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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만에 끝내는 고대 이집트 역사 완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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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만에 알아보는 '고대 이집트 역사' 완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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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참고문헌] -손주영 & 송경근. (2023). 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100. 서울: 가람기획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2020). 고대 이집트의 역사 1 태고부터 페르시아의 정복까지. 서울: 한국문화사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2020). 고대 이집트의 역사 1 태고부터 페르시아의 정복까지. 서울: 한국문화사 -윤용수. (2020). 고대 이집트 신앙과 내세관 연구 -오시리스 신화와 장제 문서를 중심으로-. 지중해지역연구, 22(3), 77-106. -송기돈. (2006). 고대 이집트 외교의 성격과 국제정치이론적 함의. 한국동북아논총,(38), 359-382. -이동규. (2010).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 세계와 영혼 이해. 중앙사론, 31, 197-227. -Agai, J. M. (2015). Resurrection imageries: A study of the motives for extravagant burial rituals in ancient Egypt. Verbum et Ecclesia, 36(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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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천년 간 이어온 고대 대제국 이집트 황금 마스크 각종 거대 신전 등 그 신비로운 유물들은 알 수 없는 경외감을 주며 현대 우리들까지 매료시킵니다 하지만 찬란한 유물에 비해 그 3천년 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박물관에 가서 유물을 봐도 멋있긴 한데 그래서 투탕카멘이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람세스 이세는 뭘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갸우뚱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이 영상 하나로 고대 이집트 역사의 핵심적 부분들을 쏙쏙 총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고대 이집트 무려 매머드가 살아 숨쉬던 기원전 32세에 개창 DU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 문명이 의뢰 그렇듯 이들 역시 강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바로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나일강에서 J 길이 6,700 km 나일강은 그 주변이 기막 킥의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나일강의 범람 때문이죠 강의 발원지인 에티오피아 고원에는 주기적으로 큰 비가 옵니다 그 기간 동안 상류의 물이 흘러 넘쳐 하류까지 콸콸 쏟아지고 매년 7에서 10월 동안 나일강은 범람합니다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나일강은 넘쳐 흐를 때 수천 km 밖에 온갖 영향 넘치는 흙을 다 쓸고 내려오기 때문이죠 그래서 범람이 끝나고 물이 빠지면 강 주변은 매우 비옥해서 농사가 잘됩니다 그러니 인구가 증가해 도시가 생기고 나중에는 다른 땅에다가 물을 끌어서 농사를 짓는 관계 농업지도 발달합니다 강 덕분에 문명을 이룬 이집트인 그들에게 나일강은 알파이자 오메가 숭배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집트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발전하는데 이때 이집트를 크게 둘로 나누면 나일강 상류인 남쪽에 상 이집트 집단 나일강 하류인 북쪽 하 이집트 집단이 있었습니다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지도자는 각각 이렇게 생긴 왕관을 썼죠이 도시 국가들은 서로 아웅다웅 치고 받게 되는데 그러다 가장 강력했던 도시 국가 티니스 먼저 상 이집트를 통일하니 나중엔 하 이집트까지 정복해 기원전 350년 최초로 이집트는 통일됩니다 그리고 왕관도 상하 이집트의 왕관이 합쳐진 이중 왕관으로 통합됩니다 최초의 왕조 제 1왕조 들어섰고 영광의 초대 파라오의 이름은 메네스 있죠 나르메르 고도 불립니다이 제 1왕조 이후 이집트 왕조는 마지막 제 32 1조까지 무려 320년 지속되게 됩니다 아무튼 이제 나일강 전체를 거머진 절대 권력자 파라오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핵심인 토목 치수 사업을 독점하고 절대적 왕권을 차지했죠 수천년 전에 전제 군주 그렇다면이 파라오들은 당시 무엇을 원했을까요 진시황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진시왕이 죽음을 두려워해 영생을 누리고 싶었 듯 파라오 역시 그랬습니다 진 시왕이 불로초를 찾으러 다녔다면 파라오는 영생의 방식이 사뭇 달랐죠 파라오는 좀 더 현실적으로 자기 자신이 미라가 되는 것을 택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인은 독특한 생사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그 두 개가 모두 온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육신이 썩어 없어지고 따라서 영원히 육신과 분리되 저멀리 날아갑니다 그래서 육신을 안 썩게 보존해야 집나간 영혼이 다시 육신에게 돌아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영혼과 육신이 재결합하면 영혼은 한 차원 높은 존재인 아크로 승화되고 아크가 된 인간은 사우 세계로 가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참 독특한데 그들이 이런 세계관을 구축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아무리 땅이 매말라 죽어가도 때가 되면 나일강이 범람합니다 쩍쩍 갈라지던 땅은 순식간에 비옥해서 농작물이 돋아나요 때문에 이집트인은 자기 자신이 사망하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생명이 불어 넣어질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해서 독특한 사후 관념이 생긴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파라오는 죽어서 아마포로 칭칭 감겨 미라가 되었죠 죽어서는 미라를 통한 영생을 꿈꾸면서 현생에서는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그들이었던 그런 파라오들은 기원전 28세기 초기 왕조 시대가 끝나고 이집트 고왕국이 들어서자 힘이 더더욱 커집니다 참고로 이집트 왕조는 왕조를 시기순으로 구분에 고중 신 왕국으로 나눕니다 고왕국 때가 되면 파라 파라오들은 사울을 준비하는 스케일이 더 커집니다 이제는 미라를 넘어 더 웅장한 것 무덤에 집착하게 된 것이죠 원래 파라오들은 무덤을 이런 사각형 모양으로 한 단만 쌓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27세기 즉위한 파라오 조세르 뭔가 더 특별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야 1단으로 되겠어 난 선대 왕들 다 위대해 6단으로 묘를 쌓아라 그래야 영원히 좌표 찍어서 육신으로 후딱 돌아오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최초의 피라미드 조세르 피라미드입니다 현재 이집트 사카라의 위치해 있죠이는 후대 파라오들의 선풍적인 피라미드 열풍을 불러왔고 너도나도 웅장한 무덤을 짓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피라미드도 워낙 짓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후대 파라오의 피라미드들은 정작 예산 부족이나 기술 결여로 미완성인 채 남겨지거나 나중에 어그러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조세르 제위 당시 뛰어난 건축과 이모 탭이 있어서 피라미드를 완성했지만 후대에는 그런 뛰어 한 건축가가 드물었죠 하지만 어쨌든 시행 착오를 통해 건축 기술 자체는 발전을 거듭했고 조세르 사후 한세기 뒤에는 쿠푸 왕으로 잘 알려진 쿠프가 파라오에 등극합니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고왕국 최대급의 번영하고 있었는데 그런 쿠푸 왕은 당연히 누구보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고 싶었습니다 마침 당시 이집트 건축 기술도 빌드업이 되어 있겠다 마침내 쿠푸 왕은 피라미드 건축을 명령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인 기원전 26 6세기 쿠푸왕의대 피라미드가 완성됩니다이 웅장한 무덤은 폭 233m 면적은 260만 미에 달했고 총 230만 개의 블록이 쓰였으며 피라미드 돌 하나의 무게가 평균 2.

