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도 버틴 韓 시멘트 유일 생존 비결? 64년 한일시멘트 역전승 비밀!
한일시멘트, 64년 동안 살아남은 비결은?
옛날 옛날에...
우리나라 시멘트 회사 중에 쌍용양회는 일본 자본에 넘어가고, 동양 시멘트는 아예 망해버렸어. 그런데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어려움(IMF, 글로벌 금융위기, 동양 그룹 붕괴)을 겪었는데도 한일 시멘트만은 오너 경영권을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아남았대. 심지어 다른 회사들이 인수되거나 망할 때, 한일 시멘트는 오히려 현대 시멘트를 인수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64년 동안 굳건히 버텨온 한일 시멘트의 비밀을 파헤쳐 보자!
1. 한 청년의 꿈, 그리고 시작
이야기는 1910년대 후반, 허채경이라는 청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부산에서 생선 장사를 했지만 실패했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대전에서 소석회 공장을 차려 재기에 성공했지. 그 발판으로 서울에 올라와 시멘트 특약점을 열게 돼.
1960년, 허채경 회장은 전국 시멘트 특약점 주인들을 모아 한국양회판매라는 회사를 만들었어. 지금으로 치면 핸드폰 대리점 주인들이 모여서 핸드폰 회사를 만든 격이지! 그리고 1961년 12월, 마침내 한일시멘트공업이라는 회사가 탄생했어.
한일 시멘트의 진짜 시작은 충북 단양에 있는 석회석이 묻힌 산이었어. 이 산 덕분에 회사의 운명이 결정된 거지. 회장님의 호 '우덕'도 이 동네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있어. 1964년, 단양 공장이 완성되면서 외국에서 시멘트를 사다 쓰던 시절에 우리나라 인프라를 책임지기 시작했어.
2. 절약왕 회장님의 특별한 원칙
회사를 이렇게 키운 허채경 회장님은 정말 절약왕이었다고 해. 칫솔을 가위로 잘라 쓰고, 화장실 물 한 바가지도 아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야. 재벌 총수와 절약왕이라니, 좀 의외지?
이런 절약 정신은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졌어.
- 1969년, 회사를 세운 지 8년 만에 큰 결정을 내려.
- 생산 능력 두 배 이상 확대: 킬른(시멘트 만드는 기계)을 늘려서 연간 생산량을 100만 톤 시대를 열었어.
- 업계 최초 상장: 회사를 공개하고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지. 이건 돈을 어떻게 끌어올지, 회사를 어떻게 키울지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갈림길이었어.
보통 이럴 때면 빚을 내서 사업을 확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허 회장님은 자기 돈으로 회사를 키우는 원칙을 지켰어. 남의 돈이 아니라 회사가 모아둔 돈으로 공장을 짓겠다는 거지.
반면에 쌍용양회는 이때 그룹 차원에서 빚을 늘리면서 외형을 키워갔어. 남들이 외상으로 큰 가게를 낼 때, 한일은 현금으로 작은 가게를 운영한 셈이야. 이 작은 차이가 나중에 큰 결과를 가져오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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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에게 회사 지분 나눠주기: 같은 해에 회사 지분 일부를 직원들에게 나눠줬다는 기록도 있어. 거친 시멘트 산업에서 노사 관계를 좋게 만든 결정이었지. 절약왕 회장님이 자기 지분을 직원들에게 나눠준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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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물류 혁신: 시멘트를 포대가 아닌 통째로 실어 나르는 벌크 시멘트 전용 트럭을 업계 최초로 도입했어. 물류까지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한 거지.
이 세 가지, 즉 본업에 앞서가고, 자기 돈으로 회사를 지키고, 직원을 주주로 묶어둔 것이 바로 한일 시멘트의 보수 경영 DNA라고 불리는 것들의 시작이었어.
3. 국가가 비어있는 곳에 깃발을 꽂다
허 회장님은 절약만 한 게 아니었어. 딱 한 번, 자기 돈을 크게 쓴 사건이 있는데, 바로 1974년 강남 땅을 팔아 목장을 만든 것이야.
- 한일 목장: 강원도 대관령에 300만 평짜리 산지 목장을 만들었어. 시멘트 회사 회장이 산꼭대기에 소를 풀어놓은 거지.
