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부자 1위에서 자산의 95%를 잃은 후, 다시 부활한 세계 최고의 투기꾼 | 손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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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전 재산에서 얼마나 잃어보셨나요? 여기, 세계 부자 순위 1위의 자리까지 오른 후 자산의 95%를 잃었지만 다시 일본 최고의 부자에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손 마사요시, 혹은 손정의 한 때 전 세계 1,000개의 유니콘 기업 중 20%가 그가 투자한 회사일 만큼 전세계 벤처기업 생태계에 마사의 영향력은 엄청난데요 오늘의 수업 내용은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나 가난과 차별 속에서 자란 후 부자 순위 1위와 파산의 위기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한 소프트뱅크의 창립자이자 세계 최고의 투기꾼 ‘손 마사요시’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스모토 마사요시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군에게 집안의 농지를 강탈당한 한 소년이 일본 규슈에 도착합니다 손종경 지쿠호 지역의 탄광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얼마 후 소작농이 됩니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14살의 한국인 ‘이원조’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1936년, 부부 사이에서는 ‘손삼헌’ 일본 이름 ‘야스모토 미쓰노리’가 태어납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고 손씨네 가족은 일본에 남을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제국의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재일조선인(자이니치)’는 일본 내에서 이전보다 더한 차별을 받았으며 이들은 살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손종경의 고향인 대구로 돌아갔지만 “양반인 손씨가 어떻게 장사를 하고 구걸을 하느냐?너희는 집안의 망신이야!” 친척들이 물건을 부수고 난동을 부립니다 결국 이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규슈의 한국인 빈민촌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곳은 밀주업자, 고리대금업자, 야쿠자들이 얽힌 지하경제의 중심지였고 경찰도 쉽게 접근하지 않는 무법지대였죠 어머니 이원조는 생선, 채소를 팔았고 아들 미쓰노리는 학교를 관둔채 밀주를 팔며 돈을 법니다 1957년, 이곳의 이름없는 흙길에서 미쓰노리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야스모토 마사요시 부모님이 일을 하러 나가면 마사는 할머니와 함께 동네 식당에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 돼지에게 먹입니다 마사가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일본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립니다 일본 내에서 재일교포는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고 그때서야 마사는 알게 됩니다 본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국적이 뭔지, 차별이 뭔지라는 것을 맥도날드의 나라 마사의 아버지는 돼지를 팔아 돈을 벌기 시작했고 5년 만에 4천만 엔을 법니다 이 돈을 바탕으로 그는 고리대금업을 시작하고 파칭코 사업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전후 일본에서 파칭코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엄청난 인기였고 법적으로도 애매한 회색지대에 있었기에 재일교포들이 많이 진출하였죠 미쓰노리의 사업장 ‘라이온스’는 12곳이 넘는 지점을 열었고 매 달 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기까지 합니다 덕분에 그는 외제차를 몰며 친인척 스무 명을 부양할 수 있었고 마사도 부유한 어린 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마사의 어릴적 꿈은 중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국적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부모님은 마사에게 한국의 대통령이 되라고 말했지만 마사는 사업가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을 주목하죠 전후 일본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맥도날드 재팬의 창립자, 덴 후지타 마사는 후지타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만나달라고 애원했지만 실패합니다 중학생인 그는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가 그의 사무실 앞에 나타납니다 “후지타 선생님께 전해주세요.
” “대화도 필요 없고, 하시던 일을 계속 하셔도 좋습니다.
” “저는 그저 선생님의 모습을 3분만 보고 싶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후지타는 마사를 흔쾌히 만납니다 마사는 그에게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물어보고 후지타는 답합니다 “컴퓨터! 미래는 컴퓨터 산업이 대세입니다! “그리고, 영어를 배우세요!” 1973년 여름, 중학교 여름방학에 마사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6주짜리 어학과정을 등록합니다 백인, 흑인, 아시아계 학생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자기 민족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학생들의 모습을 본 마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중대선언을 하죠 “저는 앞으로 일본 성씨인 ‘야스모토’가 아니라” “한국 성씨인 ‘손’으로 살아가겠습니다.