5톤 전체 무게는 거의 600만 톤에 다했죠 현재 우리가 이집트 하면 떠오르는 이집트 기자의 세 개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입니다 그 웅장한 스케일을 보고 당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만 명의 노예가 40년간 지었다고 기록했는데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1만 명만으로 충분히 건설했을 것이라고도 보며 또한 건설 노동자들도 노예가 아니라 증발된 자유인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상식적으로 노예를 채찍질해 가며 억지로 짓게 만들면 마감 처리를 대충하거나 고의적 사보타주 행해져 부실공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부들은 꽤 좋은 대접을 받았죠 돈 받고 일했고 식사로 고기도 잔뜩 대접 받았습니다 아무튼 이런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후 다음 파라오들은 너도나도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피라미드를 지었죠 그렇게 이집트 기자에 피라미드 군락지가 생깁니다 참고로 제 4왕조의 파라오 카프레의 피라미드에 더해 권위를 좀 더 표현하고 싶어서 그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하나 통째로 깎아 스핑크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힘과 인간의 지력을 갖추니 즉 위대한 파라오를 상징했고 그렇게 피라미드를 엄청나게 짓던 이집트 왕가 하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런 대사업을 매 왕 마아 버리면 국가 재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절합니다 때문에 파라오는 차츰 돈이 떨어져 가고 그 권위와 영향력도 줄어듭니다 게다가 기원전 22세기 중반이 되자 이상기후가 찾아와 나일강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파라오는 이때 권위의 치명타를 입습니다 파라오의 권능은 나일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지만 강이 매마르고 농업은 파탄 났죠 자연히 권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온갖 반란이 일어나 파라오 체제는 무너져 버렸고 수많은 지방 귀족들이 너도나도 독립해서 이집트는 여럿 쪼개지게 됩니다 그렇게 고왕국이 멸망하고 이집트에는 최초의 혼란기 제 1 중간기 도래하게 됩니다 참고로 고중 신 왕궁마사지 이적으로 혼란기가 찾아왔는데이를 중간기 부릅니다 제 1 중간기 때는 130여년 간 춘추 전국 시대 마냥 각 나라가 각 축전을 버렸고 파라 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던 하지만 결국 이집트는 다시 통일이 됩니다 기원전 2055년 가장 강력했던 태배 지역 출신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가 이집트를 재통일 이집트 중 왕국을 개창한 것이죠 중왕국 워낙 나라가 피폐해지는 시기를 겪으니까 고한국 대의 위세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한국 시대 문화 예술을 재현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고 결국 나중에는 부흥의 성공 제 12왕조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 귀족들을 다 쳐내 무너진 파라오의 권위를 다시 세웠으며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중앙국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중앙국 그 위세와 걸맞지 않게 자존심 상하는 최후를 맡게 되는데 바로 기원전 18세기 갑작스러운 이민족의 침입으로 몰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힉소스 족이었다 힉소스 중동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생족 출신 집단으로 자 자신이 원래 살던 지역에 기근이 생기자 이집트로 물밀듯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굳이 따지자면 로마시대 게르만족과 비슷했죠 힉소스 이집트에 대거 정착했는데 몰려온 숫자가 매우 많아서 나중에는 이집트의 각종 요지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집트에도 게르만 족식 엔딩이 일어납니다 머리가 굵어진 힉소스 아예 이집트를 삼키겠지 다짐 군사를 일으켰고 이집트 왕조를 기여히 멸망시키고 힉소스 왕조를 세운 것이 입니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에 의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이집트 제 2 중간기 이죠 물론 힉소스 이집트 전체를 장악한 건 아니고 하 이집트를 주축으로 삼고 상 이집트는 완전 점령하지 않고 조국만 꼬박꼬박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랑캐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라니 이집트는 자존심의 거대한 스크래치가 났죠 힉소스 강점기는 기원전 17에서 16세기 동안 10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찰란 했던 자신의 문화를 잘 아는 이집트인들은 