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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부자 '경주 최부잣집' 300년 비밀! 전 재산 바쳐 독립자금 후원한 클라스

게시일: 작성자: 자청의 유튜브 추출기

조선 최고의 부자,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

조선 시대에 엄청난 부자였던 집이 있었어. 얼마나 부자였냐면, 논만 합쳐도 여의도의 두 배가 넘는 200만 평이나 됐대. 여기서 한 해에 쌀이 무려 만석(1,400톤)이나 나왔는데, 이걸 20kg짜리 쌀 포대로 따지면 7만 개나 되는 양이야.

그런데 이 집에서 실제로 가져간 쌀은 3,000석뿐이었어. 나머지는 다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나눠줬지. 그리고 집안에서 먹은 건 겨우 1,000석이었고, 남은 2,000석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대. 요즘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쌀이 20kg 포대 10개 정도인데, 2,000석이면 그런 집 1,000곳에 1년 치 양식을 줄 수 있는 양이야.

그래서 이 집 대문은 평생 잠긴 적이 없었어. 하루에 100명씩 와서 밥 먹고 자고, 다음 날 쌀을 얻어서 갔다고 해. 무려 300년 동안이나 말이야!

이렇게 퍼주는 집이었는데도, 며느리는 시집오고 3년 동안이나 무명옷만 입어야 했고, 보릿고개 때는 쌀밥도 못 먹고 은수저도 못 썼대.

보통 부자는 3대를 못 간다고 하잖아? 근데 이 집은 무려 12대, 400년 동안이나 부자로 살았어. 그런데 그 400년의 역사를 끝낸 건 12번째 주인 본인이었어. 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전부 없앴다고 해. 실수로 망한 게 아니라, 작정하고 그렇게 한 거야.

이 집이 바로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야. 지금도 경주에 가면 그 집을 볼 수 있어.

어떻게 시작됐을까?

이 집의 첫 주인은 칼을 든 무인이었어.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인데, 그 사람 제사에는 지금도 상이 세 개나 차려진대.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25살 청년 최진립이 농기구를 들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어.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무과에 급제했고, 나중에는 벼슬까지 받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서 내린 벼슬자리를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어. 이게 이 집안 사람들이 벼슬을 멀리하는 첫 시작이었지.

시간이 흘러 1636년, 병자호란 때 최진립은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나이였지만,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갔어. 전투 중에 화살이 떨어지고 병력이 줄어들자, 그는 평생을 함께한 두 종에게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보존하라고 했지만, 두 종은 주인 곁에서 함께 죽음을 택했어. 최진립과 두 종은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죽었지. 나라는 그에게 병조판서 자리를 내리고 청백리에 올렸어. 청백리는 재산으로 나라를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관리에게 주는 이름이야.

신기한 건, 경주 최씨 후손들은 지금도 매년 12월 27일, 최진립 장군뿐만 아니라 함께 죽은 두 종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는 거야. 양반이 종에게 절을 한다고 손가락질도 했지만, 후손들은 계속 그렇게 했고, 2000년에는 두 종의 비석까지 세웠어. 이 집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거지.

만석꾼이 된 비결

최부잣집은 만석꾼으로 유명하지만, 시작은 청백리였어. 그럼 어떻게 만석꾼이 될 수 있었을까?

최진립의 아들 최동양은 물려받은 논이 겨우 23마지기(축구장 10개 정도 넓이)밖에 안 됐어. 만석을 거두려면 논이 만 마지기는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해 최동양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자갈밭, 습지 같은 땅을 개간해서 없던 땅을 만들어냈어.

그의 아들 최국선 대에 와서는 '이앙법(모내기)'이라는 위험한 기술을 사용했어. 모내기는 물이 없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최국선은 저수지를 파서 물을 확보하고, 농사 관련 책을 공부해서 소작농들에게 가르쳤어. 벼와 보리를 번갈아 심는 법도 도입해서 한 땅에서 두 번 수확하는 법도 익혔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석꾼이 되기 어려웠어. 땅이 더 필요했지만 돈이 없었지.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경주 농민들이 남의 마을 논 매물을 최부잣집에 알려주기 시작한 거야. 왜 그랬을까?

최부잣집이 소작료를 엄청나게 낮춰줬기 때문이야. 심지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던 '마름'도 없애고, 소도 공짜로 빌려줬지. 봄에 곡식을 빌려줄 때도 이자를 거의 받지 않았어. 농민 입장에서는 최부잣집 땅에 소작을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새로운 논이 나오면 최부잣집에 알려준 거야. 마치 집주인이 건물을 더 사면 월세가 내려가는 구조와 같았지.

