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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무상에서 ‘무’만 봤을 때
‘없다’가 무슨 뜻입니까?
또 ‘오온이 공하다’에서 ‘공’만 봤을 때
‘비어 있다’가 ‘없다’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화 무상에서 무만 봤을 때 없다가 무슨 뜻입니까? 또 이제 오이 공하다에서 공만 봤을 때 그 비어 있다가 없다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스님.
네.
그 무라는 단어라든지 공이라는 단어는 어 의미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무슨 단하고 같이 연결해서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야 된다.
음.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이 있다 이렇게 주장할 때는 그것에 갖는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이 없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다.
이 말이야.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그냥 살다가 주면 끝이야.
이렇게 주장할 때는 신이 있다.
이런 주장도 또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즉 치우친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가 있다.
음.
그게 어떤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 이런 개념일 때는 단독의 언어로 있다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은이 뭐가 다른 어떤 단어와 결합이 돼 있을 때는 그것은 반드시 그 시대 상황 그것의 의미는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서음 그래서이 어떤 절대화시킨 것을 부정할 때에 에 쓰는 단어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자를 붙일 경우도 있고 아니 빗자를 붙일 수가 있고 아니 불자를 붙일 때가 있다.
불구 부정할 때는 아니 불자를 붙였죠.
어 그다음에에 제상 비상할 때는 어때요? 아니빗자를 붙였잖아요.
그죠? 또 무상할 때는 뭐를 붙였어요? 문자를 붙였죠.
그러니까 이제 한문으로 그렇다고 고정할 수가 없다.
이럴 때로 무자를 붙일 때가 있고 빗자를 붙일 때가 있고 불자를 붙일 때가 있다.
그거는 이제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단어를 해석할 때는 앞뒤 문맥을 봐서 해석해야지 글자 그 자체를 절대화하면 안 된다.
이런 얘기.
그러니까 특히 한문 같은 건 예를 들면 가운데 중자다.
그럼 이거는 가운데라는 뜻만 있는게 아니라 한문에 보면 1번은 가운데다, 2번은 어떻다?가 쭉 내려가면 13번에에 적중이라는 의미의 중자다.
이런 말도 나온다이 말이야.
그럼 우리가 중도할 때는 중자가 가운데란는 뜻이 아니고 적중한다 하는 의미 중자란 말이에.
그러니까 어떤 글자는 하나의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그중에 어느 거냐 하는 거는 앞뒤 문맥을 따라서 봐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언어가 갖는 다중적 의미예요.
근데 이제이 편한 사람은 자꾸 언어를 절대화시키는 거예요.
말이란 건 사람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데 말 자체를 싱시해 버린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제 성경의 말씀 하면 그거를 사람을 위해서 말씀이 있는데 말씀에 사람이 복종을 해야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도 그래.
법은 고칠 수 있는데 김일성 수련님의 말씀은 못 고치는 거예요.
돌아가셔 버렸으니까.
어 그래 이제 주로 종교가 말씀을 절대화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못 고치니까 이제 해석이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겠죠.
그래서 그때그때 해석을 해가 이래 하는데 말씀은 절대적인게 아니다.
그 말한 앞뒤 문명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늘 얘기했지만은 서울로 가면 어디로 갑니까? 물었을 때 인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말을 하고 수원 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라고 말을 한다.
이럴 때 동쪽과 북쪽이 서울 가는 길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거.
그는 그 상황에 따라서 가는 방향이 달라지는 거다.
그러니까 동이 무조건 절대와 하면 강릉 사람에게도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야 정해 버리면 동의 바다에 빠져 죽는다이 말이야.
자, 그런데서 이런 절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나온 언어가 어 동쪽으로 가라 이렇게 절대화를 하면 서울 가는 길은 꼭 동쪽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다음 시대에 그러니까 그거를 절대화할 때 이제 그런 비판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때 무동이라고 하든지 비동이라고 하든지 불동이라고 하든지 이런 말을 쓰게 된다.
음.
그래서 인도 당시에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
신이 그 이름을 브라이라고 한다.
