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의 유튜브 추출기

유튜브 영상의 자막과 AI요약을 추출해보세요

AI 채팅

BETA

65세 부부의 용감한 선택! 아파트 팔고 시골 컨테이너하우스 3년 생활기

게시일: 작성자: 자청의 유튜브 추출기

서울 아파트 팔고 시골 컨테이너 하우스로 이사한 68세 김영호 씨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김영호라고 해요. 올해 68살이고, 자동차 부품 만드는 회사에서 27년 동안 품질 관리 팀장으로 일하다가 은퇴했어요. 제 아내 이미숙 씨는 65살이고, 20년 넘게 동네 옷 가게를 했죠. 저희 부부가 3년 전에 서울 아파트를 팔고 시골 컨테이너 하우스로 이사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왜 시골로 갔을까?

2020년 1월, 일요일 오후였어요. 저희 부부는 아들 가족이랑 서울 노원구 아파트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은퇴하고 시골에 사는 부부가 나왔는데, 아내가 "여보, 우리도 저렇게 살아볼까?"라고 묻더라고요.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는데, 그날 밤 아파트 천장을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어요.

퇴직하고 3개월 동안 저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했어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회사 가던 일상이 사라지고, 밤늦게까지 들리는 윗집 아이들 소리랑 빠듯해지는 생활비 걱정만 남았죠. 특히 돈 문제가 심각했어요. 퇴직 전 월급이 500만 원이었는데, 국민연금은 110만 원, 아내 연금 50만 원을 합해도 월 160만 원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아파트 관리비, 난방비, 식비, 병원비 같은 고정 지출이 월 250만 원이 넘었으니, 매달 90만 원 이상 적자였죠. 퇴직금 1억 3,750만 원도 이미 3천만 원이나 줄어든 상태였고요.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충격적이었어요. 이대로라면 10년 안에 모든 돈이 바닥날 거라는 사실! 65살부터 85살까지 2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돈 없는 노년을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했죠. 그래서 어느 날 아침,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서울 아파트 팔고 시골로 가는 게 어떨까?"

아내 반응은 예상대로였어요. "서울 떠나면 죽어요! 친구들도 있고, 문화생활도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20년 넘게 옷 가게를 하면서 쌓은 인맥이 많은 아내에게 서울을 떠나는 건 사회적으로 죽는 것과 같았죠.

저는 매일 밤 경제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설득했어요. "아파트 대출금 1억 2천만 원 갚고 남은 돈으로 시골에 가면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텃밭도 가꾸고 건강해질 거야."

결정적인 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어요. 아내가 20년 넘게 옷 가게에서 서서 일한 탓에 척추측만증이 심해져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대로 도시 생활하면 5년 안에 휠체어 타게 될 수도 있어요. 자연 속에서 걷고 텃밭 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울던 아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날 저녁, 아내는 제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단, 전기, 수도, 인터넷은 도시처럼 편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올라와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조건이었죠.

시골집 구하기 & 컨테이너 하우스 결정

시골로 가기로 결정한 후 가장 큰 과제는 집 구하기였어요. 한 달 동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는데, 시골 주택은 생각보다 비쌌고 대부분 오래돼서 리모델링 비용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유튜브에서 컨테이너 하우스 영상을 봤어요. 새로 지은 깨끗한 집에서 살면서도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죠. 특히 단열을 잘 하면 냉난방비도 적게 들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면 전기료도 아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아내는 처음엔 "컨테이너에서 어떻게 살아?"라며 반대했지만, 전시장에서 직접 체험해보고는 마음이 바뀌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깨끗하네. 창문도 커서 바깥 풍경이 잘 보여."

6개월간 조사 끝에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500평 땅을 5천만 원에 사고, 40피트 컨테이너 세 개를 연결해서 집을 짓기로 했어요. 제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서 20평 규모 집을 1억 5천만 원 예산으로 만들었죠. 서울 아파트를 5억 2천만 원에 팔아 대출금 1억 2천만 원을 갚고, 땅이랑 집값으로 2억 원을 투자했는데도 2억 원이 남았으니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어요.

