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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할 삶과 죽음의 비법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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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죽으면 '이렇게 됩니다' 죽기 전 절대 '이것' 하지마세요 (성진 스님, 하성용 신부 / 풀버전)

신사임당

조회수 1.3K회 좋아요 83개 게시일 2025년 06월 11일

설명

⭐ 성진 스님의 신간 [절 마당에 앉아]를 소개합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702902 [성진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남양주 성관사 주지 '절 마당에 앉아' 저자 [하성용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종교는 달라도 인생의 고민은 같다' 공동 저자 ✔️촬영일: 6월 3일 📌 신사임당은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전달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출연자에 대한 인신공격, 근거 없는 비난, 욕설, 비속어를 포함한 댓글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출연자의 의견은 채널의 방향성과 무관하며, 소속회사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또한, 투자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 출연신청 & 제휴 및 광고문의: ssid@dpn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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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무조건 죽어야 됩니다.

이거는 시간 차이의 문제지.

그래서 생명이 소중한 거거든요.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죽음을 같이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결코 가벼 여기면 안 된다.

미련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다 미련을 안 두고 살 수는 없잖아요.

누구도 각자의 고유성과 각자의 개성이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미련을 남는 삶을 살아도 그게 잘못됐다라거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니까.

저 남양주 성관사에서 머물고 있는 성진 스님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저는 천조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무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하성용 신부입니다.

반갑습니다.

인연의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일단 저희 신부님하고 저하고는 방송국 SBS 라디오에서 나무아미 타블 아멘이라는 시사 프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저 신부님 그리고 이제 목사님 세 명이 함께 이제 여러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있었던 거예요.

거기에서 거의 1년 6개월 매주 시무님을 베게 된 거죠.

그게 이제 그때 처음 뺐던 거죠.

예.

만나서 하시는 이야기 혹은 활동이 있나요? 저희가 이제 주로 스님이랑 저랑 만나서 하는 거는요.

이제 그 중창단에 관련돼서는 그 한 2주에 한 번씩 연습하고 여러 군데서 저희 초청해 주시면은 초청해 주신데 가서 뭐 토크 콘서트처럼 이렇게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는 거는 이제 목사님이랑 저랑 스님이랑 교모님에서네 명이 같이 하는 거고 그리고 또 스님이랑 저랑은 또 따로 제 이렇게 유닛처럼네 따로 이제 또 초청해 주시면은 또 그렇게 또 만나서 또 강연 같은 걸 또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신부님과 스님의 하루 일관은 어떻게 되나요? 뭐 거의 비슷한데요.

뭐 이제 일단은 아침에 한 요즘 한 5시 반차를 이제 요즘 예전에 한 4시에 4시 반에 예부했었는데 5시 반으로 조금 늦혀졌고 그리고 이제 아침 공양하고 저 같은 경우에 만약에 특별한 입장이 없으면 이제 사찰에 있는 거고 이제 사시 기도를 해 가지고 또 법회가 주로 10시에 있습니다.

그 외에는 저 이제 또 만남충 중창단 저희 연습도 있고 또 뭐 공연 토크 콘서트 있을 수 있고 또 저는 이제 지금 동국대학교 그 융학 상담 코침학과라고요.

그 상담과 코칭을 같이 배우는 대학원을 제가 다시 다니고 있어서 또 학교 가서 리포터 이제 숙제도 해야 되고 또 이제 코치 자격증이라는게 또 있어요.

그래서 이제 코치 자격증을 이제 1차는 땄고 그다음에 이제 다시 또 그 위에 어 상위 코치 버전을 따기 위해서 또 하고 그리고 이제 뭐 저녁 시간 되면은 자야죠.

저녁에는 자야 되고 단지 요즘은 이제 과제도 많고 하다 보니까 조금 이제 늦게 자는 편인데 거의 일과는 거의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죠.

저는 이제 보통 그 신부님들하고는 조금 다른데요.

그 성당에 있는 신부님들의 일정은 거의 스님이랑 비슷하고요.

근데 저는 이제 그 교구청으로 출퇴근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보통 직장이나 똑같습니다.

그 9인투 6여 가지고요.

그래서 아침에 9시까지 출근해서 이제 사무실에서 뭐 회의하고 뭐 결제하고 뭐 사람들 만나고 그러다가 이제 6시 되면 퇴근하고 보통 신문님들의 삶은 스님하고 약간 비슷한데 저는 이제 직장인들하고 삶은 거의 비슷합니다.

네.

언제부터 종교인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저는 이제 대학교 3학년 때 출가를 했습니다.

저는 이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들 다니고 있었고 물론 이제 불교학가는 여러 우유곡집 끝에 제가 이런 기획했을 때 말씀드리겠는데 이제 이지망이 붙은 거였습니다.

일지망은 경찰행화를 제가 지원했었고 그래서 아버님은 성경 지명 있으셨다고 봐야죠.

아버님은 그때 저희에게 요구했던게 서울대 아니면 동대 불교학과셨기 때문에 물론 이제 그때도 저는 이제 추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한 적은 없고요.

동국따기 불교학가가 실제로는 어 스님들은 따로 이제 선학가라고 불교 대학 안에 과가 따로 있습니다.

이제 기본적으로 불교학과는 지금 이제 학부로 통합이 됐는데 그 당시만 해도 이제 거의 제가 학생들이 더 많았고요.

훨씬 제가 학생들 비율이 90% 돼 거의 스님들게 한 분 두 분 정도 수분 정도 있었기 때문에 불학과를 더군 이지망에 갔기 때문에 출가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다가 정말 우연한기에 저는 이제 저희 스승이신 의사 스님을 뵙고 바로 바뀐 예 은사 스님을 뵙고 출가를 결심한 계기였죠.

근데 이제 저 같은 경우에는 성당은 이제 저 혼자 계속 다녔었거든요.

부모님이나 아무도 안 다니고 저희 뭐 친척이나 가족 중에는 천주교 신자도 없었고 그래서 이제 성당은 천주교 신자로선 계속 다니고 있었지만 이제 보통 성직자 수도자 하면은 뭐 집안의 친척 중에서 뭐 성지자 수도자 한 명쯤은 있거나 아니면 뭐 순교자 집안이거나 아니면 뭐 4대 5대째 막 그 신자 집안인 뭐 구교 집안 이제 이런 데서 보통 성직자 수도자가 많이 나와서 이제 저랑은 성직자 수도자랑은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냥 신자로서면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

이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제가 이제 군대에 있을 때 이제 IMF가 터졌었는데데 저 같은 경우는 그 IMF가 제가 이제 사제가 돼야 되겠다는 한 계기가 됐는데요.

이제 그 전까지는 저에게 종교의 어떤 목적, 종교 생활을 하는 이유는 그냥 나랑 내가 아는 사람들 그냥 평안하게 지내고 잘되는 거.

개인적인 어떤 그런 마음으로 종교 생활을 했다고 한다면은네 그 IMF를 통해서 어떤 사회적인 문제나 그다음에 이제 국가적인 어려움 이런게 있을 때 아 종교가 역할을 하는구나라는 거를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걸 보면서 아 저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들어서 그 휴가 복귀하고 난 다음에 이제 그때부터 사제가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래서 이제 일반대학교로 졸업을 하고 이제 신학교를 다시 가서 이제 사제가 된 거죠.

예.

요즘 출가율과 MG 신부님 스님은 존재하나요? 뭐 저는 이제 제 상좌라고 제자죠.

제자.

제자가 두 명이 다 MG입니다.

이제 뭐 30대 이제 중반, 20대 후반 다 MG 세대인데 그렇게 크게 처음에는 느낄 수가 없는게 저 이게 사찰의 삶이라는게 시대별로 달라지진 않으니까 거의 이제 비슷한 처리지만 그래도 이제 제가 겪어 보면은 그니까 저희 때는 스스로들이 분위기를 보고 그냥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야 되고 위에서도 어떤 부분들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이런 정도는 해야 돼.

이제 그런 걸 알아서 뭔가를 내가 이제 해야 되는가 보다라고 하는 식의 움직이었으면은 MG들은 조금은 정확하게 표현해 줘야 된다.

네.

그 자기가 하야 될 영역과 그다음에 하지 않아야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이야기해 주고 또 제가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한 부분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뭔가를 결정하고 판단하데 있어서 이제 시간을 좀 많이 줘야 되는 저기 때는 그런 경계가 없었거든요.

경계가 없이 그냥 흔히서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되 그 시키는 대로 한다는게 매우 모하면서도 위에서는 이제 또 바라는게 많고 우리가 정해진 선에 못 도르게 되면은 불안하기도 했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밑에서 오히려 더 내가 저걸 따라가야 되고 맞춰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이제 지금 지들은 모함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적어를 굳이 막 알아서 내가 그걸 막 해야 하나 이제 그런 부분은 없는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은 훨씬 분명한 거 같고 그 저는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이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전 생각해요.