힉소스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상 이집트는 반드시 힉소스 무너뜨리이라 칼을 갈고 있었고 기원전 1550년 상 이집트의 파라오로 아흐 모세가 즉위했는데 힉소스의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그는 이런 정책을 펼칩니다 으 반드시 익소스 것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아직 약해 그러니 내 치세 향후 10년간 철저히 군대를 단련시킨다 그 뒤 힉소스 쳐들어가서 하 이집트를 수 하겠어 그리고 10년간 국력을 오로지 군사력에 집중 투자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만큼 이집트 백성들은 후순위로 밀려나 열악한 상황에 고통 받았죠 그러나 민심은 파라오의 정책에 공감해서 대체로 큰 저항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아흐모세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힉소스게 쳐들어가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집트의 대승이었다 기원전 1539년 힉소스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오히려 힉소스 족의 출신지 팔레스타인 그지 쳐들어가 그곳의 보물들을 모조리 약탈해 돌아왔죠 이로써 이집트는 다시 영광의 통일을 달성 제 18왕조 세워지니까 이것이 바로 이집트 신왕국 시대입니다 그리고이 신왕국 때 이집트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신왕국의 탄생부터가 전쟁에서 였으니 그 군사력은 매우 강력했고 그래서 신왕국 6대 파라오 투트모세 3세도 군사력을 이어받아 19년간 주변 지역으로 무려 17번의 원정을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미타니 히타이트 아시리아 우가리트 누비아 등 이집트의 주변국들이 모조리 복속되어 이집트 영토는 중동까지 늘어났죠 이집트는 드디어 나일강이 폐쇄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중동까지 주도적으로 세계관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렇게 국가는 부강해진 파라오의 권이은 또다시 어마어마하게 취소 샀죠 그런데 파라오가 또 강해졌습니다 그럼 뭘 하겠습니까 당연히 또 멋진 무덤을 짓기로 원했죠 그런데 달라진 건 이번엔 피라미드는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피라미드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하두 눈에 뛰다 보니까 파라오가 죽으면 온갖 도굴꾼들이 보물을 싹다 도구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신한국 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는 일찍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 가슴 웅장해지는 무덤은 짓고 싶은데 동굴은 안 당하고 싶어 그럼 어떻게해야 결국 그가 내린 답은 아무도 안 올 것 같은 황량한 사막 돌산 골짜기에 무덤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묘실은 커다란 암반을 뚫고 그 깊숙히 만들어 감춰 놓기로 했죠 그렇게 현재의 이집트 룩소르의 비밀 왕묘 지어졌고 후대 파라오들이 너도 나도 그곳에 무덤을 짓는데 이렇게 조성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왕가의 계곡입니다 이것이 그 모습인데이 웅장한 고대 왕묘 보려면 인천에서 나아가 이집트 룩소르 국제공항에 도착 후 30km 정도 가면 됩니다 도구를 피하려다 보니까 이런 공동 왕묘 나온 건데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도구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도구는 포기하기엔 리턴이 너무 큽니다 나라의 가장 진귀한 보물들이 진열되는 꿀단지 있으니까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마을은 도구를 통해 마을 전체가 대대손손 먹고 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지어질 당시에는 보안이 험했고 파라오는 여전히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죠 신왕국 전성기는 계속 이어지고 하트셉수트 장제전 유명한 여왕 하트셉수트 때에는 상업적으로도 이집트가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신한국 잘 나갈 때 한번 삐끗하게 됩니다 바로 당시 이집트인들이 증오했던 신왕국 10대 파라오 이크라 on 때였죠 이크라 2은 기원전 1353년 즉위했는데 그 당시 이집트의 권력 구조는 불안정했습니다 파라오의 권력은 강했지만 그러다 보니 그 옆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해 파라오의 권위를 합리화해 주는 사제 계급이 덩달아 너무 권력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크 나토는 이런 사제의 권위를 낮추고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죠 그래서 그가 쓴 방법은 종교를 손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제들은 태양신 아몬 라를 섬기는 아몬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아몬 