- 서울랜드: 1988년, 국내 최초로 테마파크 개념을 도입한 서울랜드를 만들었어. 시멘트 회사가 어린이 놀이공원 사업자가 된 거야.
- 녹십자: 1967년, 작은 제약 회사에 지분을 투자했는데, 이게 나중에 녹십자가 돼. 이 회사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유행성 출혈열 백신까지 내놓았지.
이렇게 업종이 전혀 다른 사업들을 했는데도 회사가 망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바로 그 시대 국가에 꼭 필요했던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야.
- 1970년대: 식량 자급이 절박할 때 목장
- 올림픽으로 여가 인프라가 필요할 때 테마파크
- 백신 주권이 없던 시절에 국산 백신
재벌들이 외형 키우기에만 몰두할 때, 한일은 국가가 비워둔 자리에만 깃발을 꽂은 거지. 그리고 백신 사업을 맡았던 둘째 아들은 나중에 녹십자로 분가하면서 본업과 외도 사업의 이해 충돌을 미리 막았어.
4.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
1991년, 정부가 1기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시멘트 수요가 폭발했어. 이때 시멘트 파동이 일어났는데, 공장은 풀가동인데도 물량이 부족했지. 이때 한일 시멘트는 모아둔 돈으로 단양 공장에 킬른을 추가로 설치했어. 다른 회사들이 돈이 없어 헤맬 때, 한일은 이미 준비된 돈으로 빠르게 움직인 거야.
같은 해, 인천 공장에서는 국내 최초의 드라이 모르타르 '레미탈'을 생산하기 시작했어. 예전에는 현장에서 시멘트와 모래를 직접 섞어야 했는데, 레미탈은 물만 부으면 되는 편리한 제품이었지. 건설 현장의 선진화를 가져온 거야.
다른 회사들이 빚을 늘려 공장을 지을 때, 한일은 모아둔 돈으로 공장도 늘리고 신제품 라인까지 깔았어. 같은 시멘트 파동을 어떤 회사는 부담으로, 어떤 회사는 도약대로 바꾼 거지.
5. 64년 동안 살아남은 DNA
1992년, 창업주 허채경 회장은 장남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났고, 1995년에 세상을 떠났어. 그의 마지막 말은 "개척자의 길은 험하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였지.
창업주가 떠난 후에도 한일 시멘트는 굳건했어.
- 1997년 외환위기: 쌍용양회는 결국 일본 자본에 넘어가고 워크아웃에 들어갔지만, 한일 시멘트는 흔들리지 않았어. 본업인 시멘트 사업의 현금 흐름이 안정적이었고, 경영권 분쟁도 없었지. IMF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한일 시멘트의 일용직 자리가 생계가 되기도 했어.
-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다른 회사들이 공장 가동을 줄일 때, 한일은 오히려 부천 공장을 인수하고 테크니컬 센터를 열어 연구 개발과 마케팅을 강화했어. 2010년에는 해안 공장인 평택 공장을 가동하며 친환경 시멘트 생산을 시작했지.
- 2013년 동양 그룹 붕괴: 동양 시멘트가 삼표에 인수될 때, 한일 시멘트는 오히려 현대 시멘트를 인수하며 한일현대시멘트를 출범시켰어.
결론적으로 한일 시멘트가 64년 동안 살아남은 DNA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
- 한 우물 파기 + 국가가 비어있는 자리 채우기: 본업인 시멘트는 절대 흔들지 않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곳에만 사업을 확장했어.
- 자기 자본 중심의 보수 경영: 빚 대신 모아둔 돈으로 사업을 키우고, 직원들에게 지분을 나눠주며 노사 관계도 튼튼하게 유지했어.
- 분산 승계: 형제들이 차례로 회장직을 이어받고, 사업을 분가시키면서 경영권 분쟁을 막았어.
결국, 쌍용양회와 동양 시멘트가 매물이 될 때, 한일 시멘트는 오히려 매수자가 될 수 있었던 거야. 칫솔을 가위로 잘라 쓰던 회장의 작은 습관이, 회사를 64년 동안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큰 원칙이 된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