분명한 부분에 대해서 이제 확인받기 좋아하고 그걸 딱 한 뒤에는 스스로들에게 충분한 공간을 주기를 원하고 그러면서도 의외로 이제 제가 또 볼 때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 있다.

그 저희는 하도 위에 식킨을 하다 보니까 그 이외의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그냥 그게 맞는 생각만 했으면 되는 거지.

근데 지금 MG들은 제 상자로 봐도이 부분은 내가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들에 있어서는 또 다른 포인트가 됐고 중요한 점이 되고 또 그걸 통해서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아 그게 왜 지나간 세대들도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고 볼 때 이제 그런 점 특히 저희가 당연시 봤던 관점들에 대해서 JMG 세대들의 재상자들 같은 경우만 봐도 스스로 방식으로 해석하고 또 주한점을 그 부분에 더 두고 이런 부분들은 또 저희가 배울점이 생각하죠.

요즘에 이제 신학생들도 이제 MG잖아요.

근데 이제 그게 처음에는 대든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 말투가 근데 MG의 고유한 말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게 스임세라는 걸 한참 지난 다음에 알았는데이 무슨 얘기를 하면 외요가 항상 먼저 나와요.

그래서 뭐 내일 뭐 사 새벽사 나와.

왜요? 이러면 처음에는 저게 새벽 유사를 안 나오겠다고 저런 얘기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말두더라고요.

기본적으로.

그리고 이제 저요도 있어요.

그러니까 외요 저요가 무슨 얘기를 하면 외요 무슨 얘기를 하면 저요 그래서 제가 너무 황당하게 둘이 얘기하고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저요 그래서 어 너요 이랬거든요.

이게 그 추임세더라고 했는데 그거를 이해할 때까지는 대든다 반항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해를 했었는데 좀 이렇게 지내 보니까 아 그냥 인산말 같은 그런 감탄서 같은 거구나.

그래서 그냥 지금은 그냥 왜요? 저요 그러면 그냥 넘어가 굳이 설명해야 된다고 생각을 안 했는데 그 전에는 외어져요 하면 설명을 해 주기를 원하는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하는 말이더라고.

그래서 그냥 지금은 그래서 왜요 저요 하면 그냥 이렇게 무의하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면 그 친구들도 그게 다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더라고.

그래서 요즘에 그 MD들만의 어떤 그 말투 어법은 지나선들도 그렇고 일반 사람들도 그렇고 무슨 얘기를 하다 보면 왜요? 항상 저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게 대드거나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추임새라는 거를 지금은 좀 이해하는 편인 거죠.

네.

갓 신부님 스님이 되셨을 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그 지금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까 세기 떠오르지는 않아요.

왜냐면 예 이미 이제 동화가 됐으니까.

근데 이제 제가 출가했을 당시 뭐 지금도 조금 그럴 수 있겠지만 당시에 생각해 보면 그 일반인들이 일상적인 사 공간 안에서 스님들을 만날 수 있는 면이 적었죠.

훨씬 적기 때문에 저는 그 당시에 이제 뭐 대학교 단에 출가를 하고 다시 복학한 뒤에 학교를 계속 다녀 있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 은행을 이용한다거나 버스를 탄다거나 그 일상의 공간에 있는 거잖아요.

일상의 공간이 있었을 때 그분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 매우 이제 신기하기도 하고 이질적으로도 많이 봐 주셨고 가끔 뭐 제때 말씀해 드릴 때 어떤 제 은행에 있었을 때는 어떤 할머니들은 막 뒤에서 거기 한탄하고 계시고 아이고 아이고 뭐 어쩌자고 이렇게 어 말도 많이 들었고 이제 택시를 급하게 택시를 타면은 스님도 택시 타냐고 이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그러니까 에피소드라고 하면은 제가 그 당시에 느꼈던 에피소드는 너무 다른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됐구나.

거의 이제 물과 기름 신기하고 긍정적으로 보기보다는 굉장히 어린 나이야 이제 22살이었으니까 긍정적인 보기다는 안타깝게 보고 부정적으로 본 시각을 거의 한 10년 정도는 일상이 삶 공간에서 마주칠 때는 겪었다고 봐야죠.

저는 이제 그 가톨릭의 병자 성사라고 이제 아프신 분들한테 이제 병자 성사라는 걸 주게 되는데 제가 그 병자 성사 세신보 때 드릴 때 세 번째 분까지는 제가 병자 성사 드리는 족쪽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일 인상적인 거는 처음 병성사 갔을 때 그 할아버지가 이제 요양병원에 오래 계시다가 이제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집에서 돌아가시게 했으면 좋겠다고 유가족들이 원해서 이제 집에다 모신 거였거든요.

그 병도 상사 끝나자마자 마침 그 기도하는 순간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가.

그래가지고 이제 119를 불러서 경찰 집에도 돌아가신 거잖아요.

그 119도 부르고 경찰도 왔어요.

그래서 경찰서 가서 조서 받았거든요.

근데 혹시라도 이제 이분이 돌아가시게 되는데 원인을 제공했을까 봐.

그래서 이제 그 인상이 너무나 강렬하고 그런데다가 처음 한 분이 그렇게 돌아가셨고 두 번째 세 번째 분들은 다 병원이었는데 중한자수 이랬는데 그분 돈도 아무튼 병상동사 드리고 그 나오는 길 또는 아니면 성당에 이제 와서 조금 있으면 막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약간 트라우마 같은게 있었어요.

그래서 누가네 번째 다섯 번째부터는 병관을 달라고 그러면 이게 돌아가시는게 해피한 건지 아니면 안 돌아가시는게 맞는 건지 막 이러니까 병명사하기가 막 굉장히 길렸었거든요.

근데 이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네 번째 다섯 번째 이제 그 이유로 쭉 이뤄질 때는 이제 병성사 할 때마다 돌아가시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그 처음에 병자성 들렸을 때 그 할아버지가 저랑 얘기도 했었거든요.

대화도 되고 그랬는데 끝나자마자 돌아가셔서 경찰서에 가서 막 조서 쓰고 이러는게 너무나 그 쇼킹했었기 때문에 그런데다가 두 번째 세 번째 또 그런 일이 있어서 한 때는 내가 병사를 들이면 다 돌아가시는 거 와가긴 건지 저승사장인가라는 생각도 못 들고 그랬었는데 그 이유는 괜찮아져서 그렇게 했는데 에피소드라고 한다면은 그 인상이 되게 강리를 그 처음에 병수했을 때 돌아가지 할아버지 신물들이 말씀하시니까 저는 이제 돌아가셨다고 정 반대로 돌아가셨다고 이장님 마을 이장님 하셨던 어르신 돌아가셨 했다고 해가지고 제가 전북 장수였기 때문에 업에 그 마을에 내려가서 택을 찾아가는데 상가등 이제 조등도 다 켜져 있고 했는데 가니까 이제 철문 열고 딱 마당에 딱 들어가니까 대충 마두가 있는 쪽에 이제 병풍이 쳐져 있고 사람 한 번에 누워 있고 한데 모든 사람들이 다 마당에 이렇게 주저 앉아 있는 거야.

그래서 이게 들어간 장면이 너무 신기해 가지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보니까 아 돌아가셨다고 이제 염하시던 분이 살아나신 거예요.

가지고 돌아가셨다고 저도 이제 가서 이제 장례 기도를 하러 이제 염부를 하러 갔다가 아 이거 뭐 그당에 출가지 얼마 안 돼 가지고 돌아가시려다 살아신 분한테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되는지를 나무암이 타불를 해야 되는지 아 이걸 다시 살아나시라고 해야 되는지 너무 그 혼란과 그래서 이제 또 그분을 한 5분간인가 제가 기억나요.

5분 동안 그 어르신이 그 살아 숨을 쉬는 장면에 왜냐면 염을 할 위 상처를 다 벗겨 놓은 상태데 이렇게 살아나셨기 때문에 난리가 난 거였거든요.

근데 이제 저 같은 경우는 그 과정을 봤던 거죠.

이게 숨을 들여마시고 내뱉을 때에 그게 이제 보통 불가에서 이제 숨 뱉고 못 내뱉을 때 지옥을 한번 갔다 온다는 편현이 있거든요.

그 왜 그러냐면 제가 이렇게 보니까이 숨을 들여마시면이 배가 부르푸르 오르게 되거든요.

이게 워낙 앙상하시고 상체가 다 벗겨져 있었을 때 숨을 못 내뱉습니다.

이게 참 드려마신 숨을 못 내뱉게 되면 돌아가시는 거거든요.

이게 24 뱉어야 되는데 뱉지를 못하니까 갈비 뼈나이 모든 몸은 이게 불 떨리는 것까지 번다.

