 여러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인 대전 통을 만들어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고 외교 문서와 사신의 명단 등을 모은 동문 휘고 재정 업무와 관련된 사례를 모은 탁지지 군사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하였습니다 정조의 탕평 정치는 다양한 계층의 성정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붕당정치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결국 정치권력이 국과 그 주 정치 집단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이는 정조 4후 세도정치가 출연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순조는 갑작스러운 정조의 사망으로 인해 11세의 어린 나이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영조의 비인 정순왕후는 순조를 대신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수렴 청정을 하였고 정조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벽파 세력은 전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노파는 1801년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고이를 이용하여 파 및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규장각 출신들을 몰아내고 구강 직속 친유 부대인 장용영을 혁하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중심에 안동김씨 세력들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세도 정치는 헌종의 외척 가문이었던 풍양 조씨 철종의 외척 가문이었던 안동김 씨까지 3대에 걸쳐 60여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세도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비변사의 요직을 비롯한 정부 주요 관직을 군사적으로는 훈련도감 등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의정부와 육조 3사 등이 힘을 잃어 재기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왕권 또한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한편 몇몇 새도 가문의 권력이 집중되자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반이 되거나 아예 권력을 잃어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는 잔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몰락하여 반란을 꾀하거나 농민봉기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정치세력 사이 경 는 물론 정책 비판 기능 역시 마비되어 세도 가문을 견제할 집단이 없었습니다 세도 가문들은 서로 혈연관계를 맺으며 전국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왕권은 미해지 국가 기강은 점차 해이해졌다 새도 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에 급제할 수 없었고 과거에 급 하였더라도 새도 가문에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높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뿐만 아니라 관직을 뇌물로 사고파는 매관 매직이 성행하는 등 각종 비리가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뇌물로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그 결과 순조 때인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정대인 1862년에 임술 농민봉기가 발생하는 등 백성의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수치 체제를 이용한 불법 수탈로 인해 나라의 살림이 어려워지고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이를 가리켜 삼정의 란이라는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제도인 전정과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를 납부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인 군정 봄에 관청의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이를 되돌려받는 곡식 대어 제도인 환곡을 말합니다 전에서는 토지대장에 없는 토지와 황폐한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또한 운송비 손실비 등 각종 명목의 부가세를 추가로 징수하여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납부하게 하였으며 지주는 소장에게 세금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정은 대부분 군역 대신 군포의 납부로 바뀌었습니다 군포는 인 남자에게만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 정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 등과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군역을 피하려고 도망하는 사람의 군포를 이웃이나 친척에게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지배층에 자진 수탈로 고통을 받던 농민들은 족보를 사들여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고 노비로 위장하거나 도망하는 등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한 방을 이용하 이들이 군역을지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만 군포를 내게 되었고 이에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같습니다 특히 삼정 가운데 폐해가 가장 심각했던 환국은 여러 방면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관리들은 허위 문서를 작성하거나 환국이 필요치 않은 성에게 강제로 배부하였고 심 을 빌리지 않은 백성에게도 이자를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고리대 징수하는 일이 공공연히 이루어져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고통이 커지자 정부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수령이나 향리의 부정 부패를 단속하고 하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삼정의 문란은 농업의 파탄과 농민의 몰락을 가속시키고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본기 등과 같은 농민봉기의 발생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에서 아주 자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로빈의 역사 [음악] 기록 h
영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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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말 홍건적과 외고의 침입을 최영이 물리쳤어요.

2. 이성계는 1388년 회군 후 권력을 잡았어요.

3. 온건파와 급진파 사대부들이 개혁 방안을 논의했어요.

4. 고려는 과전법으로 토지 제도를 개혁했어요.

5.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건국했어요.

6. 태조는 유교 사상에 따라 정책을 펼쳤어요.

7.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다졌어요.

8.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을 추진했어요.

9. 세종은 과학기술과 문화 발전에 힘썼어요.

10. 세종은 훈민정음과 과학기구를 만들었어요.

11.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권력을 재편했어요.

12. 성종은 유교 통치 체제와 역사 편찬을 했어요.

13.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심했어요.

14. 사림은 향촌 자치와 유교 윤리를 강조했어요.

15. 붕당 정치로 동인과 서인, 남인, 북인 등이 나뉘었어요.

16. 인조반정 후 서인과 남인 간 갈등이 심했어요.

17. 숙종 때 환국으로 붕당이 계속 교체됐어요.

18. 영조는 탕평책으로 정치 균형을 맞췄어요.

19. 정조는 개혁과 문화 발전에 힘썼어요.

20. 순조 때 세도정치로 나라가 흔들렸어요.

21.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며 부패했어요.

22.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이 고통받았어요.

23. 농민봉기와 난이 계속 일어났어요.

24. 일본과 청과의 전쟁과 외교도 중요한 이슈였어요.

2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조선을 크게 흔들었어요.

26. 조선은 문화와 과학기술도 발전했어요.

27. 이후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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