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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김구에 대한 불편한 진실

호밀밭의 우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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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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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투사 백범 김구 그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사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항일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위협을 이루었죠.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켜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이 김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추악한 역사적 진실들을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 소위 김구의 흑역사로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은 이른바 치아포 사건입니다.

죄없는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근품까지 갈치한이 파렴치한 사건은 김구의 일기 백범일지에 자세히 쓰여 있는데요.

물론 100번일제의 내용은 사건 피의자인 김구가 직접 사술한만큼 상당히 각색되고 위화되어 있습니다.

먼저 백범일지에서 치아포 사건에 대해 쓴 부분부터 짚어보겠습니다.

때는 1896년 3월입니다.

당시 김창수로 불렸던 만 19세의 김구는 결혼 상대와의 혼약이 깨진 이후 청나라 여행길에 올랐다가 민심이 흉흉해서 중도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니꾼 치아포의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되는데요.

다음날 아침 밥상을 기다리던 김구.

그때 한 수상한 인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김구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는데요.

조선 말이 썩 능숙하지만 그가 일본인임을 눈치채게 됩니다.

일본인이 조선인인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귀 밑에는 칼집도 보였습니다.

김구는 그가 정말로 일반인이라면 그런 수상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며 분명 그가 바로 1년 전 일미사변 때 명성황우를 죽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와 민족의 해를 끼칠 인물임이 분명하니이 자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렇게 김구는 그 인무을 발로 차서 넘어뜨립니다.

그리고 목을 힘껏 밟아 살해합니다.

김구는 나중에 그의 소지품을 조사해서 그가 일본 육군 중위임을 알게 되었다고 백범 일지했었습니다.

사망자 이름은 츠치다 조스케였습니다.

백범 일지 자체만 놓고 봐도 김구의 살인은 결코 정당하기 힘든 범죄입니다.

일본인이란 이유만으로 민비의 원수라고 멋대로 넘겨짚었고 설령 그 범인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민족의 해가 될 인물이 분명하다며 살해 버렸습니다.

이는 어떻게 봐도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학자들의 연구와 사료를 살펴보면 이마저도 김구가 미화하고 왜곡한 내용입니다.

실제 치아포 사건은 더욱 끔찍한 범죄였습니다.

츠치다 조스케는 김구 말대로 군인이 아니라 아무 죄 없는 상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실체는 당시 치아포 사건으로 김구와 그 주변 목격자들을 취조했던 기록에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김구는 취조 중 자신이 칠치다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습니다.

여관에서 아침밥을 기다리던 중원이 치치다에게 먼저 밥상을 준 겁니다.

심지어는 치다가 먼저 밥상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만 19세 김구는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츠치다가 먼저 밥상을 받은 사실을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츠치다가 일본인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가슴에 피가 뛰었다고 합니다.

김구는 치치다가 한 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그에 대한 폭행을 시작합니다.

돌과 몽둥이를 동원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죽자 시신을 강해 유기했습니다.

김구는 치시다의 소지품을 뒤졌고 자신의 일행들과 돈을 나눠 가졌으며 치시다가 차고 있던 칼은 자신이 가졌습니다.

그리고 당나기를 사서 떠났죠.

치아포 여관주인 조선인 이화보 씨의 목격자 증언은 더욱 가입니다.

김구가 최치다를 폭행할 당시 김구일행 세 사람도 동참했다는 겁니다.

이와보 씨가이를 말리려고 하자 김구는 이와보씨도 폭행했고 일행 중 한 사람은 전원도 때려 죽여라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공포에 빠진 이와보 씨는 도망쳤습니다.

이후 츠치다의 시신을 강변해 버리고 소지품을 빼앗은 김구는 자신이 의병 좌통령이라는 명함을 내보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고종의 특별 사면으로 형집행이 중지되었죠.

감옥에 복격하던 김문은 1898년 타록합니다.

오늘날 백범 김구는 흔히 지적인 학자의 이미지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의 실제 모습은 꽤나 달랐습니다.

당시 180cm 대의 큰 키와 덩치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싸움에 참여했었는데요.

학자보다는 전사, 내지는 싸움꾼의 이미지에 가까웠죠.

치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갔고 신중함보다는 과감함을 우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을 함부로 빼앗기도 했었죠.

설 그게 동지일지라도요.

2000년대 러시아에서 흥미로운 자료 하나가 나옵니다.

국호 코민텔은 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자료인데요.

60만 금마루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을 거든이 넘기는 거금을 소련 공산당이 상해에서 활동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지급한 기록입니다.

그리고이 자료가 드러나며 김구에 의해의 공금 횡령범으로 몰려 살해당한 독립운동과 김립의 누명이 풀립니다.

김립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소령 공산주의를 추정했지만 동시에 한인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했고 한인 신문을 발행했으며 나아가 상해 임정에서 국무원 비서장까지 맡아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1922년 2월 중국 상해에서 습격을 받아 피살됩니다.

시신에서는 무려 12발의 총상이 발견되었죠.