자녀들의 반응과 우리의 준비

서울에 사는 43살 아들은 "아버지, 시골에서 갑자기 아프시면 어떡해요? 가까운 대형 병원도 없는데."라며 걱정했어요. 반면 호주에 사는 38살 딸은 "시드니에서도 컨테이너 하우스가 트렌드예요. 친환경적이고 모던한 디자인이 인기죠. 부모님이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게 자랑스러워요."라며 응원해 줬죠.

아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저는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까지 거리와 소요 시간을 조사하고, 응급 상황 발생 시 대처 방안도 마련했죠. 집 설계할 때는 노년층 안전을 고려해서 미끄럼 방지 바닥재를 사용하고 문턱도 없앴어요.

대부분의 지인들은 "나이 들어서 무슨 시골이야? 컨테이너에서 어떻게 살아?"라며 말렸지만, 저는 마음을 굳혔어요. 27년간 품질 관리 팀장으로 일하며 제품 내구성과 기능성을 평가했던 경험이 컨테이너 하우스 설계에 큰 도움이 됐죠. 열 손실 최소화하는 이중창, 결로 방지 단열제, 좁은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수납 시스템까지 모든 디테일에 신경 썼어요.

시골에서의 첫날밤과 현실적인 어려움

드디어 2020년 9월, 서울 아파트를 떠나 구례 컨테이너 하우스로 이사하는 날이 왔어요. 27년간 살았던 집을 떠나는 순간, 아내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눈물을 흘렸어요. "여기서 아이들 키웠는데, 정말 떠나는 거네." 저도 마음이 복잡했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더 컸어요.

이사짐 트럭을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해 질 무렵 구례에 도착했는데, 지리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풍경, 맑은 공기, 들판 너머 노을은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었어요. "와, 저 별 좀 봐!" 이사 첫날 밤, 아내가 환호성을 질렀어요. 서울에서는 몇 개 보이지 않던 별들이 온 하늘을 수놓고 있었죠.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이 잊혀지는 듯했어요.

하지만 밤이 깊어지자 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소리, 나뭇가지가 창문을 긁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동물 울음소리. 아내는 불안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영호 씨, 저거 혹시 산짐승 소리 아니에요?" 저는 안심시켰지만, 사실 저도 긴장하고 있었죠. 새벽녘, 아내가 속삭였어요.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서울에 있을 걸." 그 말이 가슴을 찔렀어요. 아내를 위해서라도 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야 했죠.

아침이 밝아오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리산 풍경에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어요. 아침 햇살 받으며 마신 커피 한 잔이 서울에서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죠. "여보, 오늘은 텃밭 영역을 표시해 볼까요?" 아내도 조금씩 적응하는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시골 생활 첫 주는 인프라 쇼크의 연속이었어요. 가장 큰 문제는 인터넷이었어요. 이사 전에 통신사에 확인했을 때는 가능하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신호가 약해 속도가 매우 느렸어요. 넷플릭스는 계속 끊기고, 호주에 있는 딸과의 화상 통화는 거의 불가능했죠. "이러면 호주에 있는 딸이랑 어떻게 통화해요?" 아내의 한숨이 깊어졌어요. 결국 추가 비용을 들여 위성 인터넷을 설치했지만, 월 15만 원이라는 비용은 부담이 컸어요.

물 문제도 심각했어요. 지하수를 파서 사용하기로 했는데, 첫 달에는 수질이 좋지 않아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죠. 매일 읍내까지 나가 생수를 사 와야 했고, 결국 정수 시스템을 추가로 설치하는 데 300만 원이 들었어요. 서울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편의 시설과의 거리도 문제였어요. 가장 가까운 대형 마트는 차로 40분, 병원은 1시간 거리였죠. 편의점도 차로 15분을 가야 했어요. 치약이 떨어졌다고 바로 사 올 수 없는 현실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예상치 못한 사고와 이웃과의 정

이사 후 한 달째, 처음으로 텃밭을 일구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어요. 호미로 땅을 파다가 토종벌 집을 건드렸는데, 수십 마리의 벌이 달려들어 제가 다섯 군데나 쏘였어요. 알레르기 반응으로 몸이 부어올라 응급실까지 가야 했죠. "시골에서는 사소한 건강 문제도 큰 위기가 될 수 있어요." 이 사건 이후 응급 처치 키트를 항상 준비하고 알레르기 약을 상비약으로 갖추게 됐어요.

