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미세먼지 때문에 정말 미세먼지 너무 나쁜 거 같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누굽니까?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만에 신작소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 촬영 날짜가 4월 13일인데 오늘 일본에서 전자책이랑, 실제 책으로 발간 됐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럼 번역은 아직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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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간 시점에 맞춰서 방송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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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알고 있으려나? 한국 사람들 왜 하루키를 좋아할까요? 근데 생각보다 요즘 많이 안 읽는 거 같은데요 왜? 보다는 일단은 어떤 소설가가 80년부터 거의 활동을 시작했다고치면 지금 이제 40년이 지났잖아요 40년이 지난 동안 그 기복 없이 소설을 꾸준히 내고 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꾸준히 있다는 거 자체는 조금 놀랄만한 현상이긴 한 것 같아요 조금이 아니라 정말 놀랍네요 보통 한 10년, 20년 그 정도 잡잖아요 소설가가 뭐 다른 예술가, 음악가 이런 것도 아니고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이렇게 꾸준히 지금 이제 74세인데(1949년생) 이번에 나온 책이 일본 원고지 400자 기준으로 1200매를 썼대요, "노르웨이의 숲"이 900매거든요 이게 단행본으로 국내에 나온다면 한 750페이지에서 800페이지 두 권으로 나뉠 수도 있겠다, 나눌 수 있는 그런 분량을 오늘 냈는데 읽기 전에 왜 하루키가 인기 있나 혹은 하루키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좋을 것 같아요 40년 동안 인기 있는 거는 계속 그걸 반복한 건 아니잖아 이거는 공통된 의견을 없는 거 없는데 어떤 평론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하루키-일본문학 이렇게 전 세계적인 젊은이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거는 뭐냐? 하루키 문학은 '구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야 그게 "스타워즈" 생각하시면 되요 "스타워즈"도 성장 스토리 거대한 적 거기에 맞춰서 싸워나간다는, 인종과 국가를 넘어서는 그런 보편적인 원형적인 신화구조를 차용해서 쓴 거 잖아요 하루키 이야기도 마찬가지란 거죠 갑자기 누가 실종됐거나 누군가 죽었어 뭔가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고 그다음에 돌아옴의 과정이 있는 거죠 그 사이사이를 여러 가지 캐릭터들이 채우고 있는데 미스터리 요소 같은 것도 있고 그런 식의 쉬운 구조를 가져와서 썼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다 생각해 보니까 1950년대 활동을 시작해서 90년대까지 40년 동안 인기 있다면, 우리로 치면 박경리 선생님도 여전히 현역인 그런 느낌이잖아요 대단한 롱런 하는 데는 또 분명히 그런 이유가 있고 일본 내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맨날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오르고 그럴 만큼 인기 있는 데 자 그러면 오랫동안 남실장님은 하루키를 읽어왔잖아요 제목만 보고도 감이 올 거 아니야?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 일단은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은 첫 장편, 1979년도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내고 두 번째 1980년에 "1973년의 핀볼"을 내고 나서 세 번째로 쓴 중편 분량인데 소설인데 이거는 1980년도에 일본의 "문학계"라는 잡지에 9월호에 실렸어요 근데 이 소설을 쓰고 나서 하루끼가 뭐라고 얘기했냐면 이거는 나의 실패작이다 나는 이런 소설을 쓰면 안 되는 재능이었는데 이걸 쓰고야 말았고 그래서 이후에 무라카미 하루키 전집이 나왔을 때, 출판사에서 선생님 이것도 넣어야죠 하니까, 안 돼! 이거는 빼! 그래서 전집에 유일하게 실리지 않은 작품이에요 "문학계" 그 실물 잡지가 일본 야후 옥션에 얼마에 올려져 있는지 아세요?? 그래서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이 소설을 모티브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의 모티브를 가져와서 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하루키의 대표작 중 하난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가 이 주인공의 현재 세계고 주인공의 머리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가 "세계의 끝"이에요 "세계의 끝"의 주요 설정을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 에서 차용을 했어요 그래서 한 번 (장편) 소설로 녹였는데 이것도 이제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근데 그 초기 하루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양을 쫓는 모험" 과 함께 이 책을 대표적으로 꼽을 거예요 이 책이 민음사판으로 다시 번역되어 나왔는데 민음사판 서문에서 하루키가 그 얘기를 또 해요 "거리가 그 불확실한 벽"을 그때 나는 쓸 재능이 안되었지만 그걸 가지고 이걸 썼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미심쩍어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이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 도대체 뭐길래 하루키가 지금 나이가 74세가 돼 가지고 썼을까? 