그게 막 막 팽창해서 하다가 한 번에 팍 쓰면 이렇게 정말 완전 우그러 들듯이 그거를 이제 5분간 지켜보고 결국 이제 그 어르신을 이제 돌아가셨는데 그 말씀하신 신부님이 이제 병장 성사 가셨다가 지금 저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이분이 안 돌아가시고 계셔 가지고 그때 기억이 예 신분이 말씀하니까 가장 큰 두 번 겪지 않 그 경우 두 번 겪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예 신부님 스님이 되고 생긴 직업병이 있나요? 특히 종교의 관계없이 인사를 합장한다거나 그게 이제 습스이 많이 들면 저는 지금은 이제 많이 안는데 처음에 이제 들렸을 때는 식당 들어갈 때 합장하고 그 이제 이게 워낙 그게 습권화 되니까 그냥 뭐 식당 들어가다가 이제 해도 합장하고 어디 들어갈 때도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나오기도 하고 그런게 되게 어색하잖아요.

그다음에 이제 철제에서 바로 공량할 때 원래는 이렇게 물을 말을 바로 공량은 말을 할 수가 없어 가지고 그 대신 이제 숙용이나 물을 따라 주는 분들이 있으시면 이게 바로에 물을 다를 때 말을 못 하니까 내가 물은 조금 먹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많이 먹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신호르가 있거든요.

그게 이제 뭐냐면 물 따라주면 이렇게 잔을 흔들어요.

이렇게 딱 흔들 아 여기 멈춰 달라는 뜻인데 이거를 이제 일상에 이제 가끔 식당에서 물 따라 줄 때 이제 나도 모르게 흔들지면 상대 못 알아듣죠.

이제 이런 실수는 있죠.

보통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부님을 찾아오면 힘들고 어렵고 뭐 고민 이런 얘기를 주로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보통은 얘기가 되게 길어져요.

그 그만 끝나는 건 별로 없거든요.

그리고 이제 밝은 얘기나 이런 얘기는 초면에는 거의 없는데 나름대로 뭐 직업병이라고 한다면은 어떤 분이 너무나 싱거운 얘기를 한다거나 예를 들어서 아니면은 밝은 얘기만 하고 끝나면 다 하신 거냐고 물어보는 거는 그니까 이제 어떤 분은 진짜 너무 좋아서 기뻐서 그냥 그 얘기만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혹시라도 다른 얘기가 있는데 그 얘기를 어렵거나 이제 불편하니까 못 하시는가 해서 무슨 얘기가 너무 일반적으로 간단하게 끝나거나 끝나게 되면은 그 다 하신 거냐 그 다 했다 그러면 진짜 다 한 거냐 이렇게 물어보는게 뭐 나름대로 직업병이라면 직업병 예.

왜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제 제가 다음 일정이 있거나 뭐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끊고 싶어도 계속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왜냐면 이제 끝이 없는 얘기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간단하게 끝나거나 너무나 심없지 않은 얘기, 싱거운 얘기를 하면 저 얘기를 하려고 왔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있죠.

종교인으로서 가장 힘든 점과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힘든 점은 누군가의 이제 아픔을 이제 저희들 통해서 그분들은 위로받고 싶고 이제 하잖아요.

근데 이제 다시 스님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어떻게 좀 22살 추구가 그야말로 제 자신도 세상이 아픔이라는 거를 겪었지 않았어요.

근데 그거를 내가 봐도이 너무 큰 일 같은 일을 겪는 분들을 대할 때 처음에 어떻게 의료해야 되는지 몰랐어요.

이거는 특히 뭐 자식을이 부모님이라든지 이런 분들에게 내가 도대체 어떤 위로를 해야 하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아픔들을 제 스스로가 어떻게 같이 공감하고 위로 해야 하나? 그게 그냥 그 당시에 이제 이런 거예요.

울 아 전부 같이 울고 슬퍼하면 되는데 아 난 뭔가 특별하게 더 다른 위로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 순간들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이죠.

사실은 얘가 어떻게 나 준비되지 않았는데 이거를 어떻게 위로를 해야 되고 같이 공감해야 되는지 그런 큰 슬픔을 만난 분들에게 그 제 마음에 대해서 이제 그런 부분들이 가장 어려웠던 거 같고 뭐 일상의 삶은 적응하면은 문의 훈련소 가도 일주일만 자면 다 적응하거든요.

다 잡니다.

그렇처럼 실제 생활에 불편함 이런 거는 불편함 못 살죠.

이미 적극했기 때문에 몇 십년 사는 건데 그런 것보다 사실은 이제 그런 부분이 가장 어려웠고 역설적이게 내가 그렇게 어떻게 할 줄 몰랐고 아 늘 이제 어떻게 내가 위도해야지 하 참 스님을 측히 해야 되나 이런 법민에 시달리면서 그분과 마주하고 했었는데 매우 여석적인 거는 그렇게 큰 아픔을 가졌던 분들이 어느 날 오셔서 그때 선생님께서 그냥 잡아 손잡아 주셨을 때 큰 위로 했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지만 내가 가진 삶의 모습이라는게 그분들에게는 우리 신자분들에게는이 모습 속에서 보여지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의 그분들에게 또 위로가 될 수 있구나.

또 그런 경험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기쁘죠.

아 내가 뭐라고 야 사실 그때 내가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했었는데 어 내가 그렇게 했나? 그렇지만 그분들은 그분께서 너무 큰 유도가 되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줬을 때 역설적이게 같은 장면에서 가장 힘들고 또 반면에 같은 장면에서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고마음을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이 있을까? 이제 그런 느낌을 동시에 받는 부분입니다.

저도 스님이랑 약간 비슷한게 그 누군가의 경사와이 누군가의 조사가 제가 직접적으로 아는 분은 아니잖아요.

관계된 분.

근데 그게 얼마만큼 기뻐해야 되고 얼마만큼 슬퍼해야 되는지가 이게 동기가 되는게 굉장히 어려워요.

그리고 이제 사람마다 지속되는 시간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누군가는 경사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분이 있고 또 조사 누가 오래 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짧은 분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뭐 경사에 대해서 어떤 얘기를 하면 그 끝내는지가 언제돼요.

뭐 예를 들어서 조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뭐 돌아가실가 없네.

산 사람은 살 오히려 그분이 유가족인데 산 사람은 살아야 될 때 나만 슬퍼하고 있었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에 그러니까 스님처럼 이게 얼마만큼 동기화돼서 얼마만큼 축하해 주고 얼마만큼 슬퍼해 주는지에 대해서 이게 그 공감해 주는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좋았던 점은 그 똑같아요.

그니까 스님이하고 똑같은데 좋았던 점은 이제 저는 이제 그런 거를 약간 잊고 있었는데 그니까 경사든 조사든 입고 있었는데 시간이 난 다음에 아 신분이 지난번에 뭐 이렇게 뭐 혼배해 주고 이렇게 해서 뭐 이렇게 뭐 손주났다 그래서 어 그렇구나 그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아니면 이제 뭐 조사 같은 경우에도 아 이제 그때는 너무 슬프고 이랬는데 스모님 이렇게 해 주셔 가지고 이제 잘해서 우리들이 잘 살고 있다.

그래서 어머님이 이게 뭐 잘 지내시는 거 같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이런 거 할 때 그니까 그게 좋았던 점과 슬펐던 점 안타까운 점이 같이 있는 거 같아요.

공존이 있고.

그러니까 꼭 경산이가 무조건 기쁘고 조사이가 무조건 슬프고 이런게 아니라 그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걸 좀 공감해 주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 이제 이게 참 종교인들이 당연할 거 같은데 저도대신 분이 말씀드리니까 그게 지금 그렇지 나만 이상은 아니었구나 이게 저희 살면서 다 신부님도 이제 전문 때 신문님 되셨고 저도 뭘 얼마나 겪고 살았겠습니까 저희가 아니 뭐 얼마나 겪고 살았지만 만나야 되는 장면은 그분들에게 있어서는 일생일 때 엄청난 슬픔과 아픔을 만나야 되기 때문에 저는 이제 종교인의 길 중에이 장면에서 에서 여유로울 수 있을까? 그 저희가 여유로운 척을 하는 거지.

그거는 척을 하는 거야.

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것이지.

가장 어연.

근데 그게 또 어찌 보면 종교의 사명이에서 저희도 제가 신문이 말씀 듣고 나니까 아 그치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구나.

이게 다 같은 절마구나.

동일한 이거 다행이 동변상률 느껴서 다행입니다.

종교인이 되기까지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이게 잘 못 느껴요.

왜냐면 근데 이제 어느 생각이 말씀을 드릴 때마다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초창기죠.

환경적으로 이제 추가하고 산 중에 있을 때 산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저랑 원사 스님이랑 한 두 세 명 딱 달랑 살고 있는데 진짜 새벽에 밤새 눈이 이렇게 엄청나게 내렸을 때 혼자 새벽 3시에 일어나서이 도량석이라고 해서 이렇게 가장 아래 스님이 이렇게 옥을 두고 그 절 마당을 다 이렇게 염부를 한번 돌면서 이제 깨웁니다.

