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민권 포기한 70대, 한국 귀국에 숨겨진 감동 사연
40년 미국 생활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야기
나는 23살이고, 미국에서 40년 살다가 최근에 한국으로 돌아왔어. 원래는 미국에서 은퇴하고 계속 살 줄 알았는데, 작년에 큰 결심을 했지. 바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거였어.
많은 사람들이 놀랐어. "아니, 미국 시민권 포기하고 한국으로 간다고? 노후는 미국이 더 좋지 않아? 손주들은 어떡하고?"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지. 나도 1년 넘게 고민했어. 하지만 결국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야기해 줄게.
미국에서의 삶
1981년, 33살에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 LA에 도착했어.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더 넓은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서 이민을 결심했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주는 가능성에 설레었어.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 영어 선생님이었지만 미국에서 쓰는 영어는 달랐고, 한국에서의 경력은 아무 도움이 안 됐지. 결국 한인타운 작은 김치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공장으로 출근했지. 하루 종일 배추를 다듬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은 힘들었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어. 아내는 한인 마켓에서 캐셔로 일했고, 저녁엔 다른 집 아이들을 돌봐주며 부수입을 얻었지.
3년 동안 돈을 모아서 작은 델리 가게를 인수했어. 코리아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히스페닉 지역이었는데, 한국 음식과 미국식 샌드위치를 같이 팔았지. 아침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닫는 생활이 시작됐어.
큰아들 민수는 14살, 딸 지영이는 12살이었어. 아이들은 학교 끝나면 가게로 와서 숙제를 하고, 주말엔 가게 일을 도왔지. 영어가 서툰 우리 부부와 달리 아이들은 금세 영어에 능통해졌고 미국 문화에 적응했어. 민수는 수학과 과학에 재능을 보여 학교에서 늘 상위권이었고, 지영이는 그림을 잘 그려 미술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지.
10년이 지나자 가게는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코리아타운 근처에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어. 민수는 UC 버클리에, 지영이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진학했지.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명문대였어.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었을 때, 우리는 정말 뿌듯했어. 민수는 실리콘밸리 테크 회사 엔지니어로, 지영이는 뉴욕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됐지. 민수가 "엄마 아빠가 희생한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을 모실게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눈물이 났어. 그동안의 고생이 보람 있었다고 느꼈지.
시간은 빠르게 흘렀어. 민수는 같은 회사 동료 제시카와 결혼했고, 지영이는 대학 동기 데이비드와 가정을 꾸렸지. 손주들이 태어났을 때, 우리 부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민수의 첫째 에단, 둘째 소피안, 지영이의 첫째 케이틀린, 둘째 브라이언. 네 명의 손주들은 우리 삶에 새로운 기쁨이었지.
2010년, 62살에 가게를 팔고 은퇴했어. 아내와 나는 토론토로 이사했고, 주말마다 아이들과 손주들이 찾아오는 평화로운 노후를 보냈지. 매주 수요일엔 한인 시니어 센터에 가서 다른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냈고, 일요일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어. 가끔 한국에 계신 형제들과 통화하며 안부를 물었지만, 미국이 이제는 완전한 우리 집이 된 것 같았어.
한국에서의 변화
그런데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때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 "형님, 저 막내예요. 어머니가 많이 위독하세요." 95세 어머니가 대전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지.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갈 수가 없었어.
매일 영상 통화로 어머니를 뵈었지만, 의식이 없는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어. "어머니, 저 큰아들이에요.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곧 가서 뵐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매일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어머니 상태는 점점 나빠졌어. 한 달 후, 어머니는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
코로나 규제가 조금 완화되어 겨우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 때는 이미 장례식도 끝난 뒤였어. 대전 납골당에 안치된 어머니 함을 보며 나는 하염없이 울었어. "어머니, 죄송해요. 불효자가 너무 늦게 왔네요."
