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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5000년 정리, 구석기부터 신석기까지 핵심 비법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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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갈아 만든 5000년 한국사 한번에 다보기 (3시간 순삭ver.)

로빈의 역사 기록 / Robin's Historical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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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갈아 만든 5000년 한국사 한번에 다보기 (3시간 순삭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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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후 여러분은 단군부터 시작된 5천년 한국사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로빈의 기록을 [음악] 시작합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구석 기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입니다이 시기의 사람들은 서기와 뼈 도구를 사용하였는데 서기는 구석기 시대 처음 만들어져 짐승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석기 시대 초기에는 찌개와 주먹도끼 등이 등장하였고 한계의 섞기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석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석기의 크기가 작아졌습니다 구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면서 돌날 돌이 제작되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찌르는 후기구석기 에 나타난 서기로 카리나 호미 등의 자료에 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인 배를 자료에 연결하여 창 끝이나 화살촉 등의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살던 구석기인들은 먹을 것을 찾아 무리를 지어 이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 그늘 또는 강가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평상 검은모루 동굴 충남공주 석장리 경기연 전 공리가 대표적인 유적지인 평남 덕전 승리산 동굴과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 등에서는 화석 인골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1983년 충북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구석기 시대 5세에서 6세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 흥수 아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흥수 아이를 처음 발굴할 때 국화꽃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구석기 시대의 장애 풍습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후기 구석기 집 자리는 대략 세네 명에서 명 정도 살았을 크기이며 기둥 자리 담자리 및 불된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구석기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 사회였고 경험이 많은 자나 연장자가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구석기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기온이 상승하면서 다양한 동식물이 출연하였는데 토끼 여우 새등 작고 빠른 짐승들이 늘어났고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 석기를 작게 만들어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작게 만든 잔 석기는 나무나 뼈에 꽂아 이음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기원전 8천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와 용도를 가진 간석기를 사용하였고 곡물의 저장과 조리를 위해 토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신석기인들은 주로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움집은 네다섯 명 정도의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로 바닥 모양은 원형 또는 모서리가 둥근 방이었습니다 움집의 중앙에는 취사나 난방용 화덕이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는 서울 암사동 경남김해 등 한반도 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강가나 바닷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925년 한강에 일어난 대홍수로 인해 암사동 유적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지금까지 20여 집터가 발견되고 빗살무늬 토기 등이 출토되면서 암사동 적은 한국의 신 시대를 표하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신석기인들은 공물을 경작하고 재배하는 농경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예로 황해 봉산 지탑리 등지에서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신석기인들이 잡곡류를 경작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돌갱이 돌삽 등의 간석기 동물의 뼈나 뿔로 제작한 농기구를 이용하였고 농경 외에도 짐승을 키우는 목축 생활을 하였습니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사냥과 채집 물고기 잡이는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활과 창으로 사냥을 하고 그물과 작살 뼈로 만든 낚시도구 등을 이용하여 물고기 잡이도 하였습니다 신석기인들은 가락 바퀴나 뼈 바늘을 이용하여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습니다 가락 바퀴는 중앙의 구멍에 축이 될 긴 막대를 끼워넣고 그 축을 돌리는 방법으로을 뽑았던 도구입니다 뼈 바늘은 짐승의 뼈로 만든 바늘로 의류의 가공이나 수선 등에 사용되었던 도구인데 우리는이를 통해 신석기 시대에 원시적 수공업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 시기의 사람들은 흙을 비저 만든 가면이나 조개껍데기 예술품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칠해 거리 등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신석기인들은 원시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태양 물 등의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에 정령이 있다고 믿고이를 숭배하는 애니미즘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무당과 그 주술을 믿고 숭배하는 샤머니즘 특정 동식물을 부족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숭배하는 토테미즘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기원전 2천년 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 청동기 문화가 보급되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점 농 생산력이 커지며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였고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며 정복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청동기는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 거울 등 주로 무기와 재기 장식품에 사용되었고 농기구는 주로 석기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반달 돌칼 등과 같이 더욱 발전된 석기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미송리식 토기나 민무늬 토기에 곡식을 저장하였습니다 농업은 조 피 보리 수수 등 반농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수지에서는 벼농사가 행해졌습니다 또한 청동기 시대에는 주로 강을 끼고 있는 나지막한 산이나 구릉지대에 주거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집터 유적은 주로 배산 임수의 형태를 보였고 집터의 모양은 대체로 사각형과 원형이 많았습니다 이때 마을의 규모 역시 커졌는데이는 인구 증가로 정착 생활의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개인간의 빈부격차와 계급의 분화가 일어났습니다이는 죽은 뒤에도 영향을 미쳐 죽은 이의 무덤의 크기와 거리에 반영되었습니다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족은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여 주변을 정복하였습니다이 과정에서 등장한 지배자를 군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치와 제사를 관 하늘의 자손을 자처하면서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으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이이를 통해 군장이 소유한 부와 권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임을 표방하는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기시대 람들은 고기이 성공 기원하면서 바위 그림을 그렸는데 울산울주 대곡리 반구대 바위 그림에는 고래와 사슴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고 경북고령 장기리 바위 그림에는 동심원 등의 기하학 무늬가 남아 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 경입니다 처음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되었지만 점차 철기가 확산되면서 청동기는 주로 재사용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이시기 한반도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새형 동검과 잔무늬 거울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독자적인 청동기 제작은 그 틀인 거푸집에 존재로 알 수 있습니다 철기는 청동기에 비해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단단하고 날카로워 쓰임새가 많았습니다 굉이 낮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났으며 농사가 발달하고 목축이 성행하며 인구도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창 칼 등의 철제 무기를 사용하면서 부족간의 전쟁도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계층 분화가 가속화되면서 부여 고구려 사만 등 연맹 왕국이 등장하였습니다 