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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항상 불안을 느낄까? (카뮈 & 사르트르 실존주의)

충코의 철학 Chung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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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안녕하세요. 오늘은 국민대학교에서 최근에 강연했었던 내용을 40분 이내로 컴팩트하게 축약하여 올려봤습니다. '실존주의'를 주제로 다룬 제 책 '가장 젊은 날의 철학' 내용에서 조금 더 발전시킨 내용인데요. 자아에 대해서 다 함께 생각해 본다면 재밌는 토론이 될 것 같습니다. 후원계좌: 신한 110-419-383939 이*녕 채널에 가입하여 혜택을 누려보세요. (라이브 방송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UV9bHklegmYbdt091TNvjA/j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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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은 철학사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 중 하나로 평가를 받죠.

내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정말로 분명하다.

그건 맞는 거 같아요.

저도 동의를 하는데 근데 다만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게 그래서 도대체 뭐냐? 이런 질문은 우리를 다시 괴롭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뇌과학 쪽에서는 나라는 의식은 일종에 우리가 생존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진화를 통해 발전한 특정한 형태의 예측 시스템에 불과하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 컴퓨터 본체가 막 열심히 돌아가면서 생겨나는 어떤 정보가 투영돼서 무언가가 나타나듯이 내가 나로서 생각을 하면서 존재한다는 거는 그러한 현상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거 같아요.

불교 쪽에서도 사실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도 과거부터 많이 했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나라는 주제는 참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주제인데 저는 오늘은이 자아와 관련해서 이중성과 연기라는 주제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 가져왔습니다.

이 내용은 제가이 가장 젊은 날의 철학이라는 책을 썼을 때 북토크로 준비를 했었던 내용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 국민대학교에서도 한번이 내용으로 강연을 했었어요.

근데 이렇게 제 채널에도 한번 공개를 해서 보다 많은 분들이 보시게끔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PPT를 가져와 봤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길거리에다가 보면 자동차도 있고 건물도 있고 신호등도 있고 정말 많은 것들이 있죠.

그런데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다른 일반적인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건 무엇인가랑 상당히 다른 질문인 거 같아요.

저는 결국에이 나라는 주제에서 내가 가진 나의 그 이중성이라는 구조를 들여다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평생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계속 그 앞에서 달아날 것인가이 두 가지가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엄청나게 커다란 차이를 불러온다고 생각을 해서 그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이런 말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들은 적이 있어요.

수업을 하시는데 철학가 교수님이셨어요.

위선이 과연 나쁜 걸까요? 이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저는이 질문 자체가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당시에는 저는 위선이 당연히 굉장히 나쁜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위선자가 가장 싫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근데 위선이 나쁜 걸까요? 이렇게 질문을 던지시면서 그래도 위선을 떠는 사람들은 어쨌든 착한 행동이라도 하지 않냐?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착한 행동을 하지 않냐? 그리고 사실 사회라는게 사람들이 그렇게 착한 척을 하면서 실제로 좋은 일들도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냐.

그러니까 나는 그냥 위선 안 떨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위선이라도 착한 일이라도 하는 사람이 더 낫다고도 볼 수 있지 않냐라는 논지를 제기를 하셨어요.

뭐 이분이 무조건 위선자가 괜찮다 이렇게 주장을 하셨다기보단 어 이런 각도의 생각도 가능하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거죠.

그런데 제가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서 대학원에 다닐 때도 우연히 이런 글을 봤어요.

주디스 슈쿨라는 철학자가 있는데이 사람이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위선이 많을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이 철학자도 위선이 필요나치게 윤리적으로 나쁘다고 공격을 받는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슈클라의 논지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가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내놓은 견해들이 더 좋은 견해냐를 자유롭게 생각하는 그런 시스템인데 거기서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어쨌든 내가 선한 모습을 내비쳐야 되지 않느냐라는 거예요.

결국에는이 시스템이라는게 여러 사람들의 견해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거기서 선택을 받아서 누군가는 권력을 가져야 하는 그런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더 착하게 내비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거 가지고 너무 뭐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음 한편으로는 유튜브 콘텐츠나 다른 자기 개발서 같은 것들을 보면 진짜 자신을 아는 법 나를 정말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 수 있을까라는 콘텐츠도 끊임없이 나오는 거 같아요.