동생들이 들려준 어머니 마지막 날들은 나를 더욱 괴롭게 했어. "형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꾸 형님을 찾으셨어요. '큰아들 언제 오니, 큰아들 얼굴 한번 보고 싶다' 하시면서요. 저희가 영상 통화 연결해 드려도 잘 못 알아보시고 그냥 직접 만나고 싶다고만 하셨어요." 막내 동생의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40년 전 미국으로 떠날 때 공항에서 우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지. "엄마, 자주 올게. 미국 가서 잘 정착하면 엄마도 모시고 갈게." 그렇게 약속했지만, 결국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어머니는 한 번도 미국에 오지 않으셨고, 나는 1년에 한두 번 잠깐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전부였지.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고향 대전을 둘러봤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아파트 단지가 되어 있었고, 어린 시절 뛰놀던 동네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지.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던 옛집터에는 아직도 오래된 감나무가 서 있었어. 골목에서 만난 옛 이웃 영자 씨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했지. "아이고, 병수 아니야? 나 기억 안 나? 옆집 살던 영자야." "어머니 돌아가셔서 왔어. 이제 미국 사니까 여긴 잘 안 오게 되네. 그래도 고향인데. 나이 들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는 법이야. 우리 엄마도 자식들 다 서울 가 있어도 여기 떠나기 싫어하시더라고." 영자 씨의 말이 마음에 남았어.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무언가 허전함이 있었어. 어머니의 부재는 생각보다 컸고,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점점 커져 갔지.
2022년 추수 감사절이었어. 온 가족이 민수 집에 모였지. 큰 칠면조가 식탁 가운데 놓이고, 아이들은 영어로 재잘거리며 웃었어. "할아버지, 할머니 해피 땡스기빙!" 손주들이 인사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았어. "얘들아, 한국말로도 인사해 봐.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한국말로 해야지." 내가 말했지만, 손주들은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겨우 "안녕하세요"만 했어.
"아빠, 애들한테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얘들은 미국에서 태어났잖아요." 민수가 말했지. "케이틀린은 한국어 학교 다니고 있어요, 아버님. 근데 요즘 애들이 바빠서 자주는 못 가요." 지영이가 덧붙였지만, 그것도 위안이 되지 않았어. 식사를 하며 아이들은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를 영어로 나눴고, 나와 아내는 그저 듣기만 했어. 가끔 우리를 위해 통역을 해주긴 했지만, 대화에서 소외된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
"엄마, 우리 다음 주에 하와이 갈래? 애들 겨울 방학 때 가족 여행 가면 좋을 것 같아." 민수가 아내에게 말했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 가실래요?" "아니, 괜찮아. 너희들끼리 가." 사실 가고 싶었지만, 비행 시간과 영어로만 해야 하는 여행이 부담스러웠어.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며 아내가 말했어. "여보,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애들이 제사는 지낼까? 애들한테 제사 지내는 법도 안 가르쳤는데." "글쎄, 미국식으로 추수 감사절 때 우리 생각하겠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어.
한국 동생들과 통화할 때마다 부러움이 들었어. "형님, 우리 막내 손자 돌잔치 하는데 정말 잘 크고 있어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하는데 얼마나 이쁜지." "그래, 좋겠다." "설날에 온 가족이 모여서 세배도 하고 떡국도 끓여 먹고 그랬어요. 형님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전화를 끊고 나면 늘 마음이 무거웠어.
2022년 봄, 나는 정기 건강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어. "미스터 김, 리피드 수치가 좀 높게 나왔네요. 추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의사 말에 가슴이 철렁했지. 다행히 추가 검사 결과 암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현실을 절감했어. 메디케어가 있었지만 본인 부담금은 만만치 않았고, 전문의 예약 잡는 데만 한 달이 걸렸지. 한국 같으면 바로 검사받고 치료할 텐데. 아내의 한숨 섞인 말이 맞았어.
그해 여름, 나는 큰 결심을 했어. "여보, 우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아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봤어. "갑자기 왜? 여기 산 지 40년이 넘었는데." "어머니도 안 계시고,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데.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긴 대화가 이어졌어. 아내도 사실은 한국이 그리웠다고 했어. 친구들과 수다 떨며 시장 보던 일, 찜질방 가서 땀 빼던 일, 고향 음식 먹으며 정을 나누던 일들이지.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았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 다시 오기 어렵고, 재산 정리도 복잡하고, 무엇보다 자녀들과 손주들을 떠나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지. 아이들과 상의했을 때 예상대로 반대가 심했어. "아빠,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세요? 여기가 집인데." 민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지. "엄마 아빠 거기 가서 뭐 하실 거예요? 아는 사람도 이제 별로 없잖아요." 지영이도 걱정스러워했어. "의료 보험은 어떻게 하실 거고, 생활은요? 한국 물가도 많이 올랐다던데." 맞는 말이었어.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지.
