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2부: 교회가 죽어서도 두려워한 철학자의 '내려놓음' 비밀
에크하르트의 '비움' 이야기: 내려놓음으로 신을 만나다
지난 영상에서 우리는 인간이 신을 찾을 때도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걸 알게 됐어. 신의 이름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고, 두려움을 달래고,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섬긴다는 거지. 에크하르트는 이걸 정직하게 마주하라고 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진단만 있고 해결책이 없으면 너무 잔인하잖아. 에크하르트도 그걸 알았기에,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평생 '비움'의 길을 가르쳤어.
'갤라세나이트': 내려놓음, 놓아버림, 자기 비움
이 '비움'을 에크하르트는 '갤라세나이트'라고 불렀어. 이걸 한국어로 딱 떨어지게 번역하기는 어려운데, '내려놓음', '놓아버림', '자기 비움' 등으로 말할 수 있어. 영어로는 '릴리스먼트(release-ment)', 즉 '풀어줌'이라고도 해.
이 단어 자체가 '갤라세나이트'가 딱 정해진 행동 지침이나 기술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 오히려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나서 생기는 어떤 '상태', '열림'에 가깝지.
독일어 동사 '라센'에는 '떠나보낸다, 버린다'는 뜻과 '넘겨준다, 맡긴다'는 뜻이 동시에 담겨 있어. 에크하르트의 '갤라세나이트'는 이 두 가지 움직임을 모두 포함해.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그 빈자리를 더 큰 무언가에 맡기는 것. 즉, 버리면서 동시에 여는 거지.
중요한 오해 하나! '갤라세나이트'는 포기가 아니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세상을 등지고 동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야. 감정을 죽이고 무감각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체념이나 무관심, 허무주의와는 전혀 달라.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건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개방이야. 다친 손을 여는 거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잖아. 손을 열어야 비로소 무언가가 놓일 수 있어. '갤라세나이트'는 바로 그 손을 여는 행위인 거야.
현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도 이 개념을 다시 꺼내 들었어. 그는 '갤라세나이트'를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로부터의 자유'라고 설명했지. 무언가를 꼭 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자유야. 모든 걸 통제하고 계산하려는 충동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 그게 바로 '갤라세나이트'라는 거지.
비움의 두 축: 내려놓음과 분리
에크하르트는 이 비움의 길에 두 가지 중요한 축을 세웠어.
- 갤라세나이트 (내려놓음/놓아버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빈자리를 여는 거야.
- 아프게샤이데나이트 (분리/탈착): 이건 단순히 거리두기가 아니야. 에크하르트는 '순수한 분리만이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말했어. 사랑, 겸손, 자비보다 분리가 더 낫다고? 충격적이지?
에크하르트의 논리는 이래.
* 사랑: 나를 신에게로 이끌지만, 분리는 신이 내게로 오도록 해. 어느 쪽이 더 완전한 만남일까? 내가 달려가는 것보다 신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게 더 근본적이라는 거지.
* 겸손: 나를 모든 피조물 아래로 낮추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피조물'에 대한 의식이 있어. '내가 저것보다 낫다'는 비교가 숨어있지. 하지만 분리는 위도 아래도 없어. 모든 비교를 넘어 스스로 서는 거야. 다른 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근원 안에 머무는 거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에크하르트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어.
- 외부의 것들: 돈, 지위, 남들의 평가 같은 것들. 이건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말하는 거라 익숙할 거야.
- 내부의 것들: 내 감정, 의지, 욕망, 두려움. 이건 좀 어려워. 감정이랑 우리는 너무 밀착되어 있거든.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이것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해. 감정을 없애라는 게 아니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야. 마치 납덩어리 산이 바람에도 꿈쩍 안 하는 것처럼, 감정은 오고 가지만 영혼의 가장 깊은 자리는 흔들리지 않는 거지.
- 신에 대한 이미지와 영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 이게 에크하르트만의 독특하고 급진적인 부분이야. 우리가 기도할 때 떠올리는 신의 이미지, 종교적인 감동, 영적인 체험들조차 집착의 대상이 되면 신성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거지. 신은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는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며 멀리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야.
비움의 끝, '아무것도 없음' 그리고 '이유 없는 삶'
이 세 가지 내려놓음이 향하는 곳은 바로 '아무것도 없음', 즉 순수한 텅빔이야. 근데 이건 허무가 아니야. 신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지.