” 어릴때부터 고집이 강하던 마사를 설득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모님은 알고 있었고 유학을 허락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세라마운트 고등학교’에 입학한 마사는 며칠 뒤, 눈부신 미소를 가진 일본 소녀에게 첫 눈에 반하죠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되는 ‘오노 마사미’ 마사는 그녀와 같은 해에 같은 대학에 입학하겠다고 결심했고 입학 일주일 만에 교장을 찾아갑니다 “가능한 빨리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학년을 올려주세요!” 규칙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달랐죠 마사의 배짱에 감명받은 교장은 한 발 더 나아가 2개 학년을 올려줍니다 덕분에 마사는 곧바로 대학 입학 시험을 치룰 수 있었고 고등학교에 등록한 지 한 달만에 졸업을 합니다 창업 1975년 마사는 오클랜드의 ‘홀리 네임스’ 대학에 입학합니다 학교에서 실리콘밸리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았고 마사는 아버지가 사 준 포르쉐를 타고 이곳에 갑니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에 세계적 수준의 일본 엔지니어가 방문합니다 사사키 타다시 ‘로켓 박사’로 불린 사사키는 일본의 전자기기 대기업 샤프에 합류하여 세계 최초의 전자 계산기를 개발했습니다 사사키를 만난 마사는 다짜고짜 말합니다 “저는 재일 한국인이고,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만들고 싶어서 미국에 왔습니다.
” 마사의 당돌함에 이끌린 사사키는 그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었고 이후 40년 넘게 이어진 그들의 관계에서 마사가 위기에 있을 때마다 사사키가 큰 도움을 주었죠 홀리 네임스에서 2년을 보낸 마사는 버클리 대학교에 편입하여 경제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합니다 그런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돈을 벌까?’ 매일 5분씩 새로운 발명 아이디어를 적은 그는 1년 동안 무려 250개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으며 이 중 가장 사업성이 높은 아이템을 선택합니다 말하는 단어 번역기 마사는 곧바로 버클리 교수의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도와줄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고 당시 인공위성 궤도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손꼽히는 석학 ‘포레스트 모저’ 교수를 찾아갑니다 “공항에 키오스크를 설치하고, 입국하는 승객에게휴대용 음성 번역기를 빌려주는 사업을 할 겁니다.
” 마사의 열정과 사업 아이템에 매료된 모저 교수는 시제품 개발을 도와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말하죠 “그 친구는 언젠가 일본을 손에 넣을 거야.
” 마사는 대만에서 유학 온 ‘홍 루’를 설득하여 함께 창업을 합니다 그들은 시제품을 시연하기 위해 일본의 가전업체 50곳에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무시당합니다 결국 사사키에게 부탁한 마사는 샤프와 미팅을 잡았고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기기를 시연합니다 사사키 박사는 이 ‘말하는 번역기’가 샤프의 휴대용 계산기 라인업과 결합될 경우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간파했고 이 특허를 100만 달러에 사갑니다 곧바로 마사는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고 몇 년전부터 관심있던 비디오 게임을 선택합니다 당시 비디오 게임 아케이드는 미국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니까요 마사는 레스토랑, 술집 등을 직접 방문하여 게임기 설치를 협상했고 6개월 만에 350대의 기계를 수입해, 20만 달러의 수익을 냅니다 졸업이 다가온 마사는 루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부모님과의 약속 때문에, 졸업하면 일본으로 돌아가야돼.