이제 그 순간에 이제 딱 나가 열었는데 눈이 한 1m 정도 쌓인 날이 있었어요.

이제 그럴 때 아무도 없고 정말 혼자 새벽 3시 반에 옥탈을 들고 눈은 이제 계속오고 무릎은 빠지고 이제 막 거기를 이제 눈 무릎에 퍽퍽 빠지면서 이제 도량석을 도는 손도 춥지만은 그때 극한의 외로움을 한번 만납니다.

정말 극한의 외로움 극한의 외로움을 염불하면서 이제 만나는데 이제 그 순간이 글쎄 저는 뭐 전만 느꼈 어느 순간에 극한에 정말 일평을 부모 밑에서 그냥 아파트 자라고 살고 친구들하고 놀고 그 이렇게 살다가 어느 딱 한 순간에 변한 삶에서 그 순간을 맞이할 때 그 극한의 외로움 이제 그 극한 외로움이지만 지만 해야 하니까 하거든요.

근데 그 극한 외로움을 이제 그때 만나고 그 순간을 지나면 또 반대로 자기 자신이 엄청나게 내가 성장했다.

뭔가 내가이 극큰의 의로움에서 살아남았다라고 하는 안도감과이 느낌들이 굉장히 스스로를 좀 이렇게 칭찬해 주고 내가 아 그래도 어 이제 좀 스님이 됐나 역설적 이런 느낌을 오히려 좀 주기도 하죠.

그때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그랬을 때 하고 가끔 제가 이제 서울에 있다가 명절할 때 은사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갈 때 이제 보통은 절대 명절를 안 움직이는데 어쩌다 보니 명절 연유 딱 시작할 때 움직였을 때 11시간 그 제가 서울에서 장수까지 11시간 걸린 적이 있었거든 아 그때는 저만 혼자 운전을 하는데 대부분의 차는 다 가족이 타였습니다.

다 멈춰 있으니까 나는 혼자서 이렇게 보면 막 옆에서 이제 뭐 먹여 주고 막 이제 그런 장면을 볼 때 아 이게 가죽이 없는 외러움 여기서 한번 크게 절실하게 한번 느끼는구나 뭐 요때도 한번 느꼈던 거 같습니다.

저희 이제 신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외로울 결이 없는게 이제 군대랑 똑같거든요.

그니까 군대처럼 조직 생활을 하는 거니까 딱히 외로울 데는 없고 굳이 뭐 외로울 때를 따지자면은 그 이제 서울신학교가 해화동에 있는데 그 서울신학교가 한 3만 평 정도 되거든요.

그 3만 평만 껌꼼해요.

서울시의 한 폭판인데.

그래서 이제 저희가 라스베가스라고 얘기하는데 서울신학에서 바라보는 그 대학로는 완전 부랴이거든요.

새벽까지.

그러니까 뭐 거기는 막 나만 같고 여긴 북한 같은데 그래서 북한 같은 데서 우리는 뭘 하고 있는가? 이게 뭐 그나마 찾자면 외로운 민구고.

그리고 또 이제 힘든 거는 저는 이제 일반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다시 간 거라 1학년 때 28살이었거든요.

근데 저랑 동기인 친구들은 1학년 때 20살이니까 학년은 같은 거고 저도 여기에 처음 온 거잖아요.

근데 마치 28살은 모든 거를 다 알 수 있는 거 같은 그니까 선배들도 그렇고 동기들도 그렇고 그 나도 숙제해야 되고 나도 청소해야 되고 나도 미사하고 기도해야 되는데 마치 저는 이런 거를 다 해 놨어야 되는 아니면 그리고 뭐 한 취학 두 번째 온부 같은 사람인 거 같은 그런 기대감 기대심리 이런게 있으니까 그리고 또 어쨌든 동생들이니까 챙겨 줘야 되고 이러는게 그게 뭐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아 나도 힘들고 나도 어려울 때가 있고 나도 아직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거를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게 조금 그 신학교 다니면서 어려울 때는 그런게 좀 어려웠던 거죠.

예.

신부님, 스님이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부처님께 석가버리 부처님께서 이제 석가머니 결혼하셨죠.

석가미 부처님은 이제 결혼 왕자의 삶에 이제 결혼도 하셨고 자제 자식도 있었는 상태에서 그분은 두 가지를 다 갔던 거야.

이 상태에서의 그 깨달음에 향하는 길을 갈 수가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실험을 이분은 하셨죠.

그러서 이제 결국은 성을 나오셔서 6년에 고행을 하십니다.

저는 생각 마이 그분이 6년 고행에서 답을 아 이렇게 나와서 이렇게 하는게 깨달음을 향하여서 가는 길에서 맞지 않다 했으면 돌아가셨을 거야.

그럼 왜냐면 그 당시는 존재가 있는게 아니니까.

근데 그분께서는 그 6년에 고행을 시간 걸치고 난 뒤에도 승가라고 하는 단체를 만드실 때 이제 결국은 여기서는 우리가 과거에는 결혼했을지라도 여기에서부터는 이제 결혼하지 않는다.

근데 결혼이라는게 이제 그냥 단순히 행위적인 그다음에 어떤 형식적인 이성과의 어떤 삶을 전제한다기보다는 이거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그 욕망을 다스리는 길에 있어서 길과 수행자의 길에 있어서 가족이 함께 했을 때의 그 어려움들이 있다.

굉장히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떤 길을 깨달음의 길과 세상과 함께 해야 하는 길을 권한다면 당연히 독신의 길 속에서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나로 인해서 누군가의 가족이기 그냥 원하지 않지만 그 삶을 따라가야는 삶의 딜레마를 주게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이런 수행과 세상과 더 많은 세상과 함께 하는 길에 왜냐면 더 많은 사람을 같은 마음으로 만나야 되는데 어느 순간 가족과 비교해야 될 수 있고 선택의 순간에도 당연히 가족 족과 나의 승가에게 스님의 길 속에서 선택해야 될 순간이 올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럴 때 최소한의 그런 딜레마를 줄여서 길을 가자라고 당신께서는 이야기를 하신 거죠.

그래서 이게 독신에 대한 수행자 길을 권하셨고 후대의 불교도 많이 변하면서는 이제 또 뭐 한국 사회에도 결혼하신 종파도 있고 예 이제 그래서이다이 부분은 뭐 조개종 같은 경우는 이제 역시 부처님이 이제 초기 당시에 그런 모습과 삶의 길이라는게 수행자 길을 따라가는데 훨씬 도움이 되고 세상과 함께 아파하고 또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에 있어서는 독신의 길이 낫다라고 선택을 한 거죠.

저희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1124년까지는 사태도 결혼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귀신교처럼 교회는 목사님은 그 뭐 계급이라 표현은 그렇지만 계급이 있는게 아니라 목사님은 다 같은 목사님이잖아요.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사제가 있고 주교가 있고 대주교가 있고 취형이고 교황이 있는데 내가 사제가 될 때 나는 승진할 생각이 없다.

하는 사람은 결혼을 해도 되고 나는 승진하고 싶다.

그럼 결혼을 하면 안 됐었어요.

그러니까 사제는 결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1124년까지는 그 1124년까지도 이제 주교 이상의 성자는 결혼한 사람은 안 되고 근데 이제 1924년에 이제 공의회라는 거를 통해서 전 세계 이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한 회의를 공회라고 하는데요.

그 공회를 통해서 앞으로 천교 사제도 결혼을 할 수 없다라고 정해진 거는 이제 오늘날 그 일부 개신교회의 그 폐해가 근데 그 당시의 교회에도 있었던 겁니다.

니까 그 아들 세 문제나 아니면 이제 교회 재산에 대한 이런 문제들이 생기다 보니까 그래서 그 결혼을 못 하게 하니까 이제 어떤 세습 문제나 교회 대사에 대한 문제가 조금 이제 투명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스님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의 성직자이면서도 동시에 한 사람의 가정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게 균형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이제 그렇기 때문에 아예 성직 자로만 살게 만들어 버린게 1124년 이후부터 결정된 거예요.

반대로 혼자 지내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혼자 살면서 좋은 점은 이미 혼자 살아서 잘 못 느끼죠.

왜냐하면 그게 이제 나의 일상이니까.

근데 이제 가장 좋은 점은 제가 결정하면 그냥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도 역설적도 있죠.

그래서 고집들이 세고 어떤 대문에서 또 배려심도 약해질 수 있고 눈치를 안 보니까 눈치를 봐 봐야 뭐 위에 어른 스님 눈치를 보거나 뭐 이제 뭐 신자들 눈치 좀 보는 정도지.

그것도 스님들은 만약에 정말 어느 곳에 있다가도 아 내가이 사찰 있지만 내가 좀 너무 나와 있고 이런게 마음에서 내가 수행이 잘 안 되는 거 같아.

