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은퇴 남성의 베트남 현지처와 재혼, 2년 만에 밝힌 충격 진실!
68세 김성태 할아버지의 베트남에서의 아픈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68세 된 김성태라고 해요. 어쩌다 보니 제 인생에서 가장 이상하고 아픈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게 되었네요. 2년 전 베트남으로 떠났다가 지금은 서울 작은 월룸에 혼자 앉아 있어요. 창밖 회색 하늘이 제 마음 같아요. 사람들은 저를 한심하게 볼지도 모르지만, 제가 겪은 일을 알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요.
베트남에서 돌아온 지 3개월이 지났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부끄러움, 후회,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목구멍을 막고 있었거든요. 오늘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해요.
왜 베트남으로 떠났을까?
2021년 가을, 35년간 일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한 지 3년째였어요. 퇴직금으로 받은 돈은 이미 절반이나 자식들에게 줬어요. 큰아들 사업 자금으로 8천만 원, 딸 결혼 자금으로 5천만 원. 그러고 나니 남은 돈은 1억 2천만 원뿐이었죠.
서울 외곽 작은 빌라에서 혼자 살고 있었어요. 아내는 5년 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각자 바빠 명절에나 겨우 얼굴을 봤죠. 국민연금으로 월 117만 원이 나왔지만 생활하기엔 부족했고, 노인 일자리 사업에 지원해도 계속 떨어졌어요.
큰아들이 "아버지, 뭐 하러 그런 데 지원하세요? 그냥 집에서 쉬면서 취미 생활이나 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어요. 돈 없는 노인에게 무슨 취미 생활이 있겠어요? 매일 아침 공원 산책, 점심엔 경로당 무료 급식, 저녁엔 혼자 TV 보는 게 전부였죠.
그러던 어느 날, 경로당에서 만난 박씨 아저씨가 말을 걸었어요. "김 선생, 혼자 사니 얼마나 적적한가? 나도 그랬는데, 작년에 베트남 가서 재혼했지. 지금은 정말 행복해."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박씨 아저씨가 보여준 사진 속 40대로 보이는 젊은 베트남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놀랐어요.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죠.
박씨 아저씨는 "생활비도 한국의 1/10이면 충분해. 베트남 여자들은 정이 많고 순수하지. 나이 차이? 그게 뭐 대수야? 그쪽에서는 능력 있는 한국 남자를 선호한다고."라고 말했어요. 그 말에 제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그날 밤 잠도 못 이루고 베트남에 대해 검색했죠. 국제결혼 중개 업체 광고가 쏟아져 나왔어요. "베트남 처녀와의 행복한 노후", "제2의 인생을 베트남에서 젊은 아내와 함께 새로운 시작."
한 달 후, 저는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요.
베트남에서의 만남, 그리고 린
호치민 공항에 도착하자 후덕지근한 공기가 저를 감쌌어요.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개 업체 직원은 30대 중반의 한국인 남성이었어요. "김성태 선생님이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모든 걸 도와드릴 겁니다."
그는 저를 호텔로 데려갔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맞선이 시작되었어요. 카페, 식당에서 하루에 서너 명의 베트남 여성들을 만났죠.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었어요. 통역사를 통해 대화했지만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컸어요. 그들은 저에게 관심 있는 듯했지만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죠.
일주일째 되던 날, 저는 린을 만났어요. 32살의 그녀는 다른 여성들과 달랐어요.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눈빛에 깊이가 있었죠. 무엇보다 그녀는 약간의 한국어를 할 줄 알았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린입니다. 한국 좋아해요." 서툰 한국어였지만 진심이 느껴졌어요.
린은 호치민 외곽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봉제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월급은 한국 돈으로 30만 원 정도. 한국으로 시집가는 게 꿈이라고 했죠.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매일 만났어요. 통역사 없이도 대화가 가능했죠. 린은 제게 베트남 음식을 소개해 주고, 저는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녀의 순수한 웃음에 제 마음은 점점 열렸어요.
"아저씨, 나이 많아도 괜찮아요. 한국 가서 열심히 살고 싶어요. 아저씨 돌봐 드릴게요." 그 말에 저는 결심했어요. 중개 업체에 결혼 의사를 밝히고 필요한 서류 준비를 시작했죠.
린과의 결혼, 그리고 균열
린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날, 저는 긴장으로 손에 땀이 났어요.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어요. 린의 집은 양철지붕을 얹은 작은 집이었죠. 부모님은 50대로 보였는데, 저보다 훨씬 젊어 보였어요. 그들은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어요.
통역사를 통해 대화를 나눴고, 저는 한국에서의 제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했어요. 큰 재산은 없지만 연금이 있고, 린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죠.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어요.
베트남식 결혼식은 간소했어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하해 주었고, 린은 베트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있었어요. 정말 아름다웠죠. 저는 그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았어요.
결혼식 후, 우리는 호치민의 작은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렸어요. 월세는 한국 돈으로 40만 원 정도. 한국에 비하면 정말 저렴했죠. 린은 더 이상 공장에 다니지 않고 집안일을 했어요.