신앙을 필도 사제들이 너무 강해졌다 그럼 약화시키려 옳지 아예 종교를 갈아엎자 이집트 신화에는 태양신이 많잖아 그럼 아무 신이 아니라 다른 태양신인 아톤 신이 가장 세다고 밀면 되겠네 그럼 아톤 신의 권위와 함께 내가 가 강해지겠지만 부정하고 아톤을 주신으로 바꿉니다 세계 최초로 일종의 종교 개혁을 한 셈이죠 그런데 다 좋은데 문제가 있었습니다이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었다 것이었죠 이크 아토는 하 나의 권능으로 못 할게 없다 그렇다면 아예 못 박자 아톱 말고 다른 신은 아예 믿지 마 신은 오로지 아토만이 존재한다 하고 다신교 있던 이집트 신앙을 유일 신교로 180도 바꿔 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집트 신들의 이름은 모조리 신정과 묘에서 삭제되었고 이러니까 당연히 사제 포함 이집트인들이 어마어마하게 반발했습니다 너무 반발이 심하니까이를 무마하려 men 이크라 on이 나라를 잘 다스리던 정복을 하든 해서 권위를 크게 세워야만 했죠 그런데 이크라 2은 오히려 매우 무능했습니다 그는 아주 낭만적인 이상주의자 정치나 국제 정세는 신경 안 쓰고 오로지 신앙만 깊으면 신이 해결해 준다며 모든 걸 방치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중동 영토는 방치되어 이민 족이 들끓었고 각종 정책도 모두 낭만 이상주의에 빠져 현실과도 안 맞았습니다 결국 그런 권위 없는 크하이 사망하니 사제들은 개혁을 다시 원상 복귀시켜 아몬 신앙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크나 on 아톤 신앙은 기록 말살 형에 처해져 그 동상과 신전들이 파괴되었습니다 물론 남아있는 유물은 있어서 우리는이를 알 수 있지만요 이런 기록 말살 작업은 이크 아톤 다 다 다음 파라오 때 이루어졌는데 이때 파라오는 여러분도 잘 아십니다 바로 그 유명한 투탕카멘이 사실 투탕카멘은 멋짐이 흐르는 투탄카멘 황금 마스크와는 다르게 매우 힘이 약한 파라오 있습니다 그는 불과 열살의 주위 한대다 근친혼으로 인해 각종 유전병에 시달리고 있었죠 이에 아몬 신앙을 믿던 기존 사제들은 투탕카멘을 꼭두각시로 이용하여 이크 아톤의 대한 기록 말살 작업을 진행한 것입니다 투탕카멘 아버지가 크나 on이니 투탕카멘은 자기 아버지를 부정해야 했죠 그런 투탄카멘 는 결국 18살에 사망하게 됩니다 가장 영향력이 없었던만큼 그의 묘는 초라한 편에 속하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재감이 없던 덕분에 투탄카멘의 묘은 왕가의 계곡에 있으면서도 거의 도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22년 투탄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 때 온갖 값을 먹일 수 없는 보물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죠 가장 약한 파라오 미모였다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강력했던 파라오의 미는 어땠을지 간음이 안 됩니다 그리고 투탄카멘 이후에는 또다시 네임드 파라오가 등장합니다 바로 람세스 이세이 그는 기원전 1279년 직위 했는데 이집트는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크나 on이 워낙 아무것도 안 한 바람에 중동에서는 이집트 영향력이 약해지고 그 틈에 이집트를 위협할 새로운 세력 히타이트가 성장해 있던 것입니다 히타이트는 크나 on 무능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여 원래 이집트 땅이었던 요충지 카데시 점령해 놓고 있었습니다 입니다 카데시 지금의 싱가포르 같은 당대의 무역 중심지 람세스 이세는 히타이트를 몰아내고 이곳을 되찾아서 이집트가 다시금 패권을 되찾기 원했죠 결국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의 이집트 군이 출격해 무아 아리 왕에 히타이트 군과 카데시 두고 맞붙게 되니 이것이 역사적으로 연구 가능한 세계 최초의 전투 카데시 전투입니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외로 그 누구의 완벽한 승리 없이 거의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당시 두 나라는 최고의 군사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전략 전수를 아무리 써도 서로가 서로를 버텨낸 것입니다 결판이 안 나니까 그 이후에도 또다시 전쟁을 버렸는데 그마저도 승부가 안 났고 결국 나중에 가면 양측 다 전쟁 비용이 감당이 안 되니까 한 발 물러서기도 하고 이번에는 카데시 ES 아이러니하게도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이 조약도 역사 최초의 평화 조약으로 유명하죠 하지만이 그 끝은 났지만 람세스 이세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히타이트를 꺾지는 못했기 때문이죠 때문에 자존심강한 람세스 이세는 역사를 입맛에맞게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카데시 전 2에 대해 신전의 벽화로 서사시를 만들어서 자기 덕분에 이집트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고 선전한 것입니다 파라오 답게 뻥도 크게 쳐서 자신이 혼자서 적 수천 명을 도했다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명모 때문에 람세스 이세는 자존심과 자아 도치가 가 센 사람으로 유명하기도 하죠 그래서 그는 자신을 숭배할 신전인 아부심벨 대신전으로 짓게 했는데이 신전의 석상을 보면 