” 그렇게 마사는 미국에서 창업한 회사를 루에게 맡기고 1980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소프트뱅크 재팬 일본으로 돌아온 마사에게 사사키 박사는 샤프의 연구개발 센터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마사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는 1년 반 동안 40가지에 달하는 사업 아이템을 정리했고 중학생 시절 후지타가 해준 조언을 떠올립니다 컴퓨터 당시 NEC의 ‘PC-8001’ 출시로 일본에서는 PC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하지만 하드웨어 유통 분야에서는 본인이 1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마사는 PC용 소프트웨어로 눈을 돌립니다 1980년대 초 스프레드시트, Lotus, 워드프로세서, 비디오 게임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떤 소프트웨어가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매장이나 카탈로그가 전혀 없었죠 마사는 개인용 컴퓨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대학 교수이자 경영 구루 ‘노다 카즈오’를 만나 그가 설립한 회사 MRI와 각각 천만엔을 출자해 소프트웨어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소프트뱅크 재팬’을 공동 설립합니다 몇 주 후, 마사는 새로운 도전을 감행합니다 오사카에서 열리는 연례 가전 전시회에서 가장 큰 부스를 빌려 일본 내 소프트웨어 벤더들에게 무료로 참가하라고 제안하죠 마사의 부스에는 방문객들이 몰려들었지만 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하나도 없었고 소프트뱅크 재팬의 자본 80%를 사용했지만 팔린 소프트웨어는 고작 3,000달러치 였습니다 이에 경악한 MRI는 지분을 정리하고 나가겠다고 선언하죠 그러나 그의 시도는 무모함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대형 전자제품 소매업체인 ‘죠신덴키’의 사장이 미팅을 제안한 것이죠 젊은 마사의 패기에 빠져든 죠신덴키의 사장은 소프트뱅크와 미국산 PC 소프트웨어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마사는 곧바로 일본 최대의 소프트웨어 개발사였던 ‘허드슨 소프트’와도 독점 계약을 체결합니다 단 2년 동안 소프트뱅크는 3명짜리 소규모 벤처에서 일본 최고의 소프트웨어 유통회사로 성장했고 직원 수는 75명, 시장 점유율도 75%나 되었죠 그러나 주 7일 근무는 기본이고, 사무실 소파나 침낭에서 밤을 보내던 마사는 심한 피로감과 무기력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는 건강검진을 받았고, B형 간염 진단을 받습니다 의사가 말합니다 “앞으로 1년에서 2년, 길어도 5년 밖에 살지 못할겁니다.
” 병상에서의 사업 당시 B형 간염은 치료법이 없었고 마사는 병실에서 밤마다 울었습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죽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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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 날, 마사의 아버지는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합니다 도쿄의 한 의사가 간염 치료에서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 마사는 곧바로 의사에게 달려갔고, 치료를 시작합니다 4개월 후, 마사의 항원 수치는 정상 수준으로 떨어졌고 2년 뒤에는 B형 간염에서 완벽하게 회복합니다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다음 사업 아이템을 계속 발굴했고 눈에 들어온 것은 통신 시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통신 시장은 NTT가 독점하고 있었지만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했죠 하지만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른 반면 가장 저렴한 회선을 사용하기 위해 고객은 추가로 번호를 눌러야 했습니다 마사는 같은 번호를 쓰면서도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 ‘NCC Box’의 특허를 등록합니다 이 후 이를 구현할 엔지니어를 찾기 시작했고 같은 병원에 만성 간염으로 치료하고 있던 엔지니어 ‘사카노’를 만납니다 사카노는 두 달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마사는 3주 안에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 사업을 진행하며 이를 완성했고 NCC 박스를 20억 엔의 로열티를 받고 팝니다 글로벌 사업 미국의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인구가 1억 명이 넘고, 부유한 소비자층이 존재하는 일본 시장을 공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은 일본어를 전혀 몰랐고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진주만 기습 밖에 없었죠 그들에게 영어를 할 줄 알고, 판매 채널을 장악하고 있는 마사는 일본 시장으로의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일본 내 유통업체로 소프트뱅크를 선정했고 이후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로터스, IBM도 뒤를 잇습니다 마사는 벤처기업에 투자하기 위한 ‘소프트뱅크 벤처캐피탈’도 설립했고 당시 벤처기업 수준이던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등에 투자를 하죠 1990년, 마사는 두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먼저, 일본에서만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닌 글로벌로 확장하기 위해 사명을 ‘소프트뱅크 재팬’에서 ‘소프트뱅크’로 바꿉니다 그리고 5개월 뒤, 일본 시민권을 취득합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일본에는 ‘손’씨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식 이름 ‘야스모토 마사요시’로 등록하라고 강요하였지만 “성씨를 버린다는 건 조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라며 거부하였고 한국 성씨를 유지한 채 ‘손 마사요시’라는 이름으로 귀화합니다 야후! 1994년 7월, 소프트뱅크는 일본 자스닥에 상장합니다 주가는 공모가 대비 70% 상승했고 36세인 마사의 자산은 20억 달러를 넘어서며 일본 최고 부자 중 한 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기업들에 투자하기 시작하죠 1995년 당시 알타비스타, 익사이트, 라이코스 등 인터넷 검색 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사는 스탠포드 대학원생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가 설립한 ‘야후!’에 투자하기로 결정합니다 스탠포드 캠퍼스 근처 야후의 좁고 어수선한 사무실을 방문한 마사는 묻습니다 “여러분의 회사, 밸류가 얼마입니까?” 창업자들은 머뭇거리다 답합니다 “4천만 달러 정도요.