그러면 그다음 날로 그냥 선원이라고 해서 그냥 오로지 이제 참선을 하는 곳이 있거든요.

100일 가까이를 그냥 나오지 않고 그래 들어갈 수 있으니까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마음대로 이제 아 나는 아니야 난 밖에나 포교보다 지금 나는 수행이 필요해요.

기도하는게 더 나 같아.

그냥 그 글로 옮겨 가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내가 마음 먹으면 언제든지 고주 이동의 자유를 뻔 떠나서 모든 것을 내가 다 바꿀 수 있다라고 하는이 자기 주체성, 자기 주관성 때로는 이게 잘 잘못 가면 이제 약간 이기적일 수도 있고 이런 부분들이 이제 어쩌면은 좋다면 좋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

저도 이제 스님이랑 비슷한게 혼자 살아서 좋은 점은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거고 안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거니까 그니까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종교인으로서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끼실 때가 있나요? 이제 이게 결국은 도반들이나 이제 저희는 이제 사형 사제라든지 하나의 이제 군소 집단이 만들기 시작하면은 당연히 생길 수도 있고 또 신자의 관계들 또 있을 수도 있고 왜냐면 저희들도 스님의 모습이지만 결국 일반인을 만나고 모든 장면에선 대하는 것은 저의 삶과 다른 삶의 부분들을 만나면 당연히 생길 수 있죠.

오해도 생길 수 있고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어 그분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고 젊어서 출가해서 성장 과정에서 다 시행 차고했고 아 나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니 굉장히 참 잘못된 행동이었구나.

나는 그때 성장 과정에서 잘못하던 행동이 또 어떤 분에게는 오랜 상처가 남을 수도 있고 관계 자체에는 무조건 희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

희비가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네.

그것을 이제 겪으면서 인간도 성장하고 그래서 참 많은 분들이 신자분들이 저희를 위해서 더 많은 걸 감소해 주고 법문할 때 저희 같은 법문을 했는데 누가 따질 사람이 그렇게 멸치 있지 못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까는 오히려 아까들 인간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왜곡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내가 싫으면 저리 안 오는 거니까 내가 있는데 다 좋아하는데 내가 그러면 정말 문제가 없느냐?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관계를 오히려 더 해 봐야 되는 저는 뭐 신부님이냐 뭐 목사님이나 교모님 이런 분들을 만나면서도 아 이런 면들은 그렇지 신부님이 하는게 맞아.

아 이런면 목사님이 어 저렇게 판단하고 저렇게 대하는 장면들이 내가 좀 배워야 돼.

이런 것들을 저는 이제 오히려 아직도 배우고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당연히 그 관계를 어떤 분들이 이제 어떻게 잘해야 되냐?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상대성이기 때문에 상대가 안 받아들여주면은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모든 거를 감내하는게 인간관계다.

다 희비를 감내하는게 인간관계고 그 희비 속에서 결국은 인간관계에서 인간은 성장해지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기 때문에 저에게도 역시 인간관계는 늘 희비 속에 있고 그걸 통해서 조금 배워가는이 시간이라고 전 봅니다.

그게 저도 스님처럼 관계의 어려움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상황 이제 그거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데 계속 보고 있는게 어려운 거죠.

그니까 예를 들어서 누가 경적으로 어렵다.

그리고 제가 뭐 돈을 많이 벌어서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서 누가 뭐 이렇게 관계를 잘 못 맺거나 아니면 혼자 있어서 왕따는 한번 비스하게 이렇게 해서 뭐 아니면 히터 코머리처럼 이렇게 해서 어렵다고 내가 맨날 그 사람이랑 놀아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또 아니면 또 다른 경우에는 이제 요즘에 이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어떤 얘기랑 해결책을 해 줬는데 그걸 안 하고 있으면 내가 뭐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그 사람 어떻게 해 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이제 그런게 어려운 거죠.

그러니까 스님 말씀하신 대로 관계성이 어려움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은게 저가 싫은 사람은 상당히 안 옵니다.

그데 관계적으로 크게 어려울 일은 이게 일적으로 부딪히거나 이런 건 있어도 인간관계 속에서 제가 만나는 사람 중에서는 관계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기는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근데 이제 그 상황이 사람에 대한 상황을 계속 보고 대면해야 되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주지 못하는 그게 이제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분들을 위한 조언 한 마디 해 주신다면요.

요즘 이제 또 어떤 분들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냐라고 어떤 심리학자분이 굉장히 참 독특한 말을 하신게 자기 다음으로 자기 다음에 사랑을 해야 된다라는 표현을 하신 분이 계세요.

원제은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사랑을 해.

그 천 뭐 유일한 사랑을 하는 건가? 자기 자신이 자기 다음이라고 하는 거 자기를 가장 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의 좋아함이 있고 싫어함이 있고 나 어떤 부분에 뭘서 부족함이 있고 나은게 있고 이런 거를 스스로가 자기 성찰을 잘해야 된다.

그리고 사랑을 할 때 그걸 누군가 나를 채워 줄 사람을 자꾸 찾기 시작하면은 굉히 어렵다.

그니까 같이 성장하는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지.

니까 나만 성장되 그 사람도 성장하고 어떤 부분에서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상대도 알아서 자기 수하는 부분에 대해서 또 봐줄 수 있고 이해 그니까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그 자기 성숙이 필요하다.

그 자기 다음에 사랑을 이기적이 주관적 사랑하고 다르다라고 표현을 많이 하거든요.

주관적 사랑은 내가 오늘 커피가 좋았어.

그럼 커피 사 주는 거야.

그 주관적 사랑이 나거든요.

상대가 커피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이제 아이들이 유화적 사랑기가 이제 내가 좋으면 그걸 주는 거예요.

상대가 좋아할지 아 필요 없죠.

이거 성숙하지 않은 거 자기 다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내가 이걸 채울 것 없고 그고 당대고요 좀 저 부어 줘 이런게 하지 않는다는 거죠.

어저 그걸 들었을 때 요즘 청년들에게는 누군 아무리 좋아해도 그 사람때 본인 스스로 성장하는 자기 몫시야.

그 사람의 의에서 자꾸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을 수 없겠어.

그리고 그 사람도 당신의 의에서만 성장되질 거라는 생각을 좀 벌렸으면 좋겠어.

이 이 이런 부분들을 조금은 권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혼자들 많이 자다 보니까이 주관적 사랑을 많이 가고 또 부모의 사랑을 일방주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가 나한테 이만큼 해 줘야 되지 않냐라는 길의 치가 때로 제가 제가 볼 때는 또 강하게 나오기도 하고 이렇기 때문에 또 상대를 또 강하게 소유하려고 하네요.

내가 어떤 사람인데 자기 애착적 사랑으로 굉장히 상대를 묶으려고 하는 것도 많아서 뭐 이건 제가 저도 이제 공부를 하면서 그 자기다움의 사랑이라는게 좀 필요할 것 같아 말씀도 드리고 그리고 때로는 당연히 사람 만남 헤어지고요.

회 아파야 되고 아픈게 잘못된게 아니라 아프면 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또 많은 내 옆에 소중했던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내 옆에 있음을 더 소중하게 볼 수 있는 이런 눈들도 좀 키우고 이렇게 저 좀 사랑을 하셨으면 좋겠다 말씀 들으십시오.

그리스도교 하면 이제 용서의 이제 가장 큰 어떤 화두로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이제 용서를 잘못 이해하면 이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게 세상의 모든 일이나 사람을 다 이해할 순 없거든요.

그러면 이제 신닝이라는 존재도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데 진짜 용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거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저희 일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누구나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스님이랑 제가 이제 그 여성시대 라디오 하면 양원 선생님 제 그 대표적인 유행하다.

그럴 그럴 수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럴 수 있는 거.

누구나 사본할 수 있고 누구나 다칠 수 있고 누구나 아할 수 있고 뭐 누구나 죽을 수 있고 그거는 내 내가 그런 당했을 때 무슨 인과관계가 있어 그런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겁니다.

그렇게 그냥 이해한다기보다는 수용해야 되는 거거든요.

사람도 수용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고 그러면 죽어도 이해 못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이해 못 하는 분이 저희 아버지거든요.

완전 건강 극단에 있어서.

근데 제가 어릴 때 이제 그 트러블 찾고 있었던 건 이해하려고 그랬던 거 같아요.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왜 저런 말을 할까? 왜 저런 생각을 할까? 계속 이해하려고 하지만 주어도 이해가 안 됐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트러블이 좀 줄어든 거는 이제 물론 나이를 먹고 떨어진 지내는 세연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저는 어느 순간 수용했던 거 같아요.

그냥 원래 저런 사람이다.

내가 이해하거나 뭐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냥 원래 저렇게 된 분이기 때문에 그냥 있는 무대로 저런 사람이 우리 아버지다라는 거를 수용하니까 그다음부터는 그 트러블이 좀 줄어들었던 거 같거든요.