처음 몇 달은 행복했어요. 린은 정성스럽게 밥을 해 주었고, 저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어요. 함께 시장에 가고 공원을 산책하고, 때로는 베트남 곳곳을 여행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어요.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했지만, 깊이 있는 소통은 어려웠어요. 제가 아프거나 우울할 때 린에게 제 마음을 전하기가 힘들었죠.
린도 변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알뜰하게 살림했지만, 점점 돈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졌어요. 친정 부모님이 아프다며 병원비를 보태 달라고 하고, 남동생이 사업을 한다며 투자금을 요구했죠. "아저씨, 우리 가족도 이제 아저씨 가족이에요. 도와주세요." 저는 거절하기 힘들었어요. 한 달에 100만 원이던 생활비가 200만 원, 300만 원으로 늘어났어요. 제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죠.
더 큰 문제는 린의 행동이었어요. 그녀는 점점 늦게 귀가했고, 핸드폰을 항상 들고 다니며 누군가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어요. 제가 물어보면 친구라고만 했죠.
어느 날 린이 외출한 사이, 우연히 그녀의 핸드폰을 보게 되었어요. 베트남어로 된 메시지들이었지만,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젊은 베트남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어요. 다정하게 어깨를 기댄 모습, 손을 잡고 있는 모습.
그날 밤, 린에게 물었어요. "이 남자 누구야?" 린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사촌 오빠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요.
그 후로 우리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어요. 대화는 줄어들었고, 린은 더욱 자주 외출했어요.
결정적인 사건, 그리고 진실
결정적인 사건은 결혼 1년 6개월째 일어났어요. 린이 임신했다고 말했어요. 저는 기뻤어요. 나이는 많지만 다시 아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함께한 날들을 계산해 보니 맞지 않았어요.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린은 거부했어요. "베트남 병원 싫어요. 나중에 가요." 결국 저 혼자 의사를 만나러 갔어요. 제 나이와 건강 상태를 설명하고 검사를 받았죠. 일주일 후 나온 결과는 충격적이었어요. 제가 아이를 가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이었죠.
집으로 돌아와 린과 마주했어요. "진실을 말해 줘. 이 아이 누구 아이야?" 린은 처음엔 부인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어요. "미안해요. 첫사랑이었어요. 아저씨랑 결혼하기 전부터 만났어요. 하지만 그는 가난해요. 결혼할 수 없었어요."
청천벽력이었어요. 린은 처음부터 저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한국으로 가는 티켓, 혹은 가족을 부양할 돈줄로 생각했던 거죠.
저는 모든 걸 정리하기로 했어요.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죠. 린은 막지 않았어요. 오히려 위자료를 요구했죠. "아저씨, 2년 동안 함께 살았어요. 그냥 갈 거예요. 아기도 있는데." 결국 저는 남은 돈 대부분을 린에게 주고 베트남을 떠났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제 통장엔 300만 원도 남지 않았어요. 자식들에게 연락했지만,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아버지, 정말 실망이에요. 그 나이에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딸의 차가운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졌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변명처럼 들릴 게 뻔했으니까요.
지금 저는 보증금 500만 원, 월세 35만 원짜리 월룸에서 살고 있어요. 국민연금 117만 원으로 겨우 생활하고 있죠.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나이 때문에 쉽지 않아요.
가끔 베트남에서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져요. 린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순간들, 그녀의 배신, 모든 게 한편의 드라마 같아요. 하지만 가장 아픈 건 따로 있어요. 어쩌면 저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에요. 젊은 여자가 늙은 저를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다는 것을. 그저 외로움에 눈을 감았던 건 아닐까요?
어제 우연히 린의 SNS를 봤어요.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젊은 남자와 함께 웃고 있었어요. 아마 그가 진짜 아빠겠죠. 이상하게도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들었어요.
이제 저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어요. 동네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고, 공원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친구가 되었어요. 돈은 없지만 마음은 조금씩 평안해지고 있어요.
누군가는 제게 바보 같다고 할 거예요. 뻔한 함정에 빠진 늙은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 시간들을 완전히 후회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잠시나마 다시 사랑받는 기분을 느껴봤으니까요. 인생의 황혼기에 치른 값싼 수업료였다고 생각해요. 진짜 사랑은 나이나 돈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요. 이제라도 그걸 깨달은 게 다행인지도 몰라요.
혹시 저처럼 외로움에 지쳐 해외로 눈을 돌리는 분들이 계신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진실한 사랑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없으니까요.
지금 저는 작은 월룸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어요. 바깥엔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베트남의 스콜과는 다른, 조용하고 차분한 한국의 봄비예요. 때로는 린이 끓여주던 쌀국수가 그립고, 함께 산책하던 호치민의 공원이 떠오르기도 해요.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게 추억일 뿐이에요.
앞으로 남은 인생, 허황된 꿈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면서요. 이것이 제가 2년 만에 돌아와 털어놓는 진실입니다. 부끄럽고 초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