당시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을 맡고 있었던 김군은 그의 죽음에 대해 통쾌하다라고 했습니다.

국사 편참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김립을 죽인 건 다름 아닌 김구의 지시를 받았던 경무국의 비밀요원들이었습니다.

김구는 김립이 임시정부의 공금을 횡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련 정부가 무상원조 60만 금마루부를 제공했는데 그걸 김립이 횡령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구는 자신의 임시정부 상관이자 독립운동과 동지였던 김립에 대한 암사를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했던 김립은 공금 횡령범이라고 몰려 동지들에게 사살된 겁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김구의 주장을 반증하는 사료가 발굴되며 당시 김립의 동료들의 주장이 신빙성을 얻게 됩니다.

소위 모스크바 자금이라 불리던 60만 금마로블은 임시정부를 위한 공금으로 지급된게 아니라 소련이 상해파 한인 공산당을 위해 지급한 돈으로 처음부터 김구측이 요구할 돈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상의 임시 정보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활동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도 스스로 썼듯 한반도에서의 테러 행위를 중심으로 일제와 전쟁을 하려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승만처럼 국제 사회에 대한 외교와 정치로 독립을 쟁치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김립처럼 소로의 지원 아래 공산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데 김군은 김립이 공산당 자금을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횡령제를 뒤집어 씌우고 암사를 지시한 겁니다.

독립운동지이자 자신의 임시정보 상관인 사람에 대해서요.

백범 김구라는 인물의 성품과 행시를 잘 드러내는 또 다른 사례는 1946년 3월 우남 이승만과의 일하입니다.

이는 소령군 정보 첩보 보고서에 실려 있는 내용인데요.

앞서 언급했듯 상해 임시 정보에는 다양한 노선의 사람들이 독립이라는 공통 목적 하나를 가지고 모여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는 복잡한 개파갈등이 있었죠.

일자가 패망하고 드디어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한반도이시기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놓고 수많은 노선이 대립합니다.

당시 조선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격렬한 좌익 활동을 했던 한길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는 이승만의 대표적인 정적으로 이승만을 쫓아다니며 활동을 방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승만이 한 미국인에게 조선의 광상 권리를 팔아넘겼다는 거짓 선동을 했습니다.

이승만은이 근거없는 낭설에 기자 회견을 하며 반박했죠.

그런데 기자 회견 다음날이 낭설 때문에 김구와 이승만이 언쟁을 버립니다.

소련군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가 이승만을 찾아가 따져 물었고 이승만은 모르면 잠고 있으라며 반박합니다.

이에 언성이 높아졌고 이승만이 김구를 테러분자의 두목이라고 부르자 싸움이 벌어집니다.

김구가 이승만을 넘어뜨린 후 그 위에 올라앉아 폭행을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김구의 당신이는 이른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백범 김구의 이면은 한국 대중들에게 퍽 낯선 모습입니다.

그는 감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김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많은 위협을 이루었습니다.

일제에 맞서기 위해 힘써 갖고 여러 항일 운동을 주도했죠.

청년들에게 민족 의식을 교육해 그들을 독립운동가들로 키웠고 그들이 일본과의 도항전에 투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도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었죠.

한편 이러한 활동들에는 분명백한 그림자도 존재했습니다.

김구의 평소 성품과 행시를 유초해 볼 수 있는 앞서 언급된 사례들 말고도 한국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여러 존재합니다.

예컨데 한국 사학계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지만 김구가 지시한 소위 의거 내지는 거사로 인해 죄없는 민간인이 휘말린 일도 있었습니다.

백범일지에서도 스스로의 행위를 테러라고 규정한 김구에게 이러한 부처적 피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준군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찾아가 사과한 일이 있었는데요.

이를 이유로 안준생의 암살 사주를 하는 등 김구 자신의 정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실제로 일제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소련의 기록물을 봐도 김구는 무자비하고 부도덕하며 난폭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김구는 복잡한 인물입니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모순적이며 그렇기에 입체적인 인물이죠.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완벽한 성인도 완벽한 악인도 아닌 그저 인간이었던 겁니다.

그 경의 시대를 헤쳐 나가야만 했던 한 명의 인간 말입니다.

그리고 역사라는 건 이런 복잡한 사람 하나하나가 모여서 만들어 가기에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토론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런 역사를 이런 역사속 김구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나요?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실제로 살아갔던 김구라는 사람의 진짜 역사를 지워가고 있습니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지적한다고 해서 빛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김구의 문제점을 나아가 의거와 테러 그 사이에 있었던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한계를 지적한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편화되지는 않습니다.

그저 우리와 같은 한낮 인간이었던 그들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게 늘어날 뿐이죠.

그런데도 많은 한국인들은 제가 김구에 대한 이런 그림자를 지적한다고 해서 제가 민족의 경우 김구를 모욕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삶을 외국해서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 놓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저는 그의 삶을 모욕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진짜 김구를 만날 그리고 그를 있는 받아들일 용기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역사를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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