나의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정말로 본질적인 나, 정말로 진짜 내가 원하는 삶 그런 것을 찾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도 계속 제기가 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너무 아 진짜 내가 뭘까? 나는 정말 진실하게 살겠어.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떨 때는 어떤 척을함으로써 오히려 진짜 나라고 내가 생각하던 그런 모습과 약간 거리를 둔 다른 역할을 맡으면서 살아감으로써 내가 짓눌려서 소멸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여유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놀 땐 되게 재밌잖아요.

어린이들은 정말로 재밌게 놀죠.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은 그 놀이에 아주 열광을 해요.

스포츠를 보면서 열광하는게 대표적으로 놀이를 성인들도 좋아하는 사례인데요.

그런데 놀이에 되게 중요한 특징은 일차적인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실제로 맞닥뜨리는이 부담감이 있는 현실이 아니라 거기서 지든 이기든 어쨌든 그거는 진짜는 아닌 그런 2차적인 현실이라는 거죠.

일종의 시뮬레이션입니다.

놀이와 현실의 차이는 놀이는 현실의 모사라는 것이고 1차적 현실이 아닌 허구적인 2차적 현실이라는데 있습니다.

물론 놀이 또한 어떤 의미에선 당연히 현실이죠.

특히 스포츠 선수한테는 그 스포츠에서이기는게 정말로 중요한 가장 1차적인 현실입니다.

이 스포츠 선수 같은 경우는이 스포츠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주가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의 아주 전설적인 선수인 캐리아라는 분인데요.

이 장면은 이분이 결승전에서 굉장히 아깝게 패배하고 오를 하는 장면인데 아 저는이 장면을 보고 참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정말로 서럽게 오해를 하거든요.

아, 그래서 이걸 보면서 이분한테는 정말로이 경기에서이기는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구나.

정말 간절했구나라는 거를 제가 다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수 말고 우리한테는 그렇진 않죠.

지켜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실제 인생에서 내가 만약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실패를 겪는다 그러면 너무 힘들겠지만 내가 보는 스포츠 경기에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진다고 해서 그만큼의 좌절감을 보통은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라이벌 매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기만을 바라지는 않는 거 같아요.

만약에 내가 응원하는 팀이 맨날 이긴다면 그것도 재미가 없을 거예요.

오히려 가끔씩 지는데 그지는 것이 오히려이 2차적인 현실에서는 나한테 모중의 재미를 가져다 주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주장하고 싶은 거는 때로는 우리는이 삶도이 일차적인 현실도 게임처럼 2차적 현실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는 삶을 일차적인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너무 그런 생각만 갖고 살아가서는 안 되고 가끔씩은 아, 이것도 결국에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게임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철학적으로 깊게 풀기 위해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번 집중을 해 보고 싶습니다.

존재란 무엇일까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죠.

존재의 의미는 굉장히 다양해요.

물질적인 존재도 있고 비물질적인 존재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한 일종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있으려면 어쨌든 그 있음이 있는 거니까 존재를 하는 거니까 어 무한 일종의 존재다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이건 말이 안 되는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어도 그리고 정말로 물리주의를 강하게 믿는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물리적인 것밖에 없다라고 믿는 사람은 물질적 존재밖에 없다고 믿죠.

그런데 일상적으로 우리는 사실 비물질적인 것의 존재를 상당히 많이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이란 무엇일까? 대한민국은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 있는 그런 실체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과연 대한민국 국민을 다 합쳐다고 해서 대한민국 땅덩이를 다 합쳐는다고 해서 그게 대한민국일까? 그것 이상으로 대한민국이란 어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패턴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애초에 과연 이게 한 가지로 포섭이 돼서 다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되게 다양한데요.

그런데 그래도 저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뭐냐면 단일성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단일하게 묶일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A가 존재한다면 A는 세상에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며 내적으로는 통일되어 있는 단이란 것입니다.

펜이 하나 존재한다면이 펜은이 펜이 아닌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면서이 펜 내부적으로는 결속이 돼 있죠.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A가 B와 C로 쪼개져 있고 B와 C는 결코 단일하게 묶일 수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A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B와 C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그게 절대로 하나로 묶일 수 없다면 A가 존재하는게 아니겠죠.

예를 들어서 에스파는 존재를 합니다.

이 에스파라는 걸 그룹은 존재를 하는데이네 명의 멤버가 각각 계약 기간이 끝나서 해산이 돼 버리면 그리고 더 이상은 에스파라는 활동명으로 합쳐질 수가 없다면 그러면 그때부터는 에스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겠죠.

우리의 기억이나 과거의 자료로서는 존재하겠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게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분자가 존재한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물분자 역시 H2O 이렇게 세 개의 원자가 합쳐져 있어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까 우리는 물이 비로소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거지.