겨울이 다가오자 또 다른 불청객이 찾아왔어요. 컨테이너 하우스 천장에서 들리는 타닥타닥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쥐떼였어요. 서울 아파트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죠. 쥐가 전선을 갉아먹어 전기가 나가는 사고도 있었고, 식품 보관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어요. "도시에서는 몰랐던 자연과의 공존이 무엇인지 배우게 돼요." 아내는 쥐 퇴치를 위해 마을 어르신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박하잎, 쑥, 고양이 키우기 같은 전통적인 방법을 배워 적용했어요.

시골 정착 두 달째, 마을 이장님이 찾아오셨어요. 70대로 보이는 이장님은 컨테이너 하우스를 신기하게 둘러보며 "서울에서 오셨다고요? 여기서 어떻게 사실 건가요?"라고 물으셨죠.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장님이 가져온 직접 담근 막걸리를 함께 마시며 대화가 시작됐어요. 이장님을 통해 마을에는 65가구가 살고 있지만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70대 이상 노인들이라는 걸 알게 됐죠. "여기서 살려면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해요. 특히 물 문제, 땅 경계 문제는 예민하니 조심하세요." 이장님의 조언은 시골 생활의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었어요.

다음 날 마을회관에서 주민총회가 있었고, 저희 부부는 30여 명의 주민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했어요. "서울에서 온 김영호입니다. 컨테이너 집에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어르신들은 "서울 사람들이 왜 여기로 왔어?"라며 의아해하셨죠. 다행히 아내가 준비해 간 서울 과자와 커피를 나눠드리며 이야기를 나누자 조금씩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마을 할머니들이 아내에게 관심을 보이셨고, "내일 김장하는데 구경 오세요."라는 초대까지 받았어요.

혹독한 겨울과 이웃의 온정

시골 생활 3개월째, 저희는 처음으로 큰 시험을 맞았어요.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수도관이 얼어버린 거예요. 서울 아파트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죠. 이틀 동안 물 없이 지내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화장실 사용이 가장 큰 문제였죠. 이웃집 김 할아버지(83세)가 저희 상황을 듣고 찾아와 도움을 주셨어요. "도시 사람들은 이런 거 모르지. 내가 도와줄게." 할아버지는 수도관을 녹이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임시로 쓸 물도 가져다주셨죠.

그날 밤, 아내와 저는 진지한 대화를 나눴어요. "여보, 정말 여기서 살 수 있을까요?" 아내의 질문에 저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문 앞에 이웃들이 가져다 놓은 물통과 김치를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서울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서로 도와주네요." 아내의 말처럼 시골에서의 인간관계는 도시와 달랐어요. 불편함이 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발견했죠.

텃밭 가꾸기와 건강 회복

시골 생활 6개월 차, 봄이 찾아왔어요. 저는 50평 규모 텃밭에 상추, 쪽파, 고추, 토마토 등 다양한 작물을 심었어요. 서툴렀지만 옆집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차근차근 배웠죠. "야, 이거 미는 법부터 배워야지." 이웃집 김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때로는 엄했지만, 덕분에 농사의 기본기를 익힐 수 있었어요. 호미질, 물주기, 걸음 주기 등 모든 것이 생소했지만, 매일 아침 텃밭으로 나가는 일이 즐거운 습관이 되었어요.

4월 말, 드디어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어요. 직접 기른 상추로 쌈 싸 먹는 맛은 서울에서 비싼 유기농 채소를 사 먹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어요. "이게 진짜 상추 맛이구나!"라며 감탄했죠. 특히 놀라웠던 것은 건강의 변화였어요. 서울에서 매일 복용하던 고혈압 약 용량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숨이 차던 증상도 크게 개선되었어요. 매일 아침 텃밭을 돌보는 작업이 최고의 운동이 된 거죠.

아내의 건강도 좋아졌어요. 척추측만증으로 인한 통증이 줄어들었고, 밤에 잠을 잘 못 자던 불면증도 개선되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새 소리가 들려요. 이제는 그 소리로 눈을 뜨는 게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표정이 밝아졌어요.

