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고백! 친일파 이완용의 숨겨진 변명 전격 공개
이완용의 이야기: 중학생 눈높이로 정리
안녕! 나는 이완용이야.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지. 역사의 주인이고 민족의 원수라고도 하고.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은 날부터 나는 죄인으로 살아야 했어.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내 삶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많은 생각들이 있었지. 사람들은 내 이름만 알지만, 내 삶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 줘.
어린 시절과 과거 급제
나는 1858년, 경기도의 허름한 집에서 태어났어.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고, 부모님은 가난했지. 그래도 노비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당시 백성 둘 중 하나는 노비였거든. 양반이었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문에 눈을 떴지. 사람들은 나를 '신동'이라고 불렀어.
아홉 살 때, 가난한 친부모님은 나를 양자로 보내셨어. 동네에서 유명한 신동이었기에 입양은 어렵지 않았지. 먼 친척인 중추부 판서 이병권 대감 댁에서 나를 거두어 주셨어. 당대의 명문가였지. 양아버지는 서자나 딸밖에 없어서, 신동이었던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셨어. 덕분에 나는 학문을 갈고 닦으며 과거를 준비할 수 있었지.
1882년, 스물다섯 살에 나는 과거에 급제했어.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바로 정 7품이 될 수 있었지. 양아버지는 명성황후 민씨 정권의 최측근이라 큰 권력을 누리고 있었어.
민씨 정권과 혼란의 시대
하지만 몇 년 뒤, 민씨 정권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했어. 일본의 도움으로 나라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 하지만 민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친일 개혁 세력을 모두 쓸어버렸어. 이 사건으로 민비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지. 양아버지와 나는 덕분에 권력의 중심에 있을 수 있었어.
민비는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잔혹해졌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어. 온갖 사치와 잔치를 벌여 국고를 텅텅 비게 만들었지. 나랏돈이 부족해지자 매관매직을 일삼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어.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관리들은 무능해졌으며, 물가가 급등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지. 민비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는 데 돈을 썼어. 젊었던 나는 이런 일들을 바로잡을 용기가 없었어. 그저 민씨 정권의 측근에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지.
나는 오로지 출세만을 생각하며 공부에 집중했어. 유경공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승진을 거듭했고, 마침내 정 3품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 과거 급제 후 정 3품까지 불과 5년도 걸리지 않았으니, 조선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어.
미국에서의 경험과 근대화의 꿈
1887년, 나는 처음으로 조선 땅을 벗어나 해외로 나가게 되었어. 미국 공사관 설치를 돕는 일을 맡았지. 하와이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본 근대 국가 미국은 정말 아름다웠어. 백성들은 근대 문물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 그들에게 삶의 목적은 생존이 아니라 행복이었어. 국가는 백성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고, 모든 것이 법과 제도의 원칙대로 돌아가고 있었지. 정말 다른 세상 같았어.
나는 1890년까지 워싱턴에 머물며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어.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지. 나는 조선이 반드시 근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게 되었어. 여러 요직을 맡으며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임했을 때는 초등 교육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화 교사 양성 사업을 주도했어. 백성들의 세계관을 넓히기 위해 서양 학문도 가르쳤지.
격변의 시대와 나의 선택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했어. 썩어빠진 나라꼴에 분노한 백성들이 동학 지도자를 중심으로 봉기했지. 이 봉기에는 민씨 정권을 몰아내려는 흥선대원군도 관련되어 있었어. 이 일로 민씨 정권은 위기에 빠졌고,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지. 이에 청과 대립하던 일본도 군대를 보냈어.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고, 흥선대원군 세력과 친일 개혁 세력을 중심으로 친일 내각이 들어섰지.
이 시기, 나 역시 격변의 시기를 겪었어.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친미를 주장하며 개혁을 추진했던 나를 높이 평가해 외무 협판으로 임명해주었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왕과 왕비에게 충성하고 있었어. 친일 개혁파가 정권을 잡고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해갔지만,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조정이었지만 그래도 조선의 왕과 왕비였으니까. 무엇보다 친청 수구파인 민씨 세력을 몰아낸다는 것은 양아버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었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은 힘을 잃었어. 하지만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열강들의 간섭으로 일본의 조선 영향력은 줄어들었지. 이 과정에서 친미, 친러를 주장했던 정동파가 힘을 얻었어. 우리는 일본에 적대적이었고 왕실, 민씨와 가까운 사이였지. 민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러시아 공사에게 접근했어. 청나라가 힘을 잃었으니 러시아를 통해 친일 개혁파를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지.