만약에 수소로 산소다로 이렇게 존재하고 절대 둘이 결합을 할 수가 없다면 우린 당연히 물이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지 않겠죠.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어떨까?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의식되는 나와 의식하는 나가 분열되어 있는 채로 존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니까 나라는 인간의 의식은 분명히 이것도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를 이루고 있어요.

단일성을 기으로 합니다.

나는 한 명의 인간이죠.

그런데 다른 모든 종류의 존재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되게 독특한 분열의 특징을이 의식은 갖고 있다라는 건데요.

그게 바로 의식되는 나와 의식하는 나 사이의 분열입니다.

그니까 나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걸 의식할 수 있잖아요.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합니다.

나는 재위적인 특징을 띄어요.

나 바깥으로 나가서 마치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나를 의식합니다.

그러면 벌써이 의식이란 현상에서는 두 개의 층위가 나눠져 버립니다.

나에 대해서 의식을 하고 있는 나와 그 의식의 대상이 되는 나라는 두 개의 대상이 서로 따로따로 존재한다는게 기본으로 전제로 깔려 있게 되죠.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의식의 단일성은 곧 이중성이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의식의 이중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의식하면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의식되는 나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야 그 존재의 입장에서 의식되는 나를 쳐다보면서 의식을 할 거 아니에요.

이런 의미에서 나로서 존재한다라는 감각은 언제나 분열과 불안정성을 포함합니다.

내가 아무리 나라는 통일된 것으로서 존재하고 싶어도 나는 이미 그럴 수가 없어요.

나로서 존재하려고 내가 의식을 갖는 순간 이미 나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려야만 합니다.

계속해서 나는 아무리 나와 합쳐지고 싶어도 계속해서 나와 멀어지면서 분열을 해 버리는 그런 불안정한 구조를 품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과 동물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지 않나 싶어요.

물론 요즘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생각도 많이 달라져서 과연 일방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는 저도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인간에 비해서 다른 동물들이 훨씬 더 이런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기 자신과 매순간 달라진다라는 불안정성을 내포하면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 거 같아요.

고양이가 한 마리가 존재한다.

그러면 저는 가끔씩 동물들이 되게 부러울 때가 있거든요.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도 있고 꼭 그렇게 되게 물리적으로 좋은 환경에 있는 그 반려 동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동물들은 참 아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나, 내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되나, 나로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봐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 존재들은 그저 현재 완전히 통합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자신과 멀어진 상태에서 자신을 쳐다봐야 한다는 그런 수고로운 의식의 활동으로 내몰려 있지 않아요.

반면에 인간으로서의 나는 이중적인 존재이며 부정에 기초합니다.

부정에 기초한다는 건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만 나일 수 있다라는 뜻인데요.

만약에 내가 완전히 나와 똑같은 동일하기만 한 그런 존재라면 역설적으로 나는 나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나로서 의식을 갖고 존재한다는 건 내가 아닌 나로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계속 나의 부정이 돼 버리기 때문에 나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이 부정성 저는이 부정성을 빈틈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요.

의식되는 나와 의식하는 나 사이에 있는 그 다름의 틈은 선택을 나에게 강요합니다.

자의식이 없는 존재는 선택을 내리지를 않아요.

그냥 그 순간에 주어져 있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가 아니에요.

그리고 어딘가에 완전히 존재하고 있는 순수한 정신도 아닙니다.

나는 매순간 아직 내가 아닌 그런 나로서 존재하고 어떤 선택이든 내려서이 현재를 채워 나감으로써 그 미래에 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으로부터 1한시간이라는 시간이 있다라고 한다면 그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해야 해요.

제가 한시간 후에도 계속해서 저로 존재하고 있으려면 그 시간을 저의 선택으로 채워 넣음으로써 그 한시간 후에 있을 나와 지금 아직 그 내가 아닌 현재 나 사이의 존재를 메워야만 합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어 그냥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이 채워지던데 그냥 지나가던데 나는 아무런 생 선택도 내리지 않았는데라고 생각을 하실 수도 있지만 그거는 역설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나로서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게 정말로 내가 나로서 나를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거는 아니라는 거죠.

내가 나를 의식하고 나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순간 나는 아직 미래에 채워져 있지 않은 나를 향해서 그 사이의 시간을 채워 나가야 한다는 그 선택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실조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가장 유명한 말을 남겼죠.