분리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텅 비어 있어서, 오직 신만이 머물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정교해. 그래서 분리는 신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아. 비움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비워진 자리에 신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거야. 마치 진공 속으로 공기가 채워지듯 말이지.
이게 '갤라세나이트'의 역설이야.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무언가를 내려놓는 것도 결국 내가 하는 게 아니지. 잡으려던 손을 펴는 순간, 이미 그 손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야. 새로운 것이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이 보이게 되는 거지.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비움의 최종 목적지는 '이유 없이 사는 것'이야. 이게 에크하르트의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개념 중 하나야.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이유 때문에 행동하잖아. '이걸 하면 저걸 얻을 수 있으니까', '이걸 해야 저걸 피할 수 있으니까'. 에크하르트는 이걸 '영적 상인의 태도'라고 부르며 비판했어. 신 앞에서도 거래를 하는 거지.
하지만 진정한 비움에서 나온 행동은 달라. 기도를 드리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선을 행하되 보상을 기대하지 않아. 사랑하되 보상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 그냥 지금, 그것 자체로 이유 없이 하는 거야.
독일의 신비시인 안젤루스 실레시우스는 이걸 이렇게 요약했어.
"장미는 이유가 없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누군가 자신을 보는지 묻지 않는다.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는 피어야 할 이유도, 보여주려는 의도도 없어. 그냥 자기 본성대로 피어나는 거지.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비움이 완성되면, 우리 삶도 이렇게 되는 거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가는 거지.
비움은 끝이 아니라 돌파의 준비
이 모든 것은 결국 에크하르트에게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져. 비움은 끝이 아니라, 돌파를 위한 준비라는 거야.
'두루브루'는 '뚫고 나옴'이라는 뜻인데,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모든 개념, 이미지, 자기 자신까지 내려놓았을 때, 영원히 그 근원, 즉 신성의 가장 깊은 자리로 되돌아가는 사건이라고 묘사했어. 거기서 신과 영혼은 더 이상 만나는 게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하나로 인식되는 거지.
그런데 중요한 건, 이 '두루브루'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오히려 반대야. 비움을 통해 신성의 근원에 닿은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와. 그리고 그 세상에서 더 완전하게 일하고, 더 완전하게 사랑하지. 이걸 '흘러나옴'이라고 해. 신성에서 받은 것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거지.
에크하르트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독특하게 해석했어.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모두 칭찬했지만, 에크하르트는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를 더 높이 평가했어. 마리아는 아직 영적 감동에 머물러 있지만, 마르다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 일상 안에서 신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거지. 비움이 완성된 사람은 달아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다르게 존재하게 되는 거야.
지금, 여기, 이 자리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비움의 길은 삶을 축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을 열어젖히는 것이야.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는 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손을 떼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고, 그 열린 손으로 세상을 다시 만지는 거지. 이전과 같은 일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만 다른 자리에서 말이야.
이게 바로 '갤라세나이트'야. 붙잡는 힘을 내려놓을 때 무언가가 열리고, 그 열린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접촉하기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그 열린 자리는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방법이 아니야.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야.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말 신을 믿는 걸까, 아니면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만을 붙잡고 있는 걸까? 이름과 실제 사이의 틈을 보았고, 신조차 우리 욕망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리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 '갤라세나이트'의 비움을 걸었지.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야. 비워진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에크하르트의 대답은 놀랍도록 단순해. 특별한 장소도, 특별한 시간도, 특별한 수행도, 특별한 체험도, 특별한 자격도 없어. 신은 지금 여기에 있어.
이게 왜 놀라운가 하면, 14세기 유럽에서는 정말 급진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이야. 당시 교회는 신이 성전 안에 있고, 성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며, 성직자의 중재 없이는 가닿을 수 없다고 가르쳤지. 순례, 고행, 교회가 정한 방식만이 신에게 가는 길이었어.
에크하르트는 이 구조 전체를 흔들었어. 신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가 그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거야. 신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신을 찾아 멀리 갈 필요가 없어. 신은 우리에게서 떠나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신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방향을 뒤집은 거야.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신은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셔. 신이 내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가장 깊은 자리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거지.
에크하르트는 이 통찰을 받아들이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더 깊은 자리는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일상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거야.