세 명의 신 가운데 람세스 2세도 떡하니 앉아 있도록 조각되어 그는 사라 생전부터 제사를 받았습니다 이걸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파라오의 위험은 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이집트 전통 왕조의 마지막 황금기가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이집트는 급속히 쇠퇴하게 된 것입니다 계속된 전쟁과 건설로 국고가 탕진이 된데다 이후 파라오 람세스 3세 때가 되면 이집트의 강력한 이민족 집단인 바다 민족이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걸 막아내라 이집트는 추가로 국력을 소모했지만 국력이 바닥 났고 파라오의 왕권은 또 약화됩니다 이때를 틈타서 크나 on 때 개혁하지 못한 아몬 신앙 사제들이 권력이 강해졌습니다 결국 왕조는 쇠락하고 이집트는 내분으로 또 다시 분열됨 제 3 중간기의 돌 하게 되죠 이제 이집트는 완전히 예전의 위용을 잃습니다 이집트 남쪽에는 흑인 계통의 제국 쿠시 왕국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들이 혼란을 틈타 이집트를 점령했고 최초의 흑인 파라오 왕조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는 또 중동의 아시리아가 쳐들어와서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지배도 받았죠 물론 기원전 7세기에 이집트가 잠시 땅을 되찾았으나 그 다음에는 당대의 거대 제국 페르시아 제국이 쳐들어와서 이집트를 또 점령해 버립니다 이번엔 페르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죠 그런데이 지점이 이집트 역사에서 전환점이 됩니다 페르시아 식민지가 되자 이집트 역사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니 기원전 4세기 이집트 바다 너머의 왕국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그 유명한 정보광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순식간에 페르시아 전역을 정벌하고 헬레니즘 제국을 세웠죠 그런데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연히 알렉산더는 이집트까지 점령을 했는데 이로써 이집트는 엉뚱하게도 다이렉트로 그리스 문명권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사망 이후에는 제국을 알렉산더의 부하들이 나눠 갔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집트 지역은 알렉산더의 충신 프톨레마이오스가 차지하고 그가 파라오 자리에 앉습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인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된 것이죠이 전무후무한 그리스 왕조가 바로 마지막 이집트 왕조 제 3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있니다이 체제는 300년간 이어지게 되는데 의외로 이제 이집트는 이때 잠시 번성하기 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는 도시가 세워졌는데 알렉산드리아는 실크로드와 바다 해로의 교차점이 아는 기막힌 위치 선정을 자랑했고 결국 인구 100만 명을 찍고 파로스의 등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등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번영하게 된 것이었죠 하지만 그런 이집트도 마침내 끝이 다가오게 됩니다 기원전 51년이 되자 이집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여왕 클레 파트라 7세가 권력을 잡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 내부 권력 투쟁에서 패에 실각하고 되었는데 그때 제기하기 위해서 외부 세력과 손잡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에는 로마가 지중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이 되어 있었으니 그녀가 관심 있어 하는 대상은 로마였다 어떻게는 로마와 커넥션을 만들어 권력을 다시 잡고 싶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명한 카이사르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이집트에 들르는 일이 생 낍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때 자신의 필살기를 써서 카이사르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로 다짐했죠 바로 유혹 스킬이었으나 외모가 엄청나게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남성을 유혹해 매료시키는 플러팅 스킬이 세계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나이 20대이다 클레오파트라는 50대에 카이사르를 은밀히 만나 유혹했고 결국 카이사르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죠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배려하며 로마에도 데려갔고 곧 그녀는 높아진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마침내 