이게 사르트의 가장 유명한 명언으로 받아들여시는데 저는 이걸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맥락과 관련해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행위에 앞선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어떤 행위를 통해서 아직 완성되 있지 않은 미래에 나를 향해서 나아가야 되고 그러기 전까지 나는 비어 있다는 거죠.

어떤 나의 본질이라는게 이미 안정적으로 있어서 계속해서 나라는게 쭉 유지되는게 아닙니다.

나는 매 순간 다음 순간을 위해서 행위를 하면서 계속 나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함으로써 특정한 시점에 나를 완성한다고 해서 그게 과연 완결적인 내가 될까? 전혀 아니죠.

그 시점은 바로 다음 시점에 의해서 부정됩니다.

나는 또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행위를함으로써 그다음에 내가 되겠죠.

이 이 과정은 내가 죽음을 마주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대풀이 될 겁니다.

사르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사랑의 행위로부터 동떨어진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끔씩 그렇게 생각하곤 하잖아요.

아, 나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데 아, 좀 사랑의 행위를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든지 아니면은 좀 부끄럽다든지 그래서 행위를 안 하는 것일 뿐이야.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죠.

그게 아예 불가능하다는게 아니라 사르은 이렇게 좀 문학적으로 표현을 했어요.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이 이미 완성대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해 나가는 그 과정 그것 자체가 곧 사랑을 이루고 있다.

인간의 사랑은 어디 추상적인 형태로 머릿속에 있고 그런게 아니라 내가이 세계 속에서 실질적인 행위들을 선택해 나감으로써 미래에 나를 만들어 나가는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이런 사르틀의 생각을 이어받아서 척하는 인간은 곧 그런 인간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어요.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는 본질에 앞선다는 건데요.

제가 성식경 님의 영상을 보는데 그 하정우 배우님을 보면서 그런 말 하더라고요.

아 너무 꼴 보기 싫어.

나 그 새끼 죽이고 싶었는데 진짜 그러는 거예요.

그 추격자라는 영화 혹시 보셨습니까? 거기서 하종우 님이 진짜로 짜증나는 살인마을 연기하거든요.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연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너무나 짜증나는 어떤 사람의 형태가 구현이 된 거죠.

연기의 특징은 누가 연기해도 그 인물이 된다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쉐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한다면 그 햄릿이라는 인물은 미리 결정되 있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는 하정우만 햄릿을 할 수 있어.

이런게 결정돼 있는게 아니죠.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곧 그 인물이 됩니다.

햄릿이라는 인물은 물론 대본상으로는 어떤 특성들이 채워져 있지만 그것만으로 완결되어 있지는 않고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비어 있고 그 인무를 어떤 배우든지 연기를 해서 채울 수가 있고 그렇게 채웠을 때 비로소 햄릿이라는 인물은 실제 그의 인물로서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배우든지간에 햄릿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가 햄릿을 연기하기만 하면 햄릿으로 존재하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게 단지 연극에서만 받아들여질 만한 말이 아니라이 현실,이 일차적인 삶에서도 그렇게 충분히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봐요.

과연 나라는 인간은 어떤 인물일까? 지금의 나는 정해져 있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궤적 그리고 내가 지금 갖고 있는이 물리적인 형태 그것에 의해서 내가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나는 조금도 결정이 돼 있지 않아요.

내가 만약에 지금까지의 나와 전혀 다른 임무를 나는 잠시 후에 연기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정말로 그렇게 행동을 한다면 그런 선택을 내린다면 나는 그 인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비록 사람들은 나의 이름을 그대로 부를 것이고 이전까지의 나의 행적을 바탕으로 나를 그대로 평가하고 있을 테지만 어쨌든 미래의 나라는 인물의 형태는 내가 어떤 연기를 하느냐, 어떤 배역을 맞기로 내가 결정하느냐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변화할 수가 있어요.

우리의 자아의 이중성이 가진 빈틈은 불안과 불안정성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자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항상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선택을 내리면서 시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것에 부담을 느끼고 많은 경우에 사실 사람들은 그 부담을 피해서이 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가지만 사실 나는 어떤 배역을 막기로 어떤 행동을 할지로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림을 통해서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 카메라를 부을 수도 있어요.

이 펜을 부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는 것일 뿐이죠.

그냥 그동안 그러지 않아 왔기도 하고 또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요.

별로 제가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분명히 그럴 수 있는 자유를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있다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는 정말로 커다란 차이를 가져요.

