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혁명 4권 춘람 2부: 인류 평화의 길, 지금 시작됩니다!
붓다가야 행사와 야마모토 신이치의 연설
붓다가야에서 동양 광호의 비석을 만지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때 장내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어. 이 영상은 316의 맹세를 완수하려는 사제의 정신을 보여주는 거였지.
마지막으로 야마모토 신이치가 연설을 했는데, 출연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는 위대한 종교와 생명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했어. 그리고 학회의 사명에 대해서도 언급했지.
지금 세계를 이끌어야 할 나라들이 강한 힘을 자랑하면서도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고 민주와 평등을 주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없다고 했어. 이런 상황에서 힘이나 권력이 아닌 전 민족, 전 인류의 평등을 설한 니치 대성인의 생명 철학으로 인간 공화의 모습을 실현해 온 것은 학회뿐이라고 강조했지. 그래서 한 사람의 행복도, 세계 평화도 불법 사상과 학회라는 인간의 연대가 확대될 때만 존재한다고 말했어.
도다 조세이에 대한 추억
신이치는 도다 조세이에 대한 추억도 이야기했어. 1958년 3월 16일은 도다 선생님이 '광선유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모의 시험의 의미를 담아 '광포의 방정식'을 나타내신 날이라고 했지. 그날 약속했던 정치인은 오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한 나라의 수상도 서민도 모두 평등하며,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법의 빛을 받을 수 있는 광선유포의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했어.
선생님은 그 식전이 끝나고 상경하기 직전에 "우리들 모두 싸우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정말 깊다고 했지. 불행한 사람들을 구하는 싸움, 잘못된 종교와 싸우는 싸움, 부당한 권력과 싸우는 싸움, 자기 자신과 싸우는 싸움 등 모든 것을 포함한 말씀이었다고 해. 몸이 쇠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눈빛으로 "우리들 모두 싸우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신이치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심정이었다고 해. 그리고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겠다고 다시 결의했다고 했어.
이 말씀은 선생님의 혼의 외침이자 생명의 말씀이었고, 우리들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광선유포의 날까지 함께 싸워나가자고 호소했지. 신이치의 이 연설은 신문에 실렸고, 전국 회원들은 큰 힘을 얻었어. "우리들 모두 싸우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동지들의 신조가 되었지.
부당한 따돌림 사건들
이 무렵, 학회원에 대한 부당한 따돌림이 각지에서 심각해지고 있었어.
효고현 아오키초 사건:
- 어느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신사 관리 당번을 순서대로 맡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학회원인 다스타 하루오의 집이 차례가 되었어.
- 하지만 다스타는 신사 봉사나 참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종교 신조에 맞지 않아 거부했지. 다른 학회원들도 마찬가지였어.
- 마을 임원들은 학회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학회원을 제외한 임시 총회를 열어 마을 규약을 개정했어. 신사 행사 담당자가 되는 것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면 마을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잃게 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지.
- 이후 학회원도 참가시킨 총회에서 마을 책임자는 학회원에게 신사 행사 참가를 촉구하며 학회를 그만두도록 압박했지만, 학회원들은 단호하게 거부했어.
- 다음 날, 마을 수도 위원들이 다스타의 집 수도관을 잠그고 붉은 흙을 채워 넣었어. 마을 규약에 따라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는 수도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거지.
- 마을 행사 연락용 유선 방송 설비도 제거되었고, 공동 소유 재산에 대한 권리도 박탈당했어. 학회원들은 물지개를 지고 먼 곳에서 물을 길어와 생활해야 했고, 이웃 사람들은 인사도 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따돌림도 시작되었지.
- 이 사건은 헌법에 보장된 신교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을 위협하는 행위였지만, 다스타를 비롯한 학회원들은 법적 지식이 부족해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어.
- 하지만 그들은 "대성인께서는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나를 만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신심이 진짜라는 증거다"라고 서로 격려했지.
- 이 사건을 알게 된 학회 본부는 간부를 파견하여 격려하고, 인권 옹호 위원회 등과 교섭에 나섰어.
- 마을 임원들은 학회원에게 수도 급수를 재개하고 마을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고, 사건 발생 2주 후 마을 동장과 임원들이 학회원에게 사과하며 화해하는 형태를 취했지.
- 하지만 이후에도 따돌림은 계속되었고, 다스타의 가게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러 오지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회원들은 의기양양했고, 아오키초에서의 포교는 오히려 늘어났지. 학회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거야.
효고현 산다시 사건:
- 이와 비슷한 사건이 산다시에서도 일어났어. 어느 사원에서 보강 행사가 열렸는데, 그 비용이 각 가정에 할당되었지.
- 학회 청년 후쿠다 다미토는 자신이 믿지 않는 종파의 행사 비용을 내야 한다는 것에 납득할 수 없다며 거부했어.
- 후쿠다의 아버지도 이미 입회했고, 마을 사람들의 반향은 예상보다 컸지.
- 후쿠다는 오히려 이 기회에 마을 사람들을 포교하고 종교에는 정사가 있다는 것을 호소하겠다고 마음먹었어. 오사카 조직 남자부의 도움을 받아 20명 정도의 멤버와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며 포교했지.