올해 초, 나는 다시 한국을 방문했어. 이번엔 관광이 아니라 정착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지. 서울 부동산을 둘러보고, 의료 보험과 연금 제도를 알아봤어. 무엇보다 고향 대전을 다시 찾았지. "형님, 정말 돌아오실 거예요?" 막내 동생이 반가워하며 물었어. "그래, 이제는 정말 돌아올 때가 된 거 같아." 동생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오랜만에 가족의 따뜻함을 느꼈어. 조카들이 "큰아버지"라고 부르며 반겨주고, 어머니가 즐겨 드시던 된장찌개를 끓여 주었지. "큰아버지, 미국 생활 어떠셨어요? 저도 나중에 유학 가고 싶은데." 막내 동생 아들이 물었어. "힘들기도 했지만 값진 경험이었지. 하지만 결국은 고향이 최고야. 어머니 산소를 찾았을 때,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졌어. "어머니, 이제 돌아올게요. 늦었지만 곁에서 자주 뵐게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어머니의 대답처럼 들렸어.
미국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귀국 준비를 시작했어. 집을 내놓고, 은행 계좌를 정리하고, 가구와 세간들을 처분했지. 40년 동안 쌓아온 삶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 "여보, 이건 민수 초등학교 졸업 앨범이네. 이것도 가져갈까?" "지영이가 처음 그린 그림도 있어. 어떡하지?" 하나하나가 추억이라 버리기 아까웠지만, 전부 가져갈 수는 없었어. 중요한 것들만 골라 한국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거나 기부했지.
시민권 포기 절차도 시작했어. 영사관에서 서류를 작성하며 손이 떨렸어. "정말 포기하시겠습니까? 한번 포기하시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직원이 확인했을 때 잠시 망설였지만, 결심은 변하지 않았어. "네. 포기하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다가왔어. 공항에 나온 아이들과 손주들을 보니 눈물이 났어. "할아버지 할머니 가지 마세요." 막내 손주 브라이언이 울며 매달렸지. "Don't worry, sweetie. 할아버지가 자주 영상 통화할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말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자연스러웠어. "아빠, 엄마 정말로 정말로 가셔야 해요?" 지영이도 울먹이며 물었지. "그래, 우리는 가야 해. 하지만 너희들은 언제든 한국에 놀러 와. 이제 한국도 너희 집이야." 민수와 포옹하며 말했지. "Of course, always when you arrive." 아들의 영어 인사가 씁쓸하면서도 당연하게 느껴졌어.
비행기가 이륙하며 LA 야경이 멀어져 갔어. 42년 전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설렘과는 다른 묘한 감정이 밀려왔지. 옆자리에 아내가 내 손을 잡았어. "여보, 우리 잘 결정한 거겠지?" "그럼, 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
13시간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국어 안내 방송이 정겹게 들렸어. "고객 여러분,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집으로 가는 공항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국 풍경이 낯설면서도 친숙했어. 높은 아파트들, 한글 간판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모든 것이 그리웠던 것들이었지.
대전에 도착해 동생이 마련해 준 작은 아파트에 짐을 풀었어. 단출한 살림이었지만, 새로운 시작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지. "형님, 내일 동네 구경시켜 드릴게요. 요즘 대전도 많이 변했어요." 막내 동생의 환대가 고마웠어.
첫날 밤, 나는 베란다에 나가 대전 야경을 봤어. 미국의 화려한 도시와는 다른 정겨운 불빛들이 반짝였지. "어머니, 이제 돌아왔어요. 늦었지만 정말 늦었지만 집에 왔어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어.
다음 날부터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어. 주민등록번호부터 시작해 건강보험 가입, 은행 계좌 개설, 휴대폰 개통 등 해야 할 일이 많았지. 처음엔 복잡해 보였지만, 동생들 도움으로 하나씩 해결해 나갔어. "형님, 요즘은 다 온라인으로 해요. 스마트폰으로 이렇게 하면 돼요. 미국보다 훨씬 편리하네. 역시 IT 강국이야." 한국의 빠른 행정 처리와 디지털 시스템에 놀랐지.
병원도 다녀봤어. 감기로 동네 의원을 찾았는데, 진료비가 만 원도 안 되는 것에 깜짝 놀랐지. 미국에서는 의사 얼굴 한번 보는데도 100달러가 넘었는데. "그래서 다들 한국 의료 보험이 최고라고 하잖아요, 형님." 약국에서 약을 타면서도 차이를 실감했어. 처방전 하나로 바로 약을 받을 수 있고, 약사가 친절하게 복용법을 설명해 주었지.