그래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도 물론 마찬가지긴 한데 용서나 사랑이나 뭐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해다 그러면 받아들이는 과정은 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시간이 조금 조금씩 조금조금씩 지나가게 되면은 네의도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며 사우 세계는 정말 있나요? 어, 당연히 이제 왜냐면 인간이 태어나는 탄생의 과정을 물리적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는 거지.

왜 그러면 굳이 인간으로 태어나고 왜이 세수이지 우주에 동물은 있고 식물은 있고 이것 다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부터 이제 종교적으로 해결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어떤 생명이 이루어지는 부분도 어떻게 볼 때는 저는 이렇게이 우주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일 때 그게 종교적 영역 미지의 영역이라고 저는 포거든요.

굳이 왜 이렇게 만들어져? 굳이 왜 나는이 부모에 태어나지? 굳이 부모는 왜 내가 저런 딸을 낳았을까? 뭐 그거는 이제 불교는 불교 나름대로 해석하고 기독교는 기독교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데 그처럼 죽음이라는 것도 그리고 육신은 결국 원소로 다 그냥이 우주의 그냥 어디에나 있는 그냥 원소 지구 땅의 원소로 그냥 싹 흩어져 버리고 그 사람이 한생 80년 70년 뭐 그 1년일지라도 수많은 생각과 또 그 마음이라고 하는 곳에서 있었던 그 부분은 정신은 당연히 정신도 에너지가 만들어져야돼요.

당연히 그게 그냥 허공에 극부러질 것이다라고 보진 않죠.

그래서 분명히 얘기 이제 또 불교는 그 에너지 기운이 또 다른 생명의 그 불교는 죽음을 사후 세계로 보지 않아요.

새로운 삶으로 보지.

죽음 곧 태어나며요.

그래서 불교는 생사가 하나의 문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하나의 문을데 들어오는 사람 입장에서는 들어가는 문이고 입구 나갈 땐 그게 출구라고 이름을 바꾸고 똑같은 문이지만 이로 들어오면 입구 이로 나가면 출구.

그래서 한국에서는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하잖아요.

돌아갔다.

다시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고 그래서 죽음을 어 사후 죽음의 이후의 세계라고 하는가를 불교는 또 다른 그냥 새로 태어나는 세계로 봅니다.

그게 윤회죠.

태어난 세계가 여러 개의 세상으로 나와 있고 그 여러 개의 세상 중에 인간의 세계도 다시 또 있고 그래서 불교는 순환적 그죠.

죽음 곧 태어남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모든 에너지들 원소와 마음의 에너지들이 또 다른 태어남의 원인이 되어서 새로 태어남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불교는 사후라는 표현은 살아 있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이고 다시 누군가 튀어나는 장면이 그분의 사우일 수도 있는 거거든요.

불 윤회가 그런 거야.

아기가 튀어났어.

오, 전 사우에서 세도 현생의 삶으로 왔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사우도 현생으로 보내요.

그래서 윤회로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표현에 제가 말할 때 사후 세계는 있는데 그 사후 세계가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결국은 새로운 삶의 세계로 보는 관점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 드리십시오.

네.

이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한테서도 왔으니까 다시 하느님한테 가는 거다라고 얘기를 하고요.

그러니까이 세상에 나타났고 사라지는 거지.

나타나기 전에 없었고 사라져서 사라져 버렸다라고 이야기하진 않거든요.

그리고 이제 스승님이 아까 돌아가셨다 얘기하는 것처럼 그 장례미사 할 때 그 기도문 중에 이제는 본향으로 돌아가서 이제 영원한 안식을 라는데 그 본양이 본고향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태어난 곳을 이제 고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 신자는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신자의 고향이다.

그래서 이제 그 장림사 기도문에도 이제는 본양으로 돌아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문이 있는게 그래서 그런 거죠.

천국과 지옥은 정말 존재하나요? 천국과 지옥 당연히 예 당연히 있다 보죠.

그거는 현생에도 있어요.

현생에도 우리가 넓다.

나 지옥 같아.

극한의 아픔과 고통 우리가 현생에 누군가 잘못을 했어요.

바로 받진 않잖아요.

이게 이제 물리학적으로도 그래요.

양자 물리학의 세계나 작용이 있으면 바로 반작용이 나와야 되는데 작용을 했는데 반작용이 굉장히 뒤에 나올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물리 현상 속에서.

그래서 이게 시간차가 굉장히 있어요.

엄청난 시간차에 물리학적으로도 눈에 보면 빛이 바로 서로가 본다 생각하지만 태양에서 오는 여기에 도달한 시간이 꽤 걸리거든요.

그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현상은 태양의 최소 뒤에 뭐 아주 몇 시간지야 며칠 뒤의 모습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처럼 우리 현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우리는 삶 우리는 불교에서 그 현생의 삶에서 내가 도둑질을 하면 바로 망해야 되는데 도둑질하고도 죽을 때까지 안 망하고 살 수도 있어요.

그 치는 그 에너지가 불교는 거야.

원인 네가 잘못된 원인을 이생에 끝났다가 사라지지 않아.

네가 한번 그 잘못된 원인을 내서 했어.

다들 좋은 원인으로 그것을 네가 상세하지 않는 이상.

이 잘못된 원인의 에너지는 우리의 본에서 물질이 사라졌다고 하겠지만은 원인에 대한 결과가 반드시 와.

왜? 불교 다음 세이 바로 있는 거니까.

그래.

대신 네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 지옥에 태어나는 거야.

그냥 그게 지옥에 태어나는 거고 그는 이제 과학 결과 받아야 되는 원인과 결과 중에 하나고 일단 불교는게 지옥에 갔다가 지옥에서 벌을 받아 그리고 다시 태어나서 또 받아야 돼.

다시 태어나서 태어나는데 개미로 태어나는데 바로 누가 발로 밟아 바로 죽고 또 개인으로 또 태어나고 이런 식에 또 다른 세계에서도 그 죄와 이것은 반드시 받는다.

그 불교가 왜 지옥과 천국을 이야기하느냐? 세상에 잘못을 저지르면 당연히 결과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결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실수한 데는 참여를 해야 되고 아 내가 이걸 안 해야지 그럼 방법이 뭐예요? 좋은 일 계속 더 많이 해려고 해야 되고 잘못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내가 지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거 늘 조금이 도울 수 있는 수많은 일을 해야 되고 그렇지만 그 인과에 대해 우리가 세상 일이라는게 잘못했는데 결과가 없다.

그 불교는 그걸 믿지 않아.

보든 거사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 원인이 잘못됐기 때문에 참못된 결과 받아야지라고 하는 아주 당연한 논리에서 또 있고 그래서 또 불교회에서는 수많은 많은 어 역대 선각자들께서도 깨달으신 분들께서도 부처님으로 경전에도 당연히 그 부분에 대한 어 인과에 대한 그 모습을 이야기하고 그거를 굳이 표현하면 또 지옥처럼 표현되기도 하고 그렇죠.

현생에서도 바로 다 딜레이 시간차는 있을지라도 반드시 받게 된다라고 하는 논리 속에서 나와 있는 이야기죠.

뭐 그리스도 교회에서도 천국과 지옥은 이제 공간적으로도 있고요.

마음적으로도 있는데 이제 우리가 흔히 현실에서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어떤 보상적인 측면에서 죽음으로 천국에 간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데요.

현실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중요한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이 천국 같은 사람이 그 힘들고 어려운 걸 이겨내고 천국을 가게 되는 거지.

현실도 힘들고 어려운데 마음도 지옥인 사람은 현실보다 훨씬 더 지옥 같은 마음보다 훨씬 더 지옥 같은 진짜 지옥에 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현실의 어떤 어려움과 힘듦에 대한 어떤 그걸 견뎌낸 것에 대한 성과 보상으로 청구해 가는게 아니라 상황과 상관없이 누군가는 현실이 너무나 헤피한데 마음이 지옥인 사람은 마음이 지옥이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되는 거고 현실은 너무 힘들거렸지만 마음이 천국이었던 사람은 죽어서 이제 천국에 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공간적인 개념도 있지만이 마음적인 그 개념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어떤가와 상관없이 이렇게 탓이든 원망이든 미움이든간에 그거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자기 마음을 천국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죽었을 때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종교를 가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나요? 저는 어 이거는 이야기했음을 저는 보고 했을 때 그게 종교인이었을 것보다 당연한 걸 받아들인 거거든.

태어나 무조건 죽어야 됩니다.

이거는 시간차의 문제지.

그래서 생명이 소중한 거거든요.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죽음을 같이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결코 가벼히 여기면 안 된다.

이게 죽음에 따로 있어서 누군가만 꼭 뭐가 재수없는 누군가만 죽음이 오는게 아니다.