생각을 해 보면 그 소설을 저도 읽지는 못했어요 잡지에 연재했던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의 줄거리는 18세 화자 '나'가 '너'를 만나요 근데 '너'는 지금 현실 세계에 있는 나는 죽었다, 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저기 벽 너머에 있는 어떤 마을에 산다 그래서 내가 너를, 너의 말들을 쫓아 가지고 그 공간으로 가서 대신 나의 그림자를 상실한 채로 그 소녀에게로 가는 거예요 근데 결국은 그 그림자를 잃은 '너'라는 것과 '나'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죠 그런 한계를 느끼고 다시 나의 그림자를 끌고 현실로 돌아온다는 그런 얘기거든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어떻게 끝나냐면 현재 세계에 살고 있는 주인공이 자기 머리 속의 세계가 있어요, 그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 세계에 머무른다는 얘기에요 돌아오는 것과 머무는 것의 차이네요, 그 차이가 있어요 이제 이번에 그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을 길게 쓰면서 과연 어떻게 됐을까? 기본 구조는 하루끼의 소설이 이 소설 기점으로 두 개에 세계를 교차시켜서 진행 하거나 아니면 두 명의 주인공이 서사를 챕터별로 교차해서 쓰는 방식으로 장편을 전개를 했는데 이번 소설도 '나'의 얘기 그다음에 그 벽으로 가로막힌 도시에 살고 있는 그녀의 얘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코로나때 집중적으로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현실 세계로 귀환하는 쪽으로 결말이 나지 않을까? 나와 너가 같이 이 현실로 귀환하든지, 혼자 귀환하든지 어쨌든 현실 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런 얘기를 쓰지 않을까? 그리고 하루키는 사회로 부터 분리된 자아로부터 출발했어요 첫 소설이 개인적이고 고독한 내면에서 나오고 "상실의 시대" 까지도 아무래도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는데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을 계기로 내 소설의 주인공들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줘야 되겠다 이렇게 바뀌거든요, 그 이후로부터 1Q84도 나오고 1Q84도 사이비 종교 얘기가 들어가 있어요 "기사단장 죽이기"가 있는데 이거 저도 읽었는데 어쨌든 그런 그 사회 참여적 스토리로 장편들이 계속 늘어나요 후기 작품들은 저는 하루키가 아무래도 80년도 자기의 30대 시절 중편을 다시 장편으로 쓴 거지만 환상성보다는 리얼리즘 그런 계열의 소설로 문체가 전개가 되지 않을까? 어쨌든 구조는 이미 나와 있고, 나와 너, 공간적으로 분리되어있고, 만날 순 있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인데 그래서 그냥 그 세계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한실로 복귀해서 이 세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정도에 큰 차이가 있는데 남실장의 예언은 결국 그 소년이 원작에서는 돌아오고 하드보일드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데, 이번엔 돌아올 것이다 이게 뭔 예언이야~ 진짜 예연은 우리나라에서 몇 권 팔릴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저는 망할 것 같아요, 망할 것 같다, 이유는 "기사단장 죽이기" 이제 그렇게 큰 반향이 없었거든요 바로 전 소설이잖아요 1Q84가 엄청 팔렸거든요 그게 3권 짜린데 1-2권이 먼저 나오고 3권째가 나중에 나왔어요 나왔는데, 세 권째는 진짜 못읽겠더라고요, 재미가 없다기보다는 말이 너무 많아! 약간 그런 설명이 너무 많아 약간 본인을 내려 놓은 듯한 느낌이에요 그래도 너무 지루했고 "기사단장 죽이기"도 읽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말도 너무 많고, 예전에 내가 알던 그런 게 아닌 거지 물론 어느 정도 팔리지만 그렇게 롱런, 대박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일단 소설 분야에서 일등은 한 번 찍을 것이나 오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거랑 무관하게 이렇게 74세가 되도록 이런 전작 장편을 주기 별로 이렇게 쓴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존경할 만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에세이도 나오지 않았어요? 저는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 그냥 카프카의 변주 같은 느낌이어서 큰 재미가 없고 에세이가 훨씬 더 재밌더라고요, 여행기든, 음악 관련 이야기든, 마라톤 하는 그런 얘기든 그런 거 보면 창작자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루틴을 만드는 거죠, 꾸준히 자기 일상을 이렇게 사니까 긴 장편을 쓸 수 있는 호흡도 만들어지고 일상을 그렇게 사니까 또 에세이로 써도 소통할 수 있고 진짜 하루끼는 그런 느낌이야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아니 에르노와 다르게, 아니 에르노는 쓰기 위해서 경험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본인이 얘기하잖아요 근데 하루키는 열심히 살고, 열심히 쓰는, 그런 면에서 태도나 윤리적인 면에서 굉장히 부러운 사람이죠 특히나 한 작가가 예술가가 그때 그 소재로 선택해서 내가 썼어 근데 그 소재는 두 번은 못 해, 예를 들면 남녀의 러브스토리야 내가 한 번 썼어, 그럼 두 번 못 쓰거든요, 근데 두고 두고 잘 못 썼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근데 계속 한 번 더 썼어 그래서 다시 또 썼잖아요 이것은 굉장히 용기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는 하루키가 이번에 이 글이 판매가 어떻기를 차지하고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만큼 쓰느라고 엄청난 분량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재밌는 좀 덜 하더라도 그 작가를 지지한다고, 좋아 한 적 있으면 한번 읽어 볼 만하다 노년에 들어서도 이렇게 자기 젊은 시절에 썼던 것을 다시 쓴다는 것은 작가로서 되게 행복한 거예요 이런 기회가 보통 잘 안 주어지거든요 자기의 현재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써 왔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주어진 거잖아요 어떤 하루끼를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 "거리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이 책도 한번 어떻게 되나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