결국 민씨 정권의 힘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정동파를 중심으로 친일 개혁파를 몰아내기 시작했어. 그리고 결국 일본이 직접 움직였지. 1895년,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어. 명성황후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왕비였어. 이 사건으로 고종은 공포에 빠졌고, 국내에 머무는 것을 불안해했지.
나와 대신들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했어. 아관파천 시기 동안 조선의 정치는 사실상 러시아의 손에 넘어갔지.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러시아 세력에 사로잡힌 꼴이었어. 고종은 더 이상 반항할 생각도 없는 듯했지. 일본, 러시아, 아니 그 누구에게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던 조선은 영원히 속국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어.
이 시기 나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열강들 사이에서 조선이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백성들을 계몽하고 근대적인 개혁을 추구했어. 나는 독립협회의 초대 위원장과 2대 위원장을 맡았지. 한편 나는 조정에서 러시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 접촉하려 했어. 아관파천 때 미국 공사가 나를 도와 임금을 피신시킨 적이 있었기에, 미국에 다시 협조를 구해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지.
하지만 이를 눈치챈 러시아가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고, 친미파인 나를 축출하라고 요구했어. 결국 임금은 나를 버렸지. 1897년, 나는 평양 관찰사로 좌천되어 중앙 정계를 떠나게 되었어. 이후 직무 태만, 공금 횡령 혐의까지 뒤집어쓰며 파직을 간신히 면했지. 얼마 후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어.
이 시기 나는 망나니 같은 삶을 살았어. 충성했던 임금에게 버림받았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는지, 내 신세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내 안의 악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나마 지고 있던 한 줌의 권력을 휘두르며 방탕한 생활을 했지. 1901년, 양아버지 이병권 대감이 돌아가시면서 내 삶은 더욱 힘들어졌어. 양아버지는 양자인 나에게 정치적 지위와 집안 제사를 물려주려 했지만, 서자인 친아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모두 물려주었지. 나는 빈손으로 식구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저택을 떠나야 했어.
러일 전쟁과 나의 결단
1904년,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정치계로 복귀할 때쯤 러일 전쟁이 발발했어. 한반도와 만주를 두고 두 나라가 싸우는 전쟁이었지. 떠나고 7년이 지났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열강들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어. 그때 나는 깨달았지. 조선의 독립은 그저 망상이었다는 것을. 무능한 지도자, 나약한 국가, 뒤떨어진 수준으로는 막강한 열강들 사이에서 스스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국권 침탈과 간섭이 시작되었어. 고종은 다시 한번 다른 나라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 그것이 나를 다시 이용한 이유였어. 고종은 나라를 담보로 도망 다닐 궁리만 하고 있었지.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상태였고,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체결한 상태였어. 미국은 조선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결단했어. 친일파가 되기로. 어차피 한반도가 어느 나라에 복속되어야 한다면, 결국 일본밖에 없었어.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렀고,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한 상황이었지.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는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을사조약 체결과 나의 역할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요구했을 때, 나는 고종 황제에게 이런 생각을 전했어.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찾아 며칠에 걸쳐 끈질기게 조약 체결을 요청했지만, 고종은 계속 거절하다 결국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했지. 이토는 이를 근거로 대신들을 불러 회유와 협박을 섞어가며 조약 체결을 강요했어.
일본이 대한제국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 분명했고,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 역시 일본의 모든 요구를 다 받아줄 생각은 없었어. 일본이 요구한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져가고 통감을 두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지. 외교권은 어차피 대한제국이 열강들의 눈치를 보며 나라를 옮겨 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라면, 일본에게 외교를 맡기고 항구적으로 보호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일본의 내정 간섭을 얼마나 막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지. 나는 일본의 내정 간섭 불가 조항을 명문화하고 싶었어.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제3조의 통감 권한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따졌지. 외교 문제만 국한시키고 내정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써 줄 것을 요구했어. 하지만 이토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둔다는 문구를 살리는 것으로 타협했어. 다른 대신들은 일본이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는 내용을 직접 개입해서 추가했지.
이렇게 조약문이 정리되고, 나를 비롯한 대신들 다수가 조약 체결에 찬성했어. 고종 황제는 이 수정안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조약 체결을 재가했지. 그렇게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어.