이렇게 아버지, 아들, 손자 3대에 걸쳐 땅을 개간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농민들과 상생하면서 마침내 만석 규모의 소출을 올리게 된 거야.

흉년에도 땅을 사지 않은 이유

1671년, 조선에 큰 흉년이 들었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지. 이때 대부분의 지주들은 헐값이 된 땅을 사들여 재산을 불렸어. 하지만 최부잣집은 달랐어. 집안에 내려오는 여섯 가지 가르침 중 하나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는 규칙을 지킨 거야. 굶주린 사람들의 땅을 빼앗으면 반드시 원한이 쌓이고, 그 원한은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대신 최국선은 곡간을 열어 굶는 사람들에게 쌀을 퍼주고,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옷을 지어 입혔어. 또한, 곡식을 빌려주고 받아둔 담보 문서들을 모두 태워버렸지. "갚을 사람은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고, 갚지 못할 사람은 담보가 있어도 갚지 못할 것"이라면서 말이야.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바로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거야. 경주를 중심으로 40km 반경 안의 모든 사람들을 책임지겠다는 뜻이었지.

최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르침 (육훈)

이 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여섯 가지 가르침, '육훈'이 있었어.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 것: 벼슬에 오르면 당쟁에 휘말려 재산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어.
  2. 재물을 모으되 만석 이상 모으지 말 것: 재산이 끝없이 불어나면 지역 땅을 다 삼키고 미움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만석은 스스로 멈추는 눈금이었지.
  3. 손님이 찾아오면 후하게 대접할 것: 벼슬을 포기한 대신, 세상 소식을 듣기 위해 문을 열어두고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했어.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 것: 굶주린 사람들의 땅을 빼앗지 않겠다는 원칙이었어.
  5. 며느리는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집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을 결정하는 며느리에게 가난을 먼저 겪게 해서 돈의 소중함을 알게 하려는 뜻이었어.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원칙이었지.

이 여섯 가지 가르침은 재산을 늘리는 규칙이 아니라, 오히려 멈추고 나누라는 규칙이었어.

마지막 주인, 최준의 선택

11번째 주인 최현식은 나라가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어. 그리고 그의 아들 최준은 12번째 주인이 되었지. 나라가 없어지면 부자도 없다는 생각으로, 최준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어. 독립군 군자금을 상해로 보내는 백산무역 회사를 세우고,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은행에 담보로 잡혀 돈을 빌려 회사를 운영했지.

그렇게 12대가 모아온 재산이 모두 사라졌지만, 최준은 자신이 보낸 돈이 독립운동에 제대로 쓰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 20년 넘게 그 의심을 안고 살았지.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최준을 불러 임시정부가 받은 자금 장부를 보여줬어. 거기에는 최준이 보낸 돈이 그대로 적혀 있었지. 처음으로 자신의 돈이 제대로 쓰였다는 것을 확인한 최준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

해방 후 돌아온 재산으로 최준은 다시 땅을 사지 않았어. 대신 대구에 대학을 세우고, 살던 집과 선산까지 학교 재산으로 내놓았어. 후손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지.

나중에 학교가 재정난에 빠지자, 최준은 학교를 다른 대학에 합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어. 12대를 이어온 집안의 역사가 서류 몇 장으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

1970년, 최준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뒤, 300년 동안 문을 잠근 적이 없던 최부잣집 사랑채와 별당에 불이 났어. 굶은 사람이 밥을 먹고, 나그네가 쌀을 퍼가고, 독립자금 장부가 오가던 그 방이 그렇게 사라졌지.

몇 해 뒤에는 학교 재단이 선산까지 팔아버렸어. 후손들은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 뒤였지.

지금도 경주 교동에 최부잣집이 서 있어. 불탔던 사랑채는 다시 세워졌고, 문은 여전히 열려 있어. 하지만 이제 그 뒤주에서 쌀을 퍼가는 사람은 없어. 담이 낮고 처마도 낮은 그 집은, 조선 최고의 부자였던 집이 무너지고 남은 낮은 담 하나와 400년 동안 잠기지 않았던 문 하나만을 간직하고 있어. 그리고 한 해에 한 번, 그 집안에서는 여전히 세 개의 상이 차려진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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