” 마사는 답합니다“좋습니다.
거래합시다.
” 세 달 후 그들을 다시 찾은 마사는 3억 달러의 밸류에 1억 달러를 투자해 지분의 1/3을 추가로 갖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IPO를 준비 중이던 야후는 이를 거절하였고 곧바로 마사는 받아칩니다 “그럼 경쟁업체인 익사이트에 투자해서 너희를 박살내줄게.
” 결국 야후는 마사의 투자를 받아들이죠 이 제안에는 야후가 ‘야후! 재팬’을 설립하며 그 비용은 모두 마사가 제공하는 대신 ‘야후! 재팬’ 지분의 60%를 갖는 조건도 있었습니다 1996년 4월, 미국 주식시장에 야후가 상장합니다 마사는 야후 투자로만 1억 달러를 챙깁니다 알리바바 20세기 말, 중국은 세계 경제의 마지막 개척지였고 1995년 마사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합니다 그는 중국 어디서든 돈 냄새가 난다고 말할 정도로 투자 기회가 있다고 보았고 그 중심에는 인터넷이 있었습니다 수천만 명의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몰려들 것이라 확신했죠 1999년 10월, 고작 6분의 회의에서 마사는 본인 인생 최고의 베팅을 합니다 소프트뱅크가 주최한 벤처투자 미팅에는 여러 중국 기업가들이 초청되었고 그 중에는 ‘마윈’도 있었죠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 ‘알리바바’는 사업을 시작한지도 6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수익도 형편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사는 단 몇 분의 발표에서 기회를 간파했고 마윈의 눈에서 보이는 굶주림에 끌립니다 소프트뱅크의 다른 파트너들은 마윈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마사는 마윈에게서 젊은 시절 본인의 모습 억눌리지 않는 야망을 발견했고 모든 반대 의견을 무시합니다 마사는 마윈에서 4천만 달러에 알리바바의 지분 49%를 요구합니다 마윈은 거절합니다 2천만 달러에 40% 또 다시 거절합니다 몇 번의 핑퐁 끝에 결국 2천만 달러에 알리바바 지분 30%를 넘기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2002년, 알리바바는 B2C 서비스인 ‘타오바오’ 브랜드를 출시하였고 마사는 투자금을 1억 달러까지 늘립니다 또한 알리바바는 온라인 결제 서비스인 ‘알리페이’까지 출시하면서 중국 내 최고의 IT 그룹으로 자리매김합니다 2014년 9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알리바바가 상장했고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알리바바 지분 32%의 가치는 무려 700억 달러가 됩니다 그리고 2020년 말에는 그 가치가 2,100억 달러까지 늘어나죠 세계 부자 1위 1995년부터 2000년 사이, 닷컴 버블이 생기면서 인터넷 기업 투기 열풍이 붑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사가 있었죠 1995년 말, 캘리포니아에 문을 연 ‘소프트뱅크 테크놀로지 벤처스’는 첫 해에만 2억 3천만 달러를 56개 회사에 투자합니다 1996년에는 3억 달러, 1998년에는 6억달러 짜리 벤처 펀드를 조성해 미국의 인터넷 기업들에 대규모 투자를 합니다 마사는 총 100개가 넘는 인터넷 회사에 17억 달러를 투자했고 8개 상장기업에만 약 10억 달러를 투자합니다 덕분에 나스닥 시장은 끝없이 상승합니다 일본 내에서 그의 명성도 점점 높아집니다 거품 경제 이후 침체에 빠졌던 일본 경제에 그는 신선한 바람이었고 야후 재팬을 중심으로 그가 인수한 수많은 회사들은 일본 인터넷 경제의 70%를 담당할 정도였죠 2000년 3월, 닷컴 기업들의 폭등으로 마사는 빌 게이츠를 제치고 세계 부자 1위가 됩니다 그리고 3일 후, 닷컴 버블이 터지죠 나스닥 지수는 한 달만에 25% 가까이 하락했고 소프트뱅크의 주가는 한 