다시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측근들의 배반으로 암살된 것이죠 클레오파트라의 후원자는 사라졌고 그녀는 로마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이집트의 지배자이다 엄청나게 아쉬울 것은 없었죠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여기서 그만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당시 지도자가 사라진 로마는 실력자들이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 두 축이 로마를 두고 다투는 국면이 되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더 크게 키우고 싶어서 흠 가만이 둘 중 한 세력에 묻고 그 세력이 패권 다툼에서 이긴다면 우리 이집트의 안전을 보장받고 나중에는 이집트가 예전의 위세를 되찾을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각을 본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이집트 파멸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녀가 선택한이는 하필 안토니우스 있죠 안토니우스는 당시 이집트 관리직 책이기도 했고 여색을 탐 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유혹했고 안토니우스는 홀랑 넘어가서 그녀와 사랑에 빠졌죠 그러는 한편 로마의 권력 갈등은 날로 심각해졌고 마침내 기원전 1세기 후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두고 한 판 붙게 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이때 이집트 군을 보내 안토니우스와 연합을 구성해 적군에 맞섰습니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은 옥타비아누스 다 훨씬 전력이 강했습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는 전투 하나만이긴 면 공을 인정받아 더 강력한 이집트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었죠 그렇게 기원전 31년 양측의 운명을 가를 악티움 회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는 그만 안토니우스 군이 대참패를 해버립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은 열세였지만 유연하고 뛰어난 전술로 상대편을 격파한 것이었죠 결국 안토니우스는 자결했고 클레오파트라 역시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 조리돌림 당할 바에 우아하게 죽음을 택하겠다 하고 스스로 독사를 물려 자결했습니다 여담으로 그녀도 죽음은 두려워서 의사와 의논하여 여러 차례 실험해 본 뒤 가장 고통 없이 갈 수 있는 종의 독사를 골라 물렸다는 카더라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가 끊어졌고 기원전 30년 고대 이집트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버립니다 줄 잘못 서서 왕조가 아예 파탄에 이은 것이죠 이로써 기원전 3 150년에 기원전 30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는 긴 역사를 뒤로 하고 종언 을 고했습니다 매머드가 살아 숨쉴 때 세워진 나라가 로마 카이사르 때까지 이어지다가 끝났습니다 역대 국가 중에서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경우가 있었나 싶습니다 사실 고대 이집트는 워낙 예전이라 현대인들과 역사적 접점은 크게 없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웅장한 문화 유산을 통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된 걸 보면 문화의 힘이란 위대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대 이집트가 멸망하고 나서 이집트 지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집트는 식량 생산 하나는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멸망 이후 로마에 편입되다 로마는 이집트를 아주 쫙쫙 쥐어 짜내 풍부한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었죠 그래서 이집트는 로마의 빵바구니 아는 별명도 지어졌습니다 한편 파라오 체제가 무너졌으니 이집트의 전통 신앙도 종말을 구하죠 로마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후 점점 기독교화 되면서 이집트의 전통 신전들은 이단으로 탄압 받아 폐쇄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백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가 약해지고 7세기부터 이슬람 제국에게 정복되어 이슬람화가 됩니다 그렇게 이집트 전통문화가 희미해지고 이집트인은 아랍인으로 편입되지 그러다 오스만 제국 영국의 지배를 거치다가 이집트는 1922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고 현재는 이집트 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수천년간 이어졌던 대제국을 그 문화는 사라지고 찬란했던 유물만을 남긴 채 영원히 잠들어 있죠 [음악] Ah
영상 정리