고치면 범이라 그래.
범 불라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신의 한 부분이 떨어져서 그 분신이 사람마다 다 내져 있다 이거야.
신성이 내져 있다.
이걸 뭘 한다? 아트만이라고 한다.
그때 아트만 할 때의 아트만은 그냥 우리가 말한 내다 이게 아니라 나에게 있는 나의 어떤 절대 불변하는 나만의 나라고 하는 어떤 신성을 의미하는 거예요.
음.
그런데 이것은 죽어도 그냥 있다.
그까 이것이 죽어서 소속으로 들어가면 내가 소로 태어나고 개속으로 들어가면 개로 태어나고 코끼리 속으로 들어가면 코끼리 태어나고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로 태어나고요 신성이음 윤회를 한다 이거야.
윤회를 한다.
요거는 불변하다.
변하지도 않고 쪼갤 수도 없고.
음.
요거는 괴로울 수도 없어.
요 존재 자체는 괴로울 수가 없이 요거는 즐거움이고 요거는 더러울 수가 없어.
부정할 수가 없어.
청정하다.
이걸 갖다가 상락 아정이라 그래.
항상하고 즐겁고 나만에 하고는 깨끗하다.
청정하다.
요런 나가 있다.
근데 우리는 요걸 지금 모르고 있는데 요걸 내가 발견하면 요거를 내가 알면 요것이 곧 뭐다? 하나님과 같은 거다.
신과 같은 거다.
이게 우파리사드 철학이에요.
이게 범마 인라 그래요.
범과 내가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다.
이런 이런 철학이 지금도 이제 이런게 많죠.
하나님이 밖에 있다.
아니다.
하나님의 일부가 내 속에 있다.
그러니까 불교는 내가 곧 부처님이다.
이런 말은 있지.
내가 내 속에 부처님의 분신이 있다.
이런 말은 안 하거든요.
그 당시에 인도의 신성이 이렇게 이제 아트말이란 용어하고 이런 의미로 쓰여지는 거예요.
근데 부처님께서는 깊이 관찰해 봤을 때 그런 아트만이라고 할 만한 아라고 할 만한 불변하는 것, 성스러운 것, 즐거운 것 나만의 나라고 할 만한 거는 아무리 살펴봐도 없다.
있는 것 같지만은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거 같지만은 실제는 돌지 않는다.
그것처럼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그 왜 이런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냐? 그거는 나라가는 용어 때문에 그렇다.
그 나라는 용어는 한 가지 의미가 아니고 여러 가지 의미로 그때그때 막 쓰인다는 거예요.
음.
나의 집 할 때는 그 그때 나 우리 집 할 때는 그 나 속에 나하고 우리 가족이 다 들어가는 거예요.
엄마하고 둘 사이 있어.
엄마 나 할 때는 요것만 의미하고 우리 고향, 나의 고향 할 때는 그 속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내가 차를 타면 성객, 나는 성객이다 할 때는 곧 차탄 인연에 따라서 나가 성격이 되고 내가 엄마다 할 때는 딸하고 관계 맺을 때 내가 딸이다 할 때는 엄마와 관계를 맺을 때 학부분이다 할 때는 학교와 관계를 맺을 때 관계를 어떻게 맺냐에 따라서 아까처럼 서울 가는 길이 인천에 살면 동쪽이 되고 수원에서 하면 북쪽이 되듯이 그 인년에 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불릴 뿐이다이 말이야.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어떤 고정 확정된게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불리지.
서울 가는 길이 어떤 고정 확정된 길이 없다.
그것은 인연에 따라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리저리 방향이 나오듯이 그래서이 아트만이 있다는 데서 아트만이라고 하는 그런 고정 불변하는 실체라는 것은 없다.
그러면 뭐냐?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그렇게 작용은 한다.
그래서 이제 그 작용을 아트마리라는 단독자가 아니라 그거를 보면 작용으로 보면 한 다섯 가지 작용이 묶여져 있다.