달만에 반토막이 났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99% 가까이 하락하죠 760억 달러 수준이던 마사의 개인 재산도, 32억 달러 수준까지 줄어들며 -95% 가량 손실을 보았죠 그렇게 마사는,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을 본 사람이 됩니다 소프트뱅크 모바일 닷컴 붕괴 이후, 마사는 자취를 감춥니다 회사에서는 그를 본 사람이 없었고, 모든 약속은 취소되죠 모두가 그를 실패자라며 조롱합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고 좌절한 것이 아닌 회사 전체를 걸고 새로운 베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전역에 초고속 인터넷을 공급하겠다는 계획 일본에서는 통신 시장 규제가 완화되고 있었고 마사는 브로드밴드, 그리고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하고자 했죠 소프트뱅크는 보유하고 있던 여러 회사의 지분을 대거 매각했고 그 돈으로 ‘야후! BB’라는 브로드밴드 회사를 설립합니다 야후 BB는 경쟁사 대비 절반 수준의 인터넷 접속 요금을 책정했고 마사는 주 7일, 매일 18시간씩 일하며 수천억 엔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NTT의 독점을 깨기는 쉽지 않았고, 적자는 날로 심해졌죠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옵니다 1,500만명의 고객을 보유한 일본 3위의 이동통신사 ‘보다폰 재팬’이 매물로 나온 것입니다 소프트뱅크는 170억 달러에 이를 인수하고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이름을 바꿉니다 소프트뱅크는 브로드밴드 서비스 ‘야후 BB’이동통신사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보유하며 순식간에 일본의 통신시장 거물로 성장합니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훗카이도 견종의 하얀 개 ‘오토상’을 마스코트로 내세웠고 TV 광고가 대 히트를 치면서 가입자가 급증합니다 2005년 인수한 야구팀 ‘후쿠오카 호크스’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름을 바꿉니다 2006년 봄, 일본에서는 휴대전화 사용자들이 번호를 바꾸지 않고도 통신사를 옮길 수 있는 번호이동이 시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NTT나 KDDI와 같은 경쟁사를 꺾을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고 마사의 오랜 친구가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스티브 잡스 아이폰 잡스와 마사는 인터넷이 패러다임을 바꿀것이라 직감했고 서로의 비전에 대해 종종 얘기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췌장암을 진단받은 잡스는 수술을 미루는 바람에 암이 간까지 전이되었고 대중 앞에서는 자신이 완치되었다고 했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두 개의 비밀 프로젝트에 모두 쏟기로 결심하죠 아이폰, 그리고 아이패드 2005년 여름 마사가 캘리포니아를 방문했을 때 잡스에게 아이디어를 말합니다 “큰 화면에 애플 OS가 탑재된,데이터와 이미지를 처리할 수 있는 모바일 기기를 만들면 어때?” 이를 들은 잡스는 씨익 웃습니다 “그거, 이미 개발 중이야.
” 잡스는 더 이상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고 마사는 제품이 나오면 본인에게 일본 독점 유통권을 달라고 합니다 1년 후인 2006년, 마사는 보다폰 재팬을 인수했고 2주 뒤 만난 잡스에게 말합니다 “니 말만 믿고 170억 달러짜리 도박을 했으니까너도 책임이 있어.