시장도 가봤어. 대전 중앙시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가던 곳이었는데, 여전히 활기 차고 정겨웠지. "아주머니, 배추 얼마예요?" "한 포기에 3,000원이에요. 김치 담그시려고요?" "네. 오랜만에 직접 담가 보려고요." "어디서 오셨어요? 말씨가 좀 다르네." "미국에서 살다가 이제 돌아왔어요." "아이고, 그래요? 고생 많으셨겠네. 그래도 고향이 최고지요." 상인 아주머니의 푸근한 말씨에 마음이 따뜻해졌어.
동네 노인정도 찾아갔어. 처음엔 어색했지만, 금세 다른 어르신들과 친해졌지. "미국에서 사셨다고요? 거기는 어떻습니까?" "뭐 살만하지만, 역시 고향이 좋지요. 한국 음식도 그립고 정도 그립고." "맞아요. 맞아요. 타향살이가 얼마나 힘든데. 그래도 돌아오셨으니 이제 편하게 사세요." 함께 화투도 치고 막걸리도 한잔하며 어울렸지. 미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끈끈한 정이 있었어.
주말엔 어머니 산소를 찾아갔어. "어머니, 저 이제 매주 올 수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는 1년에 한번 오기도 힘들었는데." 벌초도 하고 꽃도 바꿔 드리며 못다 한 효도를 하려 노력했지.
어느 날 동생 집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어. "큰아버지, 미국 이야기 좀 들려 주세요." 조카들이 궁금해하며 물었지. "그래, 뭐가 궁금한데?" "미국 사람들은 정말 매일 햄버거만 먹어요?" 막내 조카의 순진한 질문에 모두 웃었지. "아니야. 여러 음식을 먹지. LA는 특히 한국 음식도 많아서 김치찌개도 먹고 불고기도 먹고 그래." "와, 진짜요? 그럼 왜 돌아오셨어요?" "음. 아무리 좋은 곳도 고향만 못 하더라. 너희들이 있고 우리 뿌리가 있는 곳이 최고지."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어. "큰 어머니, 된장찌개가 정말 맛있어요. 미국에서도 많이 끓여 먹었는데, 한국 된장으로 끓이니까 더 맛있네." 아내가 뿌듯해하며 말했지. 소소한 일상이지만, 이런 평범한 행복이 그리웠던 거였어.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생활에 점점 적응해 갔어. 아침엔 동네 공원을 산책하고, 점심은 집에서 한식을 해 먹고, 저녁엔 뉴스를 보며 하루를 마감했지. 가끔 미국의 자녀들과 영상 통화를 했어. "아빠 엄마 잘 지내시죠?" "그럼, 아주 잘 지내. 너희들은 어때?" "저희도 잘 지내요. 브라이언이 아빠 엄마 보고 싶어 해요." 화면 속 손주들이 손을 흔들었지. "Hi, Grandpa. Hi, Grandma." "그래, 우리 강아지들 건강하게 잘 지내." 거리는 멀어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까웠어.
어느 날 한국 TV에서 이민자들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어. 젊은 나이에 호주로 떠난 부부가 노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사연이었지. "우리랑 비슷하네." 아내가 말했어. "그러게. 다들 비슷한 마음인가 봐." 타국에서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결국 인생의 마지막엔 고향이 그립다는 이야기에 공감했어.
봄이 오자 대전 천변에 벚꽃이 피었어. "여보, 우리 벚꽃 구경 가요." "그래, 운동 삼아 걸어 가자."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지. "LA에서도 벚꽃 축제 갔었지?" "응. 하지만 한국 벚꽃이 더 예뻐." 사실 벚꽃은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고향에서 보는 것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 벤치에 앉아 쉬는데, 옆에 앉은 노부부가 말을 걸었어. "날씨가 참 좋죠?" "네, 정말 좋네요." "혹시 이 동네 사세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아, 저희는 미국에서 살다가 최근에 돌아왔어요." "그러셔요? 우리 아들도 미국에 있는데, 자주 못 봐서 섭섭해요." 타향의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어. 저희도 이제는 그런 부모가 되었으니까요.