우리는 평상시에 우리의 자유의 공간을 생각보다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 중에 하나는 우리의 사회가 사람들이 지나친 불안을 느끼지 않고 멀쩡히 잘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들을 그동안 발전을 시켜 왔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의식을 갖게 된 이래로 아마 인간은 계속해서 불안에 시달렸을 거예요.

조금만 생각을 하다 보면 아, 내가 과연 뭘 해야 되지?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이런 고민이 들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을 굳이 내리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시간이 채워지게끔 여러 가지 활동들을 마련해 놨다고 보거든요.

술이라는게 대표적인 방편이라고 보고 담배도 그렇고 또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하는 여러 가지 놀이들 뭐 스포츠 예능 각종 콘텐츠 그런 것들이 다 우리가 굳이 선택을 내리지 않아도 굳이 우리의 자유를 발휘하지 않아도 멀쩡이 잘 살아가기끔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 보니까 자유를 인식하는 거는 정말 쉽지 않아요.

그리고 어 그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충동도 저는 이것과 연관될 수 있다고 보는데요.

프로이트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근본적인 충동을 가진 거 같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되게 어 의외죠.

왜냐면 아 당연히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계속 살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라는게 당연한 생각일 수 있는데 근데 프로이트는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의지 혹은 번식하려고 하는 의지 나의 자를 퍼뜨리려고 하는 그런 의지만으로는 좀 인간의 삶을 충분히 인간의 심리를 충분히 면밀하게 설명할 수 없는 거 같다.

거기에다가 플러스 오히려 죽으려고 하는 충동, 해체되고 싶어 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격화되고 싶어 하는 그런 충동 그런 것을 인간이 근본적으로 품고 있다라고 봐야 인간 심리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 같다라고 봤거든요.

프로이트는 이런 죽음 충동이 이전 상태를 회복하려고 하는 힘이다라고 봤습니다.

뭐냐면 우리는 유기체잖아요.

그런데 유기체 이전 상태는 아마 무기물이었겠죠.

그러면 유기물이 무기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어떤 의지.

지금은 잠깐 힘이 응축되어서 하나의 통일된 상태를 이루고 있지만 결국에는 해체되어서 사라져 버리고자 하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충동을 유기물은 가장 근본적으로 품고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했던 거죠.

이거는 요즘에 들어서 엔트로피와 관련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명체란 무엇이냐? 해체를 지향하면 역설적으로 생명력을 회복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게 생명체라는 겁니다.

어쩌다 보니까이 세상에 여러 가지 물질들이 조합이 되다 보니까 해체를 하고 싶어 하는데 그 해체를 하고 싶어 하는 충동을 발현시키면 역설적으로 오히려 계속해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생명으로서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그런 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건데요.

그니까 예를 들어서 인간은 졸리면 자잖아요.

그런데 졸리면 잔다는 거는 잠시나마 내가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어 하는 그런 충동의 발현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내가 사라져 버리면 오히려 내가 원기를 회복한 다음에 다시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푼다라고 말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

나를 그냥 막 발산시켜 버리고 내가 원래 평상시에 유지하고 있었던 품이 그런 거를 다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나를 완전히 놔 버리는 그런 행동을 하면 스트레스가 탁 풀려 가지고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 것들도 일종의 이런 해체를 지행할 때 역설적으로 생명 활동을 이어가게 되는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마찬가지의 도식이 우리의 자아가 빈틈을 마주했을 때도 벌어진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빈틈의 기초에서 행위하는 결과 우리 자신을 빈틈 없는 행위의 연속으로 밀어넣습니다.

무슨 소리냐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내 앞에 어떤 빈틈이 있다라는 거를 완전히 지성적으로 의식하는 건 아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마주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야 한다라는 거를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걸.

근데 사회로부터 이미 편하게 제공되어 있는 각종 선택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선택지들 중 하나를 택해서 당장 어떤 행위를 그냥 해 버리면 그 빈틈이 일시적으로 메워진다는 거죠.

그렇게 빈틈을 채워 버리면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서 나를 바라봐야 한다라는 그런 수고로운 정신의 활동과 부담, 불안정성 이런 것이 일시적으로 없어지고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 버리다 보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게 아닐까? 계속 나에게 사실은 전혀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자유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선택지들을 택하면서 매번 살아가는게 아닐까라는 거죠.

그래서이 이중성을 꼭 인지해야 한다고 저는 봐요.

사실 삶의 대부분 순간에는 이중성을 인지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사회가 명한 대로 매번 비슷한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결국에 인간이란 나를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고 그래서 결국의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는 어 나는 아직 내가 아닌데 나와 다른 나의 가능성이 사실은 미래의 시점에 있는데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인지하는 순간이 분명히 오거든요.