” 잡스는 웃으며 말합니다 “정말 미친놈이구나.
알겠어.
” 2007년, 애플에서 3G 기반의 아이폰이 출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일본에서의 유통권을 따내기 위해 모든 통신사가 애플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잡스는 친구와의 오랜 약속을 지켰고 2008년 6월, 소프트뱅크는 아이폰을 독점 판매할 것이라 발표합니다 덕분에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점유율은 급상승 하였죠 금융위기와 파산 소프트뱅크가 통신 시장을 장악해 나가는 절정의 순간인 2008년 글로벌 금융시장이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투자은행들은 MBS에 과도하게 투자했고 이는 CDO와 같은 구조화 상품으로 변해 ‘안정적인 고수익 상품’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죠 그리고 투자자 중에는 소프트뱅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골드만삭스가 추천한 CDO 신탁 상품에 750억엔을 투자했죠 2008년 9월, 월가의 대표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금융시장은 대혼란에 빠졌고 도쿄에서는 소프트뱅크가 CDO와 파생상품들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당시 마사의 빚은 그가 가진 소프트뱅크 주식의 가치를 초과했고 사실상 파산 상태였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빚을 갚기 위해 소프트뱅크 지분을 대규모로 팔아야 했고 회사 역시 시장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채 감축 약속 및 여러 정책을 선보입니다 덕분에 마사는 닷컴 버블에 이어 또 다시 재산의 대부분을 잃었지만 이번에도 살아 남을 수 있었죠 ARM 마사는 ‘보다폰 재팬’을 인수하면서 영국의 한 기업을 주목합니다 바로 ARM ARM은 ‘초고속 저전력 반도체 설계’ 기업이었고 대부분의 모바일 기기가 ARM이 설계한 칩을 사용하면서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95%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죠 마사는 10년 넘게 ARM을 눈여겨봤고 이 회사가 디지털 혁명의 다음 단계에서 핵심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습니다 2016년 7월, 마사는 ARM의 대표를 만나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사실 ARM 입장에서도 이는 최고의 제안이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브렉시트’가 결정되었고 유럽과의 관계를 스스로 태워버린 영국은 우호적인 외국 투자자가 절실히 필요했죠 제안이 있고 불과 2주 후 ARM 이사회는 소프트뱅크의 320억 달러 전액 현금 인수 제안을 수락합니다 비전 펀드 마사는 19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 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놀랍게도 50대까지 그의 인생은 계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고 이제 마지막 60대 계획, 은퇴의 단계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배고팠고 2016년 7월 주주총회 전 날, 그는 은퇴를 철회하고 10년간 더 일하겠다고 선언합니다 ARM 인수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부은 마사는 본인의 꿈을 이루는데 도와줄 곳을 찾아냅니다 중동의 오일머니 석유 의존 경제를 개혁하고 싶었던 중동 국가들은 돈은 넘쳐났지만 실리콘밸리와의 다리를 이어줄 인맥이 부족했고 이 소식을 들은 마사는 기회를 직감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프로젝트가 바로 ‘소프트뱅크 비전 펀드’ 마사는 먼저 카타르 도하를 방문해 카타르 투자청과 만났고 카타르는 3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합니다 다음 목표는 ‘무함마드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의 장관을 만난 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재산의 98%를 잃고도, 다시 돌아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 역시 45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니다 UAE의 국부펀드도 150억 달러 보수적인 애플조차 20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2016년 10월, 1,000억 달러 규모의 비전펀드가 출범합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자금은, 전 세계의 스타트업 붐을 만들어내죠 최악의 투자 실패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미국 대선에서 승리했고 마사는 트럼프 타워에서 당선자와 면담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 전 본인이 눈여겨 보고 있던 스타트업 한 곳을 방문하기로 약속했죠 바로 위워크 [자세한 내용은 위워크 영상을 참조해주세요.