새로운 취미와 재능 발견: 버섯 채집

시골 생활 8개월 차, 저는 우연히 새로운 취미이자 재능을 발견했어요. 뒷산을 산책하다가 다양한 야생 버섯들을 발견한 거죠. 공장에서 일할 때부터 취미로 버섯 도감을 모았던 저는 식용 가능한 버섯들을 구별할 수 있었어요. 어느 날 운 좋게도 귀한 능이버섯과 송이버섯을 발견했죠. 호기심에 마을 할머니께 가져가 보여드렸더니, "어머, 이건 비싼 거야!"라는 반응이 돌아왔어요. 마을 주민들이 모두 놀라워했고, "김 씨가 버섯의 신이야?"라는 별명까지 생겼어요.

이후 저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버섯 채집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제 지식을 공유하며 어떤 버섯이 식용이고 어떤 것이 독버섯인지 알려드렸죠. 이 활동은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어요. 특히 제가 감명 깊었던 경험은 마을 최고령자인 박 할머니(92세)와의 만남이었어요. 할머니는 "내가 70년 넘게 이 산에 살았어도 버섯을 잘 몰랐는데, 서울에서 온 사람한테 배우게 되네."라며 웃으셨어요. 평생 품질 관리를 해 온 저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이렇게 쓸모 있게 활용될 줄은 몰랐죠.

가을이 되자 채집한 버섯을 읍내 장터에 내다 팔기 시작했고, 첫 달에만 80만 원의 수익을 올렸어요. "직장 다닐 때는 몰랐던 재능이 이렇게 숨어 있었네. 은퇴 후에 오히려 더 재미있는 일을 찾게 됐어."

그 해 가을은 특히 아름다웠어요. 컨테이너 하우스 주변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고, 아침 안개가 산자락을 감싸는 모습은 그 어떤 명화보다 아름다웠어요. 아내는 매일 아침 커피를 들고 마당에 나가 풍경을 감상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서울에서는 이런 풍경을 돈 주고도 못 봐요." 아내의 말처럼 시골 생활에서 얻는 작은 행복들이 모여 도시 생활의 불편함을 상쇄했죠.

새로운 공동체, 명절의 의미

시골 생활 10개월 차, 설날이 찾아왔어요. 서울에 있는 아들 가족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 오지 못했고, 호주에 있는 딸은 비행기 표가 너무 비싸서 오지 못했어요. 처음으로 명절을 두 사람만 보내게 된 거죠. "서울에 있었다면 정말 외로웠을 거예요." 아내의 말처럼 도시에서는 명절에 자녀들이 오지 않으면 그저 텅 빈 아파트에 갇혀 TV만 보며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설날 아침, 마을 이장님을 비롯한 여러 주민들이 떡국 재료를 들고 찾아오셨어요. "새로 오신 분들이니까 우리가 챙겨야지."라며 함께 떡국을 끓이고 세배도 받았죠. 집 앞 마당에서는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며 웃음꽃이 피었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이장님 막내아들(42세)과의 대화였어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는 "처음에는 저도 적응이 안 됐어요. 하지만 3년 지나니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더라고요."라고 말했죠. 그 말이 큰 위안이 되었어요. "서울 아파트 살 때는 옆집 사람도 몰랐는데, 여기서는 온 마을이 가족 같아요." 아내의 말처럼 시골에서의 명절은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을 넘어 더 넓은 의미의 공동체 가족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어요.

특히 마을의 독거노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말벗이 되어주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되었어요. 90세 할머니의 약을 대신 타러 가고, 80세 할아버지의 지붕을 고쳐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죠.

장마와 습기와의 싸움, 그리고 극복

시골 생활 2년 차 여름, 예상치 못한 첫 번째 큰 위기를 맞았어요. 6월부터 시작된 장마는 8월까지 이어졌고, 컨테이너 하우스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어요. 밤새 대야를 놓고 빗물을 받으며 잠을 설쳐야 했죠. 아파트였다면 관리사무소에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인데, 아내의 한숨이 깊어졌고 도시 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더 큰 문제는 습기였어요. 컨테이너 구조상 환기가 잘되지 않아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고, 옷과 이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어요. 제습기를 24시간 가동해야 했고, 전기 요금은 평소의 두 배가 되었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지붕 위에 추가 방수층을 설치하고 컨테이너 외벽에 목재를 덧대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품질관리 팀장 시절 경험을 살려 설계부터 직접 했고, 마을 목수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진행했죠.