그런 순간은 부담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냥 그 부담이 싫어서 도피해 버리면서 쉬운 행동들을 즉각적으로 선택해 버린다면 만약에 그렇게 살아서 평생 행복하다라고 하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고 무언가 정체모를 불행감을 계속 느끼는데 그냥 이전과 같은 선택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 버릴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에 어차피 우리는 살다 보면 내 안에 빈틈을 마주하게 되니 사실 그 빈틈이 당장 내가 손쉽게 메워 버리고 끝내야 할 그런 대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절대로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고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상 항상 있는 그런 이중성이라는 거를 조금 더 철저하게 생각을 한다면 훨씬 더 우리가 나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선택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말씀을 제 입장에서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말씀을 드렸다면 어 지금부터는 까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이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까미의 전락이라는 소설을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주아하거든요.

이 소설이 저는 이중성의 보복을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중성이 되게 중요한 주제로이 책에 등장을 해서 제가 되게 애정을 하거든요.

이 이 전락의 주인공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어떤 한 바에서 어떤 인무를 마주칩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계속 자기 이야기를 해요.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 마주친 인물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풉니다.

그게이 소설 내용의 전부 다해요.

그 주인공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인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계속 그 마주앉진 사람이 말하는 장면만 나옵니다.

그 사람은 원래 프랑스 빠리에서 살았다고 해요.

빠리에서 굉장히 촉망받고 존경받는 변호사였습니다.

변호사도 그냥 변호사가 아니라 고화 사건이라든지 아니면 남편과 사별한 사람들의 사건이라든지 이런 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건을 전문으로 맡아서 변호를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정부에서도 야, 좋은 일 한다 그러면서 훈장을 주려고 하는데 그 거기에 대해서도 아이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인걸요.

그런 식으로 거절하고 그런 되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에요.

심지어 잘생기고 몸도 좋아요.

그래서 여성들한테 인기도 많고 막 여러들도 많이 만나고 그러면서 아주 그냥 나는 내 삶이 너무 좋은 거 같아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이 사람이 어느 날 새벽에 다리를 지나가다가 강 다리를 지나가다가 어떤 여성을 지나쳐요.

이렇게 여성을 딱 걸어오면서 쓱 지나쳐서 이렇게 걸어갑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뒤에서 꺄하는 여성의 소리가 들리더니 풍덩 하는 소리가 난 거예요.

아마 물에 누군가가 빠진 거 같은 그런 소리가.

근데 그때이 인물은 고민을 합니다.

도와줘야 되나? 근데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해요.

아 늦었을 거야.

이미 늦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밝기를 제촉해서 집에 가거든요.

굉장히 당혹스럽겠죠.

과연 내가 그 순간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갈 것인가? 근데 거기서 그냥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집으로 왔단 말이에요.

그 이후로이 변호사는 신문을 한 번도 보지 못해요.

혹시나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그 여자가 이렇게 죽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봐.

그리고 그 이후로 어떤 정체모를 웃음 소리가 자꾸만 자기한테 들리기 시작해요.

신경이 굉장히 과민해지고 그 웃음 소리 때문에 점점 재정신을 잃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어쩌면 나는 그리 훌륭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의 삶이 너무 완벽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남들 위해 군림하는 것이 즐거워 남들이 우러 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훌륭한 배우로서 살았을 뿐이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실제로 내가 나의 본질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게 아니라 그저 특정한 역할이 마음에 들어서 그 역할이 가져다 주는 우월감이 좋아서 그저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살았을 뿐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계속 하게 된 거죠.

이 인물은 자신의 삶을 역할극으로 점점점 바라보게 돼요.

역할극에는 특유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역할과 역할을 수행하는 자가 다르다는 거죠.

그 역할을 누군가가 수행하고 있는데 그 누군가가 바로 곧 그 역할과 동일한 건 아니죠.

이 변호사가 좋은 선한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나는 사실은 그런 존재는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드니까이 둘 사이의 괴리 때문에 점점점 심리적인 고통을 받거든요.

그런데 어 되게 흥미롭게도 아 그래 나는 진짜 연기를 하는 거야.

나는 사실 그동안 연기를 했던 거야.

이런 연기의 이중성을 철저히 인정하자 웃음 소리가 사라집니다.