] 12분 간의 본사 투어 후, 마사는 위워크 CEO 애덤에게 트럼프 타워까지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나누자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패드를 꺼내 얼마를 투자할 지 적었습니다 ‘200억 달러 가치에, 44억 달러 투자’ 마사는 싸인을 한 후 애덤에게 이메일로 보냈죠 위워크는 비전 펀드에서 받은 44억 달러를 바탕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했지만 무분별한 확장으로 인해 손실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납니다 애덤은 다시 한 번 마사를 찾아가 더 많은 돈을 요구합니다 “700억 달러를 주시면, 오피스 뿐만 아니라 아파트 시장도 장악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마사는 그의 미친 소리를 듣고 내쫓기는 커녕 오히려 레드 카펫을 깔아줍니다 470억 달러 기업가치에 200억 달러 추가 투자 이 소식을 들은 소프트뱅크 직원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마사는 웃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알리바바에 투자할 때도, 모두 반대하지 않았나요?” “저한테는 위워크가 제 2의 알리바바처럼 보입니다.
” 그러나 비전펀드의 가장 큰 손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추가 투자를 반대했으며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상장도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마사는 결국 위워크에 10억 달러만을 투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19년 10월, 위워크의 IPO가 불발되면서 회사는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470억 달러 수준이던 기업가치는 80억 달러까지 하락했고 애덤 뉴먼은 회사에서 쫓겨납니다 소프트뱅크는 위워크에 95억 달러를 투입했고 망해가는 회사의 지분을 80%나 소유하게 됩니다 코로나 비전펀드는 ARM, 쿠팡, 디디, 도어대시, 바이트댄스 등에 투자해서 훌륭한 수익을 거뒀지만 이 외에는 대부분 형편없는 투자였습니다 소프트뱅크 내부에서는 투자 결정에 대한 규율이 무너졌고 이에 염증을 느낀 매니저들은 회사를 떠납니다 2019년 말 기준 소프트뱅크의 총 부채는 무려 1,770억 달러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부채가 많은 회사 중 하나가 됩니다 다시 한 번 1,000억 달러를 모으려고 했던 ‘비전펀드 2호’는 겨우 300억 달러를 모으는데 그쳤죠 흔들리는 소프트뱅크에 결정타를 날리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중국 우한에서 확인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이죠 소프트뱅크 그룹은 주가가 50% 가까이 하락하고 본인의 소프트뱅크 지분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던 마사도 큰 타격을 입습니다 여기서 주가가 더 떨어진다면 마진콜이 터져 또 다시 파산할 수 있었으니까요 소프트뱅크는 주가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410억 달러 규모의 자산 매각과 180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발표합니다 예정되있던 투자도 줄줄이 취소하였으며 계획된 자금이 틀어진 스타트업들은 파산합니다 2020년 5월 17일, 소프트뱅크는 연간 125억 달러의 역대 최대 규모의 손실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각국 정부가 경제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을 속속 발표하면서 주식 시장은 안정을 찾았고 소프트뱅크 주가도 다시 급등하며 마사는 이번에도 위대한 탈출을 성공합니다 나스닥 고래 2020년 여름, 세계 증시가 급반등하는 가운데 기술주가 날아오르자 FOMO에 빠진 마사는 상장 주식 투자를 위한 트레이딩 팀을 만듭니다 SB 노스스타 트레이딩 팀은 소프트뱅크 그리고 마사의 개인 자금을 이용해 나스닥 기술주를 매수할 뿐만 아니라 콜옵션, 선물 계약까지 활용해가며 엄청난 레버리지 투자를 합니다 나스닥의 이름 모를 고래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콜옵션을 매수하자 주식 시장은 폭등했고 2020년 8월 한 달동안테슬라 74%, 애플 21%, 알파벳 10%, 아마존 9% 등 나스닥 시장은 급등을 이어나갑니다 마사의 트레이딩 팀은 무려 70억 달러의 이익을 기록했죠 소프트뱅크 고위 임원들은 매우 기뻐하며 이를 자축했지만 정작 트레이딩을 담당하는 직원은 울먹이며 