그 과정에서 특별한 인연이 생겼어요. 마을에서 40년간 목수로 일했던 최 할아버지(78세)는 "처음에는 컨테이너에 무슨 목재야? 제대로 목공을 써 볼까?"라며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셨어요. 두 달 간의 작업 끝에 완성된 집은 처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아름다워졌어요. 컨테이너 외벽은 삼나무로 덮어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고, 지붕은 이중 구조로 만들어 누수와 단열 문제를 해결했죠. 총 비용은 500만 원이 들었지만, 집의 가치는 두 배 이상 올라갔어요. "도시에서는 돈 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지만, 여기서는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웠어요."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은퇴 후 새로운 성취감을 느꼈어요. 회사에서 은퇴하고 무기력에 빠졌던 제가 이제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다시 찾은 거죠.

SNS 활동과 새로운 수입원

시골 생활 2년 6개월 차, 아내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스타그램에 컨테이너 하우스 생활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시골 컨테이너 하우스에서의 일상'이라는 주제로 텃밭 가꾸기, 시골 요리, 계절 변화 등을 사진과 글로 남겼죠. 예상치 못하게 이 계정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1년 만에 팔로워가 3만 명을 넘어섰어요. 특히 은퇴 후 시골 이주를 고민하는 50대, 60대 팔로워들이 많았어요. "저희가 겪은 시행착오가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니 뿌듯해요."

인스타그램 인기에 힘입어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어요. '68세 할아버지의 버섯 채집 비법', '65세 할머니의 시골 반찬', '컨테이너 하우스 개조하기' 등의 콘텐츠가 인기를 끌었고, 시골 생활 3년 차에는 월 30~50만 원의 광고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서울 옷 가게에서 20년간 손님들을 대하며 쌓은 아내의 사교성과 제가 품질 관리 팀장 시절 작성했던 매뉴얼 작성 경험이 콘텐츠 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죠. 특히 아내가 선보이는 '도시 주부가 시골에서 적응하는 법' 시리즈는 많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어요. 이 활동은 아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어요. 서울에서의 인간관계를 그리워하던 그녀에게 SNS는 새로운 소통 창구가 되었고, 팔로워들과의 교류가 외로움을 달래주었죠. "서울 친구들은 연락이 뜸해졌지만, 대신 전국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겼어요."

방송 출연과 아들의 변화

시골 생활 2년 6개월 차,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어요. 아내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연락해 온 방송국 PD였어요. 시골에서의 은퇴 생활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죠.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저희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했어요. 촬영은 3일간 진행되었고, 텃밭 가꾸기, 버섯 채집, 마을 주민들과의 교류 등 일상을 담았어요. 방송이 나간 후 반응이 뜨거웠고, 비슷한 꿈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쇄도했죠. "김영호 씨처럼 저도 서울 아파트 팔고 시골로 가고 싶어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에 저는 항상 솔직하게 대답했어요. "장밋빛 환상만 갖고 오시면 안 돼요. 첫 1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인터넷, 물, 난방 문제부터 외로움까지. 그걸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시골 생활 3년 차, 명절을 맞아 아들 가족이 방문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있었어요. 처음 방문했을 때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세요?"라며 걱정하던 아들이 이번에는 "정말 잘 사시네요. 저희도 나중에 이렇게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 거예요. 아들은 특히 제가 변한 모습에 놀랐어요. "아버지가 회사 다닐 때는 항상 피곤해 보이고 짜증을 많이 내셨는데, 이제는 정말 행복해 보여요."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했어요. 27년간 품질 관리 팀장으로 일하며 항상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죠.

특히 도시에서 자란 손주들이 시골 생활을 너무 좋아했어요. 열 살, 여덟 살 된 손주들은 텃밭에서 상추를 따 먹고, 뒷산에서 버섯을 찾고, 저녁에는 별을 보며 캠핑 분위기를 즐겼어요. "할아버지, 다음에 방학 때 여기서 한 달 살고 싶어요."라는 손주의 말에 눈물이 났어요. 예전에는 명절에 가족이 모여도 대화 주제가 부족했지만, 이제는 텃밭 이야기, 버섯 채집 이야기, 마을 어르신들과의 에피소드 등 나눌 이야기가 넘쳐났어요. "은퇴 후에 오히려 더 다채로운 삶을 살게 됐어요."