수많은 이연 속에서 시간차는 존재할 뿐이지 누구에게 있죠? 어 결국은 죽음은 받아들이냐 안 받아들이냐?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 내가 지금까지 이러온 삶을 다 내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인연 속에서 내가 이것을 지금 어 해 왔지만 결국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루었던 것이고 당연히 나도 이제 그 역할이 이제 어느 정도 다 했을 때는 내가이 삶 속에서는 잠시 사라지고 또 다른 새로운 삶으로 가야 해.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불교는 이제 윤회를 이야기할 때 이런 거죠.

아, 네가 지금이 생이 많은 것을 가지고 싶고 못 가졌다고 하더라도 너무 크게 실망하지는 말라.

지금 다하지 못한 노력 마음이 있더라도 그것을네 스스로가 그래 이건 내가 열심히 했지만 좀 상황이 있는 거 같아.

그렇지만 나는 또 다음 삶에 왔을 때는 더 잘 살아봐야지.

그래서 지금부터 그 마음을 먹고 생각하면 지금 삶에 대해서 결코 함부로 못 하거든요.

왜냐면이 결과이 원인을 내가 잘 싸놔야 다음생 결과가이 원인이기 때문에 내가 오늘 만약에 계속 불만 나 인생 인생 이번생 망했다.

불만만 계속하 다음 생이 무슨 원인으로 갑자기 좋아지겠어? 원인을 불만으로 쌓아 놓으면은 결과가 불만을 오는 거예.

그래서 아 그러지 말자.

부족한게 쓸 수 있어도 내가 빨리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에서 빨리 돌리고 받아들이자.

그래서 어 연세 드신 분 농부들이 어떤 분 어르대신 돌아가실 때 보면은 그래 아이 예 살만큼 살았지 괜찮아 그리고 그 죽음의 그 순간에 그냥 편하게 죽으시다가 받아들인다는 거죠.

아 당연히 이건 나 내 삶이 소중한만큼 죽음도 같이 있었던 거구나.

받아들지 가신 분이 있고 내가 지금 이거 얼마나 야 내가 지금 싸 놓은 재산이 얼만데 실제로 어떤 분께서 제가 아시는 장례 지도사 분께서 뭐 빌딩 몇 개씩 갖고 있는 분이 카스 보니까 온려 죽으셨대요.

당신 손도 안 펴지고 해서 당신을 볼 때 얼마나 놓기 싫으셨으면 저분은 저랬을까? 다 내거다 생각하고 하면은 못 놓죠.

어, 근데 이제 불교는 아니 그게 이제 뭐 지금 인연에 지금 너에게 와 있는 것이지 결국 네가 사라지는데네게 어디니 이게? 결국 그것을 받아들인 분들은 그 죽음의 순간에 편안함을 갖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볼 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다르다.

무서움이 되는 이유가 있다는 거야.

안 뺏기려 하거나 안 가고 싶거나 그런 부분이 그 무서움 안 받아들일 때 생기는 무서움이지.

받아들이면 실제로 제가 지켜본 분들은 그 편안함을 결국은 이제 얻으시면서 가시는 모습을 봤을 때 될 수 있다.

죽음은 마냥 준비된 죽음만큼 그 늘 마음속에서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은 꼭 무서운과 두려운 마음으로 만나지 않을 수 있다.

말씀드리십시죠? 그게 저는 이게 이제 미련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미련을 안 두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근데 이제 종교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은 종교가 있는 사람은 죽는 거의 그날까지 항상 미련을 남기지 않는 삶을 살라는 얘기를 끊임없이 남어 듣습니다.

특히 종은 교회에서.

근데 종교가 없는 분들은 이제 학교 다니고 아니면 뭐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아니면 내 옆에 정말로 인간관계가 좋아서 나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 있을 때는 계속 누군가 옆에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미련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

근데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각자의 고유성과 각자의 개성이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미련을 남는 삶을 살아도 그게 잘못됐다라거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니까 자꾸 이제 미루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이제 죽음이라는 걸 스님 말씀하신 대로 당면해야 되는 건데 신자는 내가 뭐 아주 잘했다거나 아주 미련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 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니까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내 영역이 아니다.

그러니까 맡겨야 된다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조금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고 종교가 없는 분들은 모든 걸 자기가 했기 때문에 죽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 죽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하게 되는게 이제 집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신부님과 스님은 가까운 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슬프죠.

그거는 슬픔의 영역은 제가 그분과의 가졌던 기억의 영역이라 생각해요.

그분과 가진 기억이 많고 추억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분의 떠남을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 기억 속에서 추억에 있어서의 표현을 그 슬픔이라는 걸 합니다.

저희들도 당연히 슬프고 더 좀 더 계셨으면 하는 그 모든 마음을 가지지만 단지 그죠.

원망이나 그걸 또 누구 탓한다거나 그러지는 않는 거야.

슬픔은 저는 슬픔이 넓고 나쁘다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 감사함과 그 수많은 기억과 추옥서에 생했을 때 받았던 고마음과 감사함이 슬픔으로 나오는 거잖아요.

다른 걸로는 표현할 감정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슬픔 속에서도 그 슬픔의 밑바탕에는 이제 감사함고 있고 왜 더 아 좀 더 계셨으면 하는게 싫은 사람 뭐 하러 돌려 있어 알겠어 알고 보면은 아 이제 살라생전에 뭐 자식들이 부모하고 뭐 싸울 때도 있고 해도 결국 부모에 그 제가 작년에 갔을 때 보면은 정말 입관을 하거나 마지막 염을 한 뒤에 얼굴을 덮는 장면에 나왔을 때 안 우는 자식이 없거든요.

예.

그거는 그래 결국은 그 마음 각자 안에서는 때로는 원망도 있고 뭐 바람도 있었을 것이고 하겠지만은 그 밑바다의 총체적 감정은 결국은 결국은 사랑이고 감사함이 있구나.

그게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찍 떠나거나 때로는 다 준비돼 있지만 결국 그러지 더 이상은 교류할 수 없고 이제는 그분이 사라진다라고 하는 거 볼 때 나오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슬프다.

슬프면서도 그 색깔이 슬픔의 색깔이 분명히 감사하고 너무 소중했음을 아는 슬픔이기 때문에 대신 이제 그 슬픔 속에서도 저희는 이제 나하고 있연 여기서 짧지만 이분이 꼭 나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니잖아요.

이분도 이제 더 좋은 자식을 만나고 더 좋은 인연 속에서 만나야 되는 삶이 있는데 그 이제 그때부터는 이제 그분이 그 좋은 길을 가게끔 축복하고 기도하는 거죠.

저 같은 경우에는 슬픔도 슬픔이지만 속상함이 크다.

그니까 그 그때 그러지 말 걸 또는 반대로 그때 그렇게 해드릴 걸 이런 생각이 어쨌든 많이 드니까 왜냐하면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거잖아요.

죽음은 물론 이제 신앙적으로 봤을 때는 뭐 나중에 다시 만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론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공간적으로 분리는 거기 때문에 기회가 없다.

지금 더 이상은 앞으로는 못 있을 수 있지만 그니까 지금 내가 여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저분에게 무언가를 더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

근데 그것 때문에 속성함이 가장 큰 거 같아요.

죽을만큼 힘들어도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은 이게 그니까 제 안타까운 거야.

사는 이유를 말해야 되는 상황이 온게 대단히 안타깝다.

우리는 튀어나서 부모님 속에서 이제 형제를 누군지도 형제인가? 근데 그 형제는 그 시절은 뭐 내가 형제라는 개념이 있든 없든 있으면 좋고 내가 어머니 품에해서 이분이 어머니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내 생명을 그하게 해서 최소 한 1, 2년을 살았고 뱃속에 쉽게 월 있었고 그 엄청난 수고로움과 인연과 확률 속에서 내가 생명을 받았는데 이거를 내가 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되는 자체가 그럼 안 살아야 되는 상황을 우리가 자꾸 뭔가 만들었다는 거잖아.

예.

아니, 삶은 저것도 이유가 있어서 제가 그 온결을 버텨 가지고 피는 거 아니잖아요.

걔한테 너 왜 피냐 그러면 아, 그 뭐 이유가 있어야 돼.

세상이 살아가야 되냐?이 세상은 이유라는 거 자체가 삶인데 삶 자체가 이유를 당연시 안 받아들인 우리가 문제인 거지.

우리가 왜이 삶이라는 건 모두의 삶이 저 들풀처럼 모두의 삶은 태어나면은 그 삶이 고통스럽지 않게끔 잘 영이되게끔 그 삶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살 수 있게끔 우리가 사는 노력 자체가 그거야.

우리 하는 이유가 뭐냐? 사는 이유가 생명 자체를 잘 살게 하려고.

아니 근데 거기에 도대체 무슨 일을 대야 얼마나 더 거창한 이유를 대야 도대체 삶의 이유를 그니까이 삶은 이유가 없다.

세상의 삶의 이유를 갖다 붙이는게 안타까운 거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

우리도이 우주의 저 들풀 같은 건데 세상에 그 들풀 하나에다가 넌 이구 외사냐라고 묻고 따지고 넌 왜 색깔이 놀았니? 이거를 따져가면서 한다는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삶은 삶 자체가지.