그만할 때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익에 취한 마사는 멈출 줄 몰랐죠 몇 일 후인 2020년 9월 4일, 파이낸셜 타임스는 나스닥을 급등시킨 고래가 소프트뱅크였음을 폭로합니다 주식 시장에서 대규모 포지션이 노출된다는 것은 상어들 앞에서 피를 흘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래의 정체가 드러나자 시장은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트레이딩팀은 불과 몇 주만에 90억 달러의 손실을 입으며 결과적으로 20억 달러의 손실로 포지션을 정리합니다 자취를 감추다 2020년 10월, 상하이에서 열린 금융 세미나에는 공산당 고위 관료, 규제당국, 대기업이 총출동했고 마윈은 중국의 금융 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연설을 합니다 “중국 지도부의 금융 규제가 혁신을 질식시킵니다!” 그러나 이는 마윈 인생 최악의 실수였습니다 며칠 후 그는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로 끌려가 호된 질책을 받았으며 3,000억 달러 기업가치로 상장을 준비중이던 알리바바의 모바일 결제 자회사 ‘앤트 파이낸셜’의 IPO는 중단됩니다 반독점 위반으로 27억 달러의 과징금을 내기도 했죠 IPO 취소로 마윈은 약 37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마사 역시 엄청난 손실을 입습니다 소프트뱅크 시장 가치의 50% 이상은 알리바바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알리바바 주식의 1/3을, 소프트뱅크가 보유하고 있었다.
] 소프트뱅크가 대규모로 투자한 ‘그린실 캐피탈’도 문제가 됩니다 ‘공급망 금융’ 스타트업인 그린실 캐피탈에 소프트뱅크는 35억 달러 기업가치에 15억 달러나 투자했으며 크레딧 스위스의 그린실 관련 펀드에도 수억 달러를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그린실이 파산했고 소프트뱅크는 투자금 전액을 날렸죠 [그린실 파산에 이어 빌 황 사태로, 크레딧 스위스 역시 몰락합니다.
] 이 외에도 코로나로 인해 실물 경제가 멈추면서 소프트뱅크가 투자했던 수 많은 스타트업들이 파산합니다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미국 Fed는 기준금리를 계속해서 올립니다 30년간 이어진 저금리 환경 하에서 막대한 부채를 이용해 대규모 투자를 하던 소프트뱅크의 전략이 막을 내릴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연간 수익률 30%를 목표로 하던 비전펀드 1호는 겨우 한 자릿수 수익률에 그쳤고 비전펀드 2호는 적자 투성이가 됩니다 2022년 11월, 마사는 실적 발표를 위해 무대에 올랐고 그의 표정을 매우 우울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선언을 하죠 “앞으로 저는 실적이나 전략에 대해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 “이제 모든 발표는 CFO인 고토가 할 것입니다.
” 그렇게 마사는 대중 앞에서 사라집니다 화려한 부활 마사가 사라진 후, 사람들은 그를 실패자라 조롱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닷컴 버블 후에 그랬고, 금융위기 이후에 그랬듯 이번에도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ChatGPT가 등장하면서 AI 시대가 열렸고 그 중심에는 그가 인수했던 기업 ARM이 있었죠 2023년 여름, 마사는 그 해 최대 규모의 IPO인 ARM 상장을 들고 나옵니다 애플, 구글, AMD, 인텔, 폭스콘, 삼성 등 전 세계 주요 테크 기업들도 IPO에 참여하면서 2016년 320억 달러에 인수했던 ARM의 가치는 2024년 초 1,400억 달러가 넘었고 ARM 지분 90%를 보유하고 있는 소프트뱅크는 대박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ChatGPT와 AI에 완전히 꽂혀버린 마사는 2024년 10월, 오픈AI에 5억 달러를 투자한데 이어 2025년에는 40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입니다 또한 오픈 AI의 ‘샘 올트만’,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과 함께 AI 합작회사 ‘스타게이트’를 설립해 5,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판잣집에서 태어나 약 30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며 일본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이 된 마사요시의 전 세계를 향한 겜블링은 오늘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