경제적 비교와 삶의 가치관 변화

시골 생활 3년 차를 맞아 저는 경제적인 면에서 도시 생활과 시골 생활을 비교해 보았어요. 결과는 놀라웠어요.

서울 아파트 시절 월 고정 지출:
* 아파트 대출 이자: 50만 원
* 관리비 및 공과금: 40만 원
* 식비: 80만 원
* 교통비: 40만 원
* 의료비: 30만 원
* 기타 지출: 50만 원
* 총 월 290만 원 (연금 160만 원으로는 매달 130만 원 부족)

시골 생활 3년 차 월 고정 지출:
* 공과금: 15만 원 (태양광 패널 설치 후 전기 요금 절감)
* 식비: 30만 원 (텃밭 농산물, 직접 채집한 버섯, 마을 주민들과 물물교환)
* 교통비: 20만 원
* 의료비: 15만 원
* 기타: 30만 원
* 총 월 110만 원 (연금 160만 원으로 충분히 커버되고 월 50만 원 저축 가능)

3년 동안 약 1,800만 원을 추가로 저축할 수 있었어요. 서울에 살았다면 오히려 4,680만 원을 더 썼을 거예요. 경제적으로 보면 시골 이주는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더불어 SNS 활동으로 얻는 부수입 평균 40만 원과 계절별 버섯 판매 수입 연 300만 원까지 더하면, 오히려 서울에서 살 때보다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워졌어요.

3년 후, 다시 선택한다면?

시골 생활 3년 차를 맞아 아내와 저는 서로에게 솔직한 질문을 던졌어요. "만약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이 선택을 할까요?" 제 대답은 확고했어요. "100% 다시 선택할 거예요. 건강해졌고, 돈 걱정도 줄었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행복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반면 아내의 대답은 조금 복잡했어요. "처음 1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서울 친구들이 그립고, 문화생활도 못 하고. 하지만 지금은 80% 만족해요. 특히 SNS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 생긴 것이 큰 위안이 되었고, 건강도 좋아졌으니." 아내가 특히 만족하는 부분은 건강 상태의 개선이었어요. "서울에서는 매일 복용하던 약이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줄었어요. 그리고 20년간 옷 가게를 운영하면서 생긴 불면증도 크게 개선되었어요. 서울에서는 새벽 3시까지 잠이 안 와서 TV를 보곤 했는데, 여기서는 저녁 9시면 눈이 감기고 아침 5시면 자연스럽게 일어나요. 약 없이도 푹 자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어요. 여름철 장마와 겨울철 한파는 여전히 도전 과제였고, 긴급한 의료 상황 발생 시 대형 병원과의 거리가 불안 요소였죠. 특히 제 경우 직업성 난청이 있어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두 달에 한 번씩 서울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3년 동안 마을 주민들과 형성된 유대감, 텃밭과 자연이 주는 행복, 경제적 여유 등이 이러한 불편함을 상쇄했어요. 특히 마을의 90세 어르신들이 꾸준히 자급자족하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저희에게 희망을 주었죠. "저희도 저 나이까지 저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어요."

"시골 생활은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삶을 선택한 것이에요. 불편함과 편안함이 다른 형태로 존재하죠." 이 말은 3년간의 시골 생활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문장이었어요.

컨테이너 하우스 앞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직접 기른 토마토를 먹으며, 저희 부부는 앞으로의 시골 생활 계획을 이야기했어요. "앞으로 30평 텃밭을 더 늘려서 100평으로 만들고, 염소도 한 마리 키워 볼까요?" 68세, 65세, 아직도 꿈과 계획이 가득한 저희 부부의 시골 생활은 계속되고 있어요.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자연과의 교감, 공동체와의 연결, 그리고 진정한 자립의 기쁨을 시골 생활을 통해 발견했다는 점이에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은퇴 후 진정한 행복의 비결인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아내가 했던 말이 기억나요.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 행복했지만, 시골에서는 관계와 자연, 그리고 건강이 행복의 중심이 되었어요. 우리 노후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 말이 저희 3년간의 시골 생활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아요.

최근 검색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