- 이후 마을 전체에서 후쿠다의 집에 항의가 쇄도했고, 마을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졌어.
- 마을 동장은 후쿠다에게 행사 비용을 내라고 설득했지만, 후쿠다는 거절했지.
- 마을 임원회에서는 마을 주민이 결정한 사항을 지키지 않는 자는 마을 주민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자격을 잃게 된다는 규약을 작성했고, 임시 총회를 열어 이 규약을 의결했어.
- 총회에서는 후쿠다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고,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에게는 마을의 수도 공급도 중지해야 하고, 마을 길도 다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왔지.
- 후쿠다는 자신들의 행동이 헌법 위반이고 인권 침해라며 반발했지만, 결국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새로운 규약에 찬성했어.
- 이 규약은 헌법에 반하고 신교의 자유와 인권을 빼앗는 것이었지만, 후쿠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마을 동장을 헌법 위반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어.
- 법무국은 마을 규약의 헌법 위반 의혹을 조사하라고 공고했지만, 경찰은 마을 임원들과의 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지.
- 후쿠다의 가족에게도 압력이 가해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어. 야마모토 신이치의 지도에서 큰 용기와 힘을 얻었지.
- 이 사건은 마을 규약을 파기하고 후쿠다가 고소를 취하하여 화해하기까지 약 2년이 걸렸어.
이 외에도 미에현 구마노시, 구마모토현 아소군, 군마현 안나카시 등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어. 신사에 대한 기부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신사제를 지낼 때 학회원이 운영하는 가게에 신위를 안치한 가마를 난입시키는 악질적인 집단 폭력도 있었지.
이러한 사건들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행사에 반강제적으로 참가시키려는 것에 대해 학회원들이 신교의 자유를 자각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어. 이는 일본 사회의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와 인권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
야마모토 신이치의 대응과 지도
야마모토 신이치는 이러한 집단 따돌림 사건 보고를 받을 때마다 가슴 아파했고, 동지들에게 격려의 글을 보내는 등 여러 가지로 격려했어. 또한 최고 간부들에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고 응원해 갈 것을 지시했지.
신이치는 이러한 사건들이 불법의 법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연한 일이라고도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신심의 최고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어. 불법은 승부이며,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강조하며, 결코 비관적으로 되지 말고 당당하고 밝게 살아가라고 격려했지.
그는 마키쿠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고난을 언급하며, 집단 따돌림 정도는 모기에게 물린 것과 같다고 말했어. 괴롭힌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
신이치는 동정은 일시적인 위로에 불과하며, 동지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신심으로 일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강한 신앙의 사람으로 육성하기 위한 도약으로 삼고 있었지.
국회에서의 문제 제기
참의원 의원이었던 세키 히사오 이사는 이러한 집단 따돌림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법치 국가에서 믿는 종교 때문에 차별받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는 이것이 단순히 학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인의 인권과 관련되어 있으며, 일본 국가의 미래에 큰 화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지.
세키 이사는 학회가 추천한 다른 참의원 의원들과 상의하여 국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했어. 3월 23일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질문을 통해 집단 따돌림 사건을 거론하며 관계 장관들에게 질문했지.
자치부 장관은 신사나 불각의 기부가 관습처럼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강제적이거나 폭력적인 처사에 대해서는 엄중히 단속하고 주의하겠다고 답변했어. 경찰청 보안국장도 협박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했지.
세키 이사는 경찰이 학회원의 고소에 소극적인 점, 마을 유지들과 짜고 움직이지 않는 점 등을 지적하며 경찰관의 직무 태만을 추궁했어. 결국 집단 따돌림이 위법 행위이며, 고소가 있으면 경찰은 즉시 단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지.
도다 조세이 회장 추모와 신이치의 결의
4월 2일은 야마모토 신이치가 회장 취임 후 처음 맞이하는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기일이었어. 이날 법요가 거행되었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지. 신이치는 이 비를 마치 폭풍우 속을 전진하라는 도다의 지도처럼 느꼈어.
신이치는 1951년 남자 청년부 결성식 날에도 비가 세차게 내렸던 것을 떠올렸어. 그때 도다 선생님은 이 자리에서 반드시 학회의 다음 회장이 배출될 것이라고 말하며 광선유포 완수의 사명을 호소했었지.
신이치는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3년 만에 그 싸움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증명되고 있다고 말했어. 불행에 괴로워하던 민중이 도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수생한 모습은 전국 어디에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선생님의 정의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라고 했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로 펼쳐지고 있는 광선유포의 확산을 보며, 신이치는 도다 선생님의 정신이 평화로운 일본과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어. 자신도 도다 문화생의 대표로서 광선유포를 달성했다고 당당하게 보고할 수 있도록 전진하겠다고 다짐했지.
폭풍우가 멈춘 후, 신이치는 도다 선생님의 와카를 떠올렸어. "삼류의 강적이 있을지라도 사자의 자식은 광포의 여정에 용감하게 서라." 그는 사자의 자식이 드디어 본격적인 질주를 시작했으며, 그 징조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