영상 정리

1. 이집트는 3천년간 이어진 대제국입니다.

2. 신비로운 유물들이 현대까지 매력적입니다.

3. 하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4. 박물관 유물만 보면 인물들이 헷갈릴 수 있어요.

5.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핵심 역사를 정리해 드릴게요.

6. 이집트는 기원전 32세기쯤 시작된 문명입니다.

7. 강에서 시작된 농경 문화가 발전했어요.

8. 나일강 범람이 농사와 인구 증가를 이끌었습니다.

9.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로 나뉘어 있었어요.

10. 결국 상 이집트가 먼저 통일됐어요.

11. 최초의 왕은 메네스, 1왕조의 시작입니다.

12. 파라오는 절대 권력을 가졌어요.

13. 영생을 위해 미라를 만들고 무덤을 지었어요.

14. 피라미드 건축이 왕권의 상징이었죠.

15.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유명합니다.

16. 거대한 돌 블록과 정교한 건축 기술이 필요했어요.

17. 이후 피라미드들은 점점 커지고 복잡해졌어요.

18. 하지만 비용과 기술 문제로 점차 축소됐어요.

19. 신왕국 시대에는 군사력과 영토 확장에 힘썼어요.

20. 투트모세 3세는 강력한 군사 원정을 했어요.

21. 람세스 2세는 전투와 건축으로 유명합니다.

22. 특히 카데시 전투와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입니다.

23. 하지만 전쟁과 건설로 재정이 어려워졌어요.

24. 이후 내란과 분열, 혼란기가 찾아왔어요.

25. 흑인 제국 쿠시 왕국이 잠시 지배했어요.

26.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외세 침입도 있었어요.

27.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세워졌어요.

28. 이집트는 헬레니즘 문화와 번영을 누렸어요.

29. 기원전 51년, 클레오파트라 7세가 권력을 잡았어요.

30. 그녀는 로마의 카이사르와 연합했어요.

31. 이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이 벌어졌어요.

32. 결국 30년,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어요.

33. 긴 역사를 가진 고대 이집트는 멸망했어요.

34. 유산은 문화와 유물로 남았어요.

35. 멸망 후 이집트는 로마, 이슬람, 오스만 지배를 받았어요.

36. 1922년 독립 후 현재의 이집트가 되었어요.

37. 찬란한 유물은 남았지만, 역사는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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