여름엔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 고향인 충북 산골을 찾았어. "형님, 어머니가 어렸을 때 사신 집터가 여기래요." 이제는 폐가가 된 낡은 집을 보며 어머니 어린 시절을 상상해 봤지. "어머니가 여기서 뛰어놀았겠구나." "맞아요. 할머니가 그러셨대요. 어머니가 공부를 잘해서 소재지 학교까지 걸어 다니셨대요." 그런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지, 이제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어.
가을이 되자 단풍 구경을 갔어. 계룡산 단풍은 정말 아름다웠지. "미국 동부 단풍도 유명하지만, 한국 산 단풍이 더 곱네." 아내가 감탄했어. 산을 오르며 만난 등산객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지. "안녕하세요." "네. 날씨가 좋네요." "네. 단풍이 절정이에요." "자주 오세요?" "이제 막 대전에 정착해서요. 앞으로 자주 올 생각이에요." 한국 사람들의 정이 그리웠는데,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말을 섞을 수 있다는 게 좋았어.
겨울이 다가오자 김장을 했어. "형님, 우리 같이 김장해요. 형수님이랑 둘이 하시기 힘드실 거예요."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김장하는 날, 오랜만에 대가족 정을 느꼈지. "큰 어머니, 양념이 딱 좋아요. 옛날에 시어머니한테 배운 거야. 미국에서도 김치는 직접 담가 먹었거든." 다 함께 만든 김장 김치를 나눠 가지며, 이런 게 바로 한국의 정이구나 싶었어.
연말이 되자 첫 번째 한국에서의 연시를 맞았어. 동생들과 함께 보신각 타종 행사를 TV로 봤지. "형님, 내년에는 우리 직접 가서 볼까요?" "그래도 되겠네. 이제 멀지도 않으니까." 12시가 되자 새해 인사를 나눴어. "형님, 형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너희들도 건강하고, 올해는 더 자주 보자." 미국에서는 "Happy New Year"라고 인사했지만, 한국말로 하는 새해 인사가 더 마음에 와닿았어.
새해 첫날, 어머니 산소에 다시 갔어. "어머니, 새해 인사드립니다. 이제 한국에서 잘 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바람이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어. 돌아오는 길에 들른 찜질방에서 아내가 말했어. "여보, 우리 정말 잘 돌아온 것 같아." "왜?" "미국에선 이런 찜질방도 없고, 막걸리에 파전 먹을 데도 없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게 너무 좋아." 맞는 말이었어. 물론 미국 생활도 좋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향의 편안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지.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확신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물론 그리운 것들도 있어. 캘리포니아 맑은 날씨, 드넓은 대자연, 체계적인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들과 손주들. 하지만 한국에서 찾은 것들이 더 많아. 가족과의 가까운 거리, 편안한 의료 시스템, 정이 넘치는 이웃들, 고향 음식과 문화, 그리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평온함.
얼마 전 민수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어. "아빠, 많이 젊어 보이세요? 한국이 맞으시나 봐요." 공항에서 만난 아들이 놀라며 말했지. "할아버지, 한국 진짜 좋아요. 김치도 맛있고 지하철도 깨끗해요." 손주들도 한국을 즐기는 것 같아 기뻤어. 함께 경복궁도 가고, 전통 시장도 구경하고, 찜질방도 갔지. "Dad, I understand now. You can be happy here." 민수가 떠나기 전날 밤에 말했어. 이제야 아들도 이해하는 것 같았어. 고향이란 게 단순히 태어난 곳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한 곳이라는 걸.
오늘도 나는 동네 공원을 산책하며 생각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어. 이제 나는 매주 어머니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릴 수 있고, 형제들과 자주 만나 정을 나눌 수 있고, 한국말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내 뿌리가 있는 곳에서 남은 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축복이야. 언젠가 내가 어머니 곁에 누울 날이 오면, 그때는 후회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가끔 LA 야경이 떠오르고, 손주들 영어 인사말이 귀에 맴돌 때가 있어. 하지만 창밖을 보면 대전의 정겨운 풍경이 있고, 전화 한 통이면 동생들이 달려와 주고, 어머니 산소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이것이 내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야. 화려함보다는 편안함을, 성공보다는 평온함을, 타향의 부귀보다는 고향의 정을 택한 것이지.
이제 나는 알아.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평화롭게 내려올 수 있느냐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평화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찾을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