저는 과연 왜 자신의 연기의 이중성을 인정했을 때 웃음 소리가 사라졌을까? 그리고 왜 까미는 여기서 웃음 소리가 자꾸 들린다라는 설정을 했을까? 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제가 내린 한 가지 해석은 일단 연기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영어로는 플레이라는 말이 연극이란 뜻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놀이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그 놀이라는 뜻을 연극이라는 뜻과 같이 갖는 단어가 흥미롭게도 영어에는 플레이라는 단어예요.

연극과 놀이의 공통점은 1차적 현실이 아닌 허구라는 것이죠.

그런데이 주회라는 단어가 프랑스어에는 있거든요.

그리고 까미가 연극을 이야기하면서 썼던 단어는 바로이 주회라는 단어입니다.

주회는 영어의 플레이어와 굉장히 흡사한데 다만 연극이라는 뜻, 놀이라는 뜻, 거기에다가 농담이라는 뜻까지 들어가 있는 단어입니다.

이게 라틴어의 요코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이고 어 영어의 조크와 같은 어을 갖는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프랑스 쪽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연극과 놀이는 조크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 이 조크의 특징은 한 발짝 떨어져서 유할 수 있는 가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내가 너무나 이것이 현실인 나머지 진지하게 발담고 있으면서 그것의 영향을 완전히 다 흡수해 버려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한 발짝 떨어져서 충분히 가볍게도 볼 수 있는게 곧 조크이고 연극이라는 거죠.

저는이 소설에서 그 웃음 소리는 연극, 놀이, 농담이 던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이 웃음소리가 사라진 건 삶 자체가 연극이 되었기 때문에 희석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니까 어이 사람이 무슨 재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정신병적인 웃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것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오히려이 세상의 진실은 사실은 웃음소리인데 즉이 세상이라는 거는 사실 무조건 진지하게만 받아들여야 할 그런 1차적인 현실이 아니라 이미 2차적인 현실로서 조크로서 연극으로서 구성되어 있는게이 현실인데 평상시에 우리는 어떻게든 그 조크의 웃음소리를 차단한 채로 현실을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각종 정신적인 벽을 쌓아놓고 살아가다가이 변호사 인물 같은 경우에는 어떤 계기로 인해 가지고 그 벽에 약간 금이 가고 그래서 진지함, 진실함 이런 것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차원에이 세상에 훨씬 더 그것보다 진실된 웃음 소리가 침투해 들어왔던게 아닐까? 그리고 웃음소리가 사라진 건 일종의 나의 환상으로 구성된 그 현실, 진실한 현실이라는 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웃음소리가 가득한이 연극으로서의 현실, 농담으로서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우리가 공기가 가득한 곳에서는 공기가 있다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웃음 소리가 가득한 곳에 가게 된 그 인물은 더 이상 웃음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역할과 역할을 연기하는 사람 사이에 놓인 이중성은 우리가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구성해 놓은 현실 속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이지만 연기의 바다 속에서는 오히려 편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이 연기라는 말이 한국어에서는 공교롭게도 스모크라는 뜻이 있더라고요.

공기 중에서 날리는 것.

근데 어이 전락이라는 소설에서 되게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이 인물이 빠리를 벗어나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가거든요.

근데 암스테르담이 그 북회 연안의 도시들은 유럽의 도시들은 1년에 한 절반 정도는 굉장히 흐리고 우중합니다.

특히 겨울에는 굉장히 흐리고 안개도 많이 끼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 도시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바다를 항해에 나아가는 그런 장면이 등장을 해요.

저는 그 암스테르답이라는 공간이 이렇게 어 웃음소리의 연기가 가득 차 버린 연기의 이중성으로 가득찬 본질적으로 불투명한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플레이라는 개념과 반복 가능성의 연결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플레이라는 단어를 언제 사용하냐를 제가 좀 곰고멍이 생각해 봤더니 반복 재생 가능한 것에 대해서 플레이를 많이 사용하더라고요.

우리가 MP3 플레이어나 뭐 핸드폰에서 음악을 플레이한다라고 말을 하잖아요.

그것도 이미 녹음되어 있는 노래가 버튼만 누르면 흘러나온다라는 의미와 많이 연결이 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축구를 플레이한다.

농구를 플레이한다라고 말할 때도 매는 물론 다 다른 경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똑같은 규칙이 적용되고 똑같은 시작과 똑같은 끝을 갖잖아요.

항상 같은 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반복하는 거죠.

그리고 연극 같은 경우도 쓰여 있는 대본을 그대로 매번하는 거잖아요.