뭘 보고 어 불사인의 이런 보고 인식하는 작용.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맞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생각하거나 해서 뭘 안다.
정신 작용.
나는 봤다.
나는 들었다.
이런 작용이 있다.
그럴 때 나는 기분 나쁘다.
그럴 때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좋다.
하는 이런 느낌의 작용이 있다.
그다음에 생각의 작용이 있다는 거예요.
어 안 보고도 안 듣고도 우리가 상상하잖아.
그죠? 기억하고 생각하고 하는 작용이 있다.
그다음에이 작용에 보면 먹고 싶다, 가고 싶다.
싫다, 좋다, 해야지, 말아야지 하는 이런 작용도 있다는 거예요.
어떤 행위를 유발시키는 작용이 있다는 거.
음.
그리고 이것들에 아주 바탕이 되는 어떤 사물을 인지하는 시기라는 작용이 있다.
그래서 이걸 뭐한다? 색 수상 행 식 이렇게.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하나가 단독으로 된게 아니라 이런 다섯 가지의 연결된 다섯 가지의 모임에 불과하지 여기 단독자라고 할 만한 거는 없다.
이게 무하다이 말이에요.
무상이란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
태양이 영원한 같지만 지금 내 내 기준에서 볼 때 내 개념에서 볼 땐 저게 그요 짧은 기간 안에는 변하지 않으니까 영원한 거 같지만은 우적 시간에 숨면 저것도 그냥 불꽃 놀이처럼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진다.
그래서이 항상하는 것이 있다 하는 거에 대해서 항상하는 것이 없다.
하는 것이 있다 할 때 아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가 즐거움이라고 할 것이 없다.
즉 그거는 고라 그래.
고 뭐 청령한 것이 성스러움이 있다 할 때 부처님께서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
성스럽이 한 것이 없다 할 때는 무정이라고 안 쓰고 부부정이라고 썼어요.
음.
그러니까 즐겁다고 할 것이 없다.
이거는 그냥 고라고 썼어요.
그래서 우리의 몸에는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
우리의 느낌에는 즐겁다 할 것이 없다.
우리의 느낌은 고다.
우리의 몸은 부정하다.
우리의 느낌은 고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지 않는다.
늘 변한다.
그래서이 무상하다.
법은 진리라고 하는 것이 정해진 아가 없다.
그것은 인연에 따라 변하는 거다.
그래서 모아.
그래서 몸을 관찰하면 부정 느낌을 관찰하면 관수 쉬고 마음을 관찰하면 관심 무상 법을 관찰하면 관법 무화.
이런 말도 있어.
이게 사념 처관이죠.
그러니까 이런 데서 무자, 붙자, 피자 이거는 누군가가 이렇다 할 때 그렇다고 고정할 수가 없다.
아예 그런게 없다가 아니라 그것은 뭐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
틀렸다가 아니라 동쪽이라고 고정할 수가 없다.
이런 의미로 무자, 빗자, 불자가 쓰이고 있다.
됐습니까?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네.
저도 그 이거를 글자 뜻을 질문을 던짐으로써 저 스스로도 해답을 많이 얻었는데 스님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해 주셔서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서 어떤 것을 절대화 해서는 안 된다.
절대화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뭐든지 다 부정한다이 말이야.
어 예를 들면 파란 신호등은 가는 거다.
빨간 거는 못 가는 거다.
이거 원래부터 있었던 거 아니에요.
사람이 편리를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지.
근데 만약 교통상 사람이 지금 병원에 가는게 급하다 그러면 빨간 신호등이라도 무조건 빨간 신호등이도 갈 수 있다가 아니라 피해서 가야 된다 이거야.
응.
근데 파란 신호등이라도 딴 차가 막 다니면 멈추고 있어야 된다.
사고 나니까.
그러니까 절대화 하지 마라 이런 뜻이지.
그러면과 뭐 파란 신호등도 뭐 가지 마라는 법도 없고 빨간 신도등에 못 가란 법도 가라는 법도 없고 못 가란 법도 없으니까 막 다니자 이런 얘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