그에게 신에게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영원한 현재야. 신은 세상을 어제나 내일 창조한 게 아니라, 지금 이 현재 순간에 창조하고 있어. 천년 전의 시간이나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나 신에게는 똑같이 현재이고 가까운 거야.
신성은 과거에 있었던 것도, 미래에 올 것도 아니야. 신성은 지금 이 순간의 깊이 안에 있어. 그러므로 신을 찾는 것은 다른 시간이나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사는 것이야.
이 통찰은 현대에도 이어져. 마르틴 하이데거는 에크하르트의 '지금'을 자신의 철학에 가져왔고, 에크하르트 톨레는 아예 이름까지 빌려 '지금 이 순간의 힘'을 이야기했지. 700년이 지나도록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말해줘.
신성은 어디에 있는가?
에크하르트는 신이 모든 곳에 똑같이 현재한다고 말했어. 일하는 사람이 "주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긴 시간 기도하는 사람의 가치가 같다는 거지. 마음에 눈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신성해. 먹고 마시고 자는 것 안에서도 신성을 보는 거야. 신이 거기에 숨겨져 있어서가 아니라, 신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아래, 모든 것 곁에 있기 때문이야.
이건 범신론이 아니야.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게 아니라, 신성은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거지. 빛이 모든 곳을 비출 수 있지만, 빛 자체가 비추어진 모든 것인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 드러남은 조건이 없어. 특별히 준비된 사람에게만, 특별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야. 비움이 일어나는 그 자리, 지금 이 순간의 깊이 안에서 신성은 스스로 드러나는 거야.
에크하르트가 평생 설교단에서 말하려 했던 건 바로 이거야. 신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우리가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 그 순간, 이미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
마지막 질문: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있었나?
에크하르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져.
- 우리는 평생 신을 찾고 있었는가? 아니면 신에 대한 생각만을 붙잡고 있었는가?
- 우리는 진리를 원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진리라고 부르는 우리의 확신만을 원하고 있었는가?
-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는가?
이 질문들은 잔인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이 질문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았어.
"지금 이 순간 손을 여십시오. 모든 개념을 내려놓으십시오. 모든 이미지를 비우십시오. 그러면 특별한 것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거기 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과의 만남이야.
에크하르트의 마지막과 그의 유산
에크하르트는 1328년경, 재판을 기다리던 중에 세상을 떠났어. 그의 가르침에서 이단적인 명제들이 나왔다는 이유로 정죄되었지만, 교황은 그가 생전에 오해받을 수 있는 것들을 바로잡았고 자신을 교회에 복종시켰다는 것을 인정했어. 즉, 그는 인격적인 이단자로 선고된 게 아니라,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말들이 정죄된 거야.
하지만 그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어. 제자들인 요한네스 타울러와 하일리 수소가 그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신의 벗'이라 불린 평신도 공동체, '독일 신학' 같은 신비 신학서, 마르틴 루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스즈키 다이세츠, 마르틴 하이데거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재발견하고 계승했지.
700년 전에 정죄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넓은 세계에서 더 다양한 언어로 호명되고 있는 거야.
진실을 보는 사람들의 운명
소크라테스, 스피노자, 조르다노 부르노, 갈릴레오처럼, 에크하르트도 당대 구조가 허용하는 것보다 더 깊이 본 사람이야. 그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 인물로 지목된 거지. 그의 신학이 제대로 이해될 경우,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위계 구조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어. 그는 교회라는 그릇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그릇이 담아온 진리의 전통을 사랑했어. 그는 교회가 아직 가닿지 못한 깊이를 향해 교회의 언어로 말하려 했던 거지.
"내가 만약 틀렸다면 기꺼이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실을 말했다면, 내가 죽은 후에라도 그 진실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맞았어. 7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남겨진 초대
에크하르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결론도 강요하지 않아. 그는 다만 이렇게 물어.
"그대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것들이 진리를 향해 열린 창인가, 아니면 진리를 가리는 벽인가?"
이 질문은 신앙인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을 원하며 의미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해.
"내가 추구하는 것은 그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인가?"
신을 버릴 때 비로소 신을 만난다는 역설. 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거야.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만들어 놓은 이미지들을 비울 때,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이미 있는 것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에크하르트가 700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건네는 초대야. 받아들일지 말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각자의 몫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