이런 점에서 차관해 봤을 때 우리는 어떤 놀이, 어떤 행동, 어떤 연기, 어떤 플레이를 우리 삶에서 하게 되는데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매번 그런 것을 하고 살아가게 되는데 다만 과연 내가 충분히 지금 내가이 순간에 어떤 것을 플레이한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플레이하느냐 그거는 아닌 거 같아요.

매번 반복적으로 자동적으로 똑같은 것을 플레이하게 되곤 하거든요.

그 똑같이 매일 어떤 행동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잖아요.

사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죠.

저는 다 그렇고 이게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매번 똑같이 반복하는 습성이 있고 그리고이 인간 정신의 반복적인 특징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가 트라우마입니다.

트라우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에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되살아나죠.

똑같이.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하는 습관이든 어떤 트라우마든 저는 결국에는 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매순간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는 없고 결국에는 내 앞에 놓여져 있는 너무나 뿌리깊은 그 틈을 어떤 방식으로도 메워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사람마다 다른 특정한 전략을 통해서 매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나? 항상 내가 매순간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간다면 그거는 너무 힘들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우리 삶을 자동화시켜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요.

하지만 때로는 그러지 않을 자유를 가졌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반복하는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만 가끔씩은 어떤 삶에서 중요한 순간에는 나는 더 이상 그러지 않고 다른 배역을 플레이할 수 있는 다른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가졌다는 거죠.

나로서 살아간다는 건 저는 이런 자유를 가진 채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제가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고요.

이 내용은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처음에 가장 젊은 날의 철학을 출간하고 북토크를 구성하면서 한번 짜봤던 내용이고요.

그래서이 책에 나온 많은 내용들과 연관이 되니까 어이 영상을 인상 있게 보셨다면 한번 꼭이 책도 읽어 보신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저는 또 다음에 재밌는 영상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정리

영상 정리

1.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철학적 진리죠.

2. 하지만 나는 무엇인지, 존재란 무엇인지 질문이 계속돼요.

3. 뇌과학은 의식을 예측 시스템의 결과로 봐요.

4. 불교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5. 오늘은 자아와 이중성, 연기라는 주제를 이야기할게요.

6.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다르죠.

7. 나라는 주제는 이중성과 인식의 차이로 큰 차이를 만듭니다.

8. 대학 때 교수님이 위선이 나쁜가 묻던 게 충격이었어요.

9. 위선이 착한 행동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고 하셨죠.

10. 또, 슈쿨은 자유민주주의는 위선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어요.

11. 시스템은 더 좋은 평가를 위해 착한 척을 강요하니까요.

12. 요즘은 자신을 아는 법, 본질 찾기 콘텐츠가 많아졌어요.

13. 저는 오히려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봐요.

14. 놀이나 스포츠처럼 삶도 일종의 2차적 현실, 게임 같다고 생각해요.

15. 스포츠에서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게 더 재미있을 때도 있죠.

16. 삶도 때로는 게임처럼 2차적 현실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17. 존재란 무엇일까? 물질과 비물질, 무한 존재까지 다양하죠.

18. 우리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할 때 단일성을 기대하죠.

19. 예를 들어, 펜이나 물분자도 내부가 통일돼 있어요.

20. 인간의 의식은 사르트르처럼 분열돼 있어요.

21. 의식에는 의식하는 나와 의식되는 나가 있어요.

22. 이중성은 불안과 동시에 자유의 공간이기도 해요.

23. 나는 계속 나와 멀어지고 부정하며 존재하죠.

24. 동물은 이중성을 덜 느끼는 것 같아요.

25. 인간은 부정과 불안 속에서 존재하는 게 본질이에요.

26. 부정성은 선택의 틈,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27.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가요.

28. 사르트르는 행위가 곧 존재라고 했어요.

29.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계속 행하는 거죠.

30. 사랑도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어요.

31. 연기와 역할은 본질보다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32. 배우가 인물을 연기하듯, 우리도 역할을 연기할 수 있어요.

33. 미래의 나도 지금의 선택으로 바뀔 수 있죠.

34. 이중성은 불안하지만 자유이기도 해요.

35. 우리는 늘 선택의 자유를 잊지 말아야 해요.

36. 삶의 대부분은 반복과 습관, 트라우마에 묶여 있어요.

37. 하지만 자유의 가능성도 항상 존재해요.

38. 중요한 순간에는 다른 배역을 연기할 수도 있죠.

39. 나라는 존재는 자유를 가진 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40. 오늘 이야기한 내용은 젊은 날의 철학 책과 연관돼 있어요.

41. 책을 읽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42. 다음 영상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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