이후 나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대한제국 내각의 최고 직책에 오르게 되었어. 당시 한반도 근대화 작업을 위해 농상공부 대신 등 여러 자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호의 덕분에 이런 작업들도 무탈하게 추진할 수 있었지. 을사조약으로 세계 무대에서의 발언권을 잃었지만, 대한제국은 다른 열강들로부터 보호받게 되었고 백성들의 삶은 현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어.
헤이그 특사 사건과 고종 퇴위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어. 1907년, 고종 황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냈어. 이들은 한국의 위원으로서 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협박으로 강제로 조약이 체결되었다며 이를 파기해달라는 요구를 할 예정이었지. 하지만 이 사실이 일본에 알려졌고, 고종은 감금되었어.
한편 만국 평화 회의에서도 한국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고종이 보낸 특사단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했어. 애초에 힘없는 나라가 아무런 계획 없이 다른 열강들의 호위에 기대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지. 나는 이 헤이그 특사 사건에 분노했어. 과거 아관파천 시절 일본을 피해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했다가 러시아에 당했고, 그 결과 나는 희생양이 되었었지. 이제는 일본에 붙어서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외교권까지 내어주고는 다시 러시아와 다른 열강들에게 손을 뻗는 것이었어. 얼마나 한심한 임금이었는지.
내가 버림받고 얼마 후, 고종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간부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어.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서 백성의 뜻을 받들어 각종 개혁안을 결의했고, 황제가 이를 직접 재가했었는데 그 직후에 황제는 나를 배신했지. 윤치호 회장은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 "이 사람이 구강이란이.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어떤 배신자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종은 늘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 말과 행동을 뒤집었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기를 원했고, 나는 이를 기꺼이 수행했어. 고종을 찾아가 아들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지.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어. 황제에 대한 실망, 무능에 대한 분노,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내 이성을 마비시켰지. 그리고 이 순간, 나는 더 이상 애국자가 아니게 되었어. 왕실과 나라에 충성했고, 민족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 세계 앞에 당당하게 독립해 있는 근대 조선을 꿈꿨던 사람. 그런 이완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 나는 충성하는 왕도, 나라도, 백성도 없는 사람이 되었어.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지.
고종은 그렇게 퇴위되었어. 무능했던 임금, 하지만 내가 충성했던 임금, 나를 버렸던 임금. 그래서 내가 버린 임금. 임금을 버리자 다른 것들은 더욱 쉽게 버렸어. 나는 일본에 내정권을 넘겨준 정미칠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어. 일본은 크게 고마워하며 내게 10만원을 건넸지. 내 삶은 유복해지기 시작했어. 무거운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자, 가슴에 품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 내려놓게 되었지. 사람이 변하는 데에는 무서운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알았어.
한일 병합과 나의 마지막
그렇게 1910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한반도가 대일본제국 안에 들어가도록 노력했어. 을사조약, 정미칠조약, 기유각서 등을 통해 하나하나 대한제국의 권리를 넘겼지. 그리고 마침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일본에 넘겨주었어.
일본은 내게 15만원의 은사금을 주었어. 조선인 이완용으로서의 삶을 버린 대가였지. 일본은 한반도를 같은 나라로서 보호하고, 그들의 근대 문물을 전수해 우리 백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어. 같은 한국 시민으로서 말이야. 하지만 나는 병합 조약 시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치고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못 박았어. 그러자 일본은 한국 황실을 일본 황족에 준해서 예우하겠다고 약속했지. 고종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변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모셨던 핏줄이 여전히 왕의 빛으로 남기를 바랐어. 그렇지 않으면 임금에게 충정했던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질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식으로 대한과 일본의 합병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 같아. 대한의 왕이 일본의 왕처럼 대접받으니, 대한의 백성들도 일본의 백성들처럼 대접받게 될 거라고 말이야. 나는 한일 합병만이 우리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 진심으로 말이야. 무능한 왕 아래 약한 나라가 열강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이것뿐이었어. 숭고한 명분을 떠들며 괴로운 전쟁터보다, 굴종을 통해 얻은 비겁한 평화가 낫지 않겠어?
분명 나는 일제에 조선을 넘기며 부와 권력을 얻었어. 하지만 백성들도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근대 문물을 누리게 되었어. 그렇게 나는 내 나름의 애국을 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분명 매국노라고 말하겠지.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어. 우리가 일본인으로서 살아간다면 나는 애국자가 될 것이고,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살아간다면 나는 매국노가 될 것이겠지. 어느 쪽이든 참으로 많고 한 많은 삶이었어.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