왜? 다 소중하니까.

너무나 소중하니까.

그 소중함을 우리 스스로가 가치를 못 느겨서 찾고 다르게 가치 평가하고 어떤 것만도 나한 거고 어디 펴야 되는 거고 몇 얼마 이상 돼야 되는 이런 식의 같이 우리가 만든 거지.

결코 살면은 불교 단원코의 말씀 인간만 받기.

로또를 하루에 열 100번 맞는 것보다 어렵다.

그 희박한 인연 속에서 태어난 삶은 모두가 소중하다.

삶은 특별한 이유가 필요가 없다.

삶 자체가 이유다.

그 소중한 분 이런 분들에게는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이렇게라도 만나고 싶었을까? 세상에 얼마나 나오고 잠시 보고 싶었으면 하루라도 만나고 가고 싶었 우리 그러잖아요.

젊은 시절에 우리 드라마도 보면 제발 하루만 더 보게 해 주세요.

저 사람 한 번만 만나게 해주 우리 하거든요.

너무 간절하고 보고 싶으면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 하거든요.

그래서 이제 한번 만난 거예요.

한 번 만난게 짧을 수 있죠.

예.

그 간절함이었기 때문에.

그래서는 때로는 어린 자식을 읽거나 도일찍간 소중한 인연을 만났을 때 특히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가 얼마나 만나고 싶었으면 이렇게 철이라도 만나고 싶었을까? 그 더 이상 욕심 부리지는 말자.

우리가 지켜주지 못한 아픔이라든지 아쉬움은 산 사람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그 소중한 기억을 내가 대신 한번 번 1초 만났지만은 평생의 가슴으로 갖고 가는 그래도 내 마음에 잃어버리지 않는 인연을 가슴에 두고 가는 거니까 그것도 감사한 것들 보면은 언제 갔는지도 모르고 아이고 제발 좀 안 봤으 이런 마음 들기 전에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기억 저장고를 가졌으니까 그게 생각하고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짧지만 이렇게 만나고 나에는 이제 여기서고 더 이제 더 보고 싶었던 사람을 더 보고 싶은 곳을 향해서 갔다라고 이렇게 받아들이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교 같은 경우에는 누구도 시간을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다.

그리고 누구도 지나간 시간을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다가 가는 시간도 붙잡을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삶은 한 번밖에 없다.

그러니까이 지금의 삶 그리고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을 하고 있어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그 시간에 대한 가치는 다른 사람이 부여해 주는게 아니라 본이 스스로 부여하지 않으면은 계속 호성 생활 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당연히 후회나 미련은 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라고 얘기를 하죠.

신사임당 구독자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예.

우리 신사임당 구독자분들께서 또이 세상은 참 너무 많은 좋은 지식이 있고요.

내가 알고자 하면은 아 나는 지금 이걸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 줄 것 중에 또이 신사임당이 또 여러분들 곁에서는 큰 친구이자 그러는 선생님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거니깐요.

신사인당 많이 또 구독도 하시고요.

여러분들의 마음의 상 그냥 모르는 거를 그냥 품지 마시고 이렇게 알아보려고 또 들어보려고 하는 마음을 부시기를 바라면서요.

신사인당 함께 하신 여러분들 모두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합니다.

네.

그 이제 요즘 시대에는 안 맞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이제 신사임당의 어떤 현모양처의 어떤 대명사 같은 그런 거잖아요.

근데 현모 양처라기보다는 요즘 시대상에 맞게 훌륭한 여성상의 떤 대표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 최고 고권에도 신사 임상이 있잖아요.

그거는 이제 누가 만들어 주는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고 그리고 누구든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떤 모습에 대해서 부러만 하는 것보다는 나한테도 충분히 그럴 만한 자질이 있고 또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있으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시는 그래서 구독자분들도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습니다.

[음악]
영상 정리

영상 정리

1. 인생은 태어나서 죽는 과정이야. 시간 차이일 뿐이야.

2.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해.

3. 매일 살아가는 가치를 가볍게 여기면 안 돼.

4. 사람은 미련을 남기며 살아가게 돼.

5. 각자 고유성과 개성을 존중해야 해.

6. 미련을 남기며 살아도 잘못 아니야.

7. 나는 남양주 성관사 성진 스님이야.

8. 저는 서울대 교구에서 일하는 하성용 신부입니다.

9. SBS 라디오에서 만남이 인연이 됐어요.

10. 스님과 저는 노래와 이야기 활동을 해요.

11.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반에 시작돼요.

12. 공양하고 기도하며 연습과 강연도 해요.

13. 저는 대학원에서 상담과 코칭도 공부하고 있어요.

14. 직장인처럼 출근해서 일하는 신부님도 계세요.

15. 저는 3학년 때 출가했어요.

16. 아버지는 성경을, 저는 불교를 믿었어요.

17. 스승인 의사 스님을 만나 출가 결심했어요.

18. 성당은 혼자 다녔고, 가족은 천주교 아니었어요.

19. IMF 때 종교적 사명감이 생겼어요.

20. 사회 문제 해결에 종교가 역할을 느꼈어요.

21. 출가 후 MG 제자들도 생겼어요.

22. MG들은 말투와 태도가 확실히 달라요.

23. MG들은 명확하게 자기 영역을 말해줘요.

24. 저는 MG 세대의 특징을 배워가고 있어요.

25. 신학생들도 MG 말투를 쓰더라고요.

26. MG들은 ‘외요’, ‘저요’라는 말투를 써요.

27. ‘외요’는 ‘먼저’라는 의미예요.

28. ‘저요’는 ‘내가’라는 의미로 추임새예요.

29. 예전엔 이해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냥 넘어가요.

30. 신부님과 스님이 되면서 기억나는 일은?

31. 일상에서 스님은 신기하게 보여졌어요.

32. 은행, 버스 타는 모습이 이질적이었어요.

33. 22살 때는 다른 사람 같았어요.

34. 병자 성사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일도 있어요.

35. 병자 성사 후 돌아가신 분이 있었어요.

36. 살아나신 분을 봤던 적도 있어요.

37.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과정이 중요해요.

38. 숨 못 내뱉으면 돌아가시거든요.

39. 병자 성사 후 살아난 분도 있었어요.

40. 출가 후 새벽 눈길에 도량석 돌던 기억도 있어요.

41. 극한 외로움도 경험했어요.

42. 산중에서 새벽 3시에 눈 속에서 기도했어요.

43. 그때 성장했고 강해졌어요.

44. 명절에 서울에서 장수까지 운전했던 기억도 있어요.

45. 신학생 시절은 군대 같았어요.

46. 28살에 신학교 들어갔어요.

47. 기대와 달리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어요.

48. 결혼은 왜 안 되냐고요?

49. 부처님도 결혼하셨지만, 수행 위해 독신 선택했어요.

50. 불교는 가족과의 어려움도 고려해요.

51. 천주교는 사제도 결혼 가능했어요.

52. 1124년 이후로 사제는 결혼 못 해요.

53. 혼자 사는 게 자유롭고 좋아요.

54. 결정할 자유가 크죠.

55. 참선과 수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56. 인간관계는 어려움도 있지만 배움도 있어요.

57. 오해와 희비는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58. 사람과의 관계는 성장의 기회예요.

59. 상처받은 분들께는 사랑과 용서를 권해요.

60.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성장하는 게 중요해요.

61. 사랑은 이기적이기보다 성숙해야 해요.

62. 사랑은 자기다움을 지키는 거예요.

63. 용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64. 이해하려 하지 말고 수용하는 게 중요해요.

65. 죽음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66.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게 자연스러워요.

67. 죽음 후엔 새 삶, 윤회로 봐요.

68. 죽음은 또 다른 태어남의 시작이에요.

69. 그리하여 죽음은 태어남과 같아요.

70.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

71. 천국과 지옥은 마음의 상태예요.

72. 힘든 삶도 마음이 천국이면 천국이에요.

73. 죽음 두려움은 받아들이면 사라져요.

74. 미련과 집착이 두려움의 원인이에요.

75. 종교인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76. 미련 없이 살기 위해 노력해요.

77.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요.

78.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해야 해요.

79. 가까운 분의 떠남은 슬프지만 기억으로 남겨요.

80. 슬픔은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에요.

81. 떠난 분을 축복하며 기도해요.

82. 후회와 아쉬움도 있지만, 감사함도 커요.

83. 삶을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소중해서예요.

84. 삶은 이유 없이 태어나요.

85. 삶 자체가 이유이고 소중해요.

86.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요.

87. 인연은 소중하고 짧을 수 있어요.

88. 만남은 간절해서 더 소중해요.

89. 떠난 인연도 기억하며 감사해요.

90.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어요.

91.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해요.

92. 삶의 가치는 내가 부여하는 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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