철기 시대에는 청동기 시대의 민 이외에 입술 부분에 덧띠 붙인 덧띠 토기 검은 간 토기 등도 사용되었습니다 무덤 양식으로는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나무 널에 넣어 매장한 무덤과 두 개의 항아리를이어서 만든 독무덤 등이 만들어졌습니다이시기 유물로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 중국의 화폐가 출토되었는데이는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또한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붓을 통하여 한자의 전래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가 사용됨에 따라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 서북부 지방의 부족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군장이 출연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한 군장이 주변에 여러 부족 사회를 통합하여 점차 집의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등장하였습니다 고려 충렬왕 7년인 1281년 승려 이년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단군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신단수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라 하였다 그는 풍백 우사 사로 하여금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다섯 가지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로써 인간 세상을 교화시키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였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함 웅은 쑥과 마늘을 주고 이을 으면서 빛을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곰은 금기를 지켜 21일 만에 여자로 태어났고 환웅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이가 곧 단군 왕검이 환인의 아들이 환이라 부분에서 고조선의 지배층이 하늘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선민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풍백 우사 사의 존재는 고조선이 농경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였다 해서 홍익인간의 건구 기념을 살펴볼 수 있고 곰과 호랑의 이야기에서 두 동물을 각각 수호신으로 삼은 토착 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곰이 환웅과 혼인한 내용을 보면 부족간의 연합에서 호랑이 부족이 배제되고 환 부족과 곰부족 음을 수 있으며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과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왕검이 합쳐진 단군왕검을 통해 고조선이 제정일치의 국가였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오닝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화 범위는 청동기 시대의 특징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의 범위를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세경의 고조선은 지배자를 왕이라 칭하며 중국의 연과 겨를만큼 강한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초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아 서쪽의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왕검 성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부왕 준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며 정치 조직이 안정되었고 왕권을 습하 건국 이야기에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 해당하는 관직은 농사와 형벌 등을 관리하였습니다 이후 국가가 발전하면서 왕 밑에는 비왕 상 경 대부 대신 장군 박사라는 관직을 두었습니다 한편 여러 관직 중에서 상은 왕 밑에서 국물을 관장하던 직책으로 신분이 높은 귀족이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은 왕과 함께 국가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회 참여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영역과 주민이 있었습니다 고조선에 범금 팔조 아고 불리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8조의 법이 있었는데 현재 아래에 세 가지 조항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게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를 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게 한다 중국 한서를 살펴보면 고조선 사회는 계급 사회였고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존중하며 사유재산의 개념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진한 교체에는 위만이 중국 연에서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고조선의 준은 만에게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겼지만이 위은 력을 키워 194년 준을 몰아내고 보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위만조선은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철제 무게를 이용하여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철제 농구를 사용하면서 농업이 발달하였고 한반도 남부의 진과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성장하였으며 진과임을 시키며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고조선이 강성해져 중계 무역을 통해 이득을 독점하고 흉노와 연결하여 한을 압박하자 한무제는 대군을 보내 고조선을 공격하였습니다 우왕이 다스리던 고조선은 폐수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1년 동안 완강이 한의 군현을 설치하였습니다 한 군현을 엄격한 법을 만들어 토착민을 통제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법 조항이 60여 조로 늘어났고 풍속도 각박해 있습니다 한 구현은 시간이 흐르며 토착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이후 세력이 점차 약화되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추출되었습니다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해 사만 등 여러 나라가 등장하였습니다 부연은 만주 승화 유역의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잡아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였고 부족이 연합한 연맹왕국 형태로 성장하였습니다 중국 군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활발하게 교류하던 부연은 남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족 접하고 있었습니다 왕 아래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리었고 사출라인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렸습니다 각기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를 두었고 홍수나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 그 책임을 물어 왕을 폐위시키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습니다 부연은 지배층인 대가 호민과 피 지배층인 하호 노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부연은 고조선만큼이나 을 시행하 살인한 사람은 사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를 배상하는 일책 법이 있었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부여에는 왕이 죽으면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 그리고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사수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부은 농경과 목이 발달한 반농반목 생활을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과 주옥 모피 등이 있었습니다 부여에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소를 죽여 발굽이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우제 전법이 있었습니다 또한 12월에는 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 농사의 풍요와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였습니다 부연은 1세기 초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 이렇게 독자적인 사회문화를 이어가던 부연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입으로 쇠퇴하였고 마침내 5세기 말 고구려에 흡수 당하며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부연은 만주 지역에서 발달한 나라였지만 고려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함경도 동해 지방에서 일어난 옥 부 동해안에 위치한 동해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 이들은 부여 고구려와 달리 왕이 없었고 읍군 로라 불리는 군장이 자기 부족을 다스리는 군장 국가였습니다 옥은 토지가 혹하여 농경이 발달하였고 어과 소금 등 해산물이 하였습니다 옥는 어린 여자아이를 남자의 집에서 키우다가 성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아내로 맞이하는 자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해장을 한 뒤 뼈만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나무 덧에 넣어두고 입구에 쌀을 담은 질그릇을 매달았습니다 동인들은 철자형 여자형 집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동해 역시 토지가 혹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다 과하마 반어피의 특산물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반피는 바다표범 을 말하고 과하는 말을 타고 과일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키가 작은 말을 뜻합니다 동해에서도 10월에 무천이라는 재천 행사를 열었고 산천의 경계와 부족의 독립적 성격을 중요시하여 마을끼리 함부로 침입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침범하면 노비나 소 말로 배상하게 하는 화의 풍습이 있었으며 공동체적인 질서를 중시해 같은 동족끼리 혼인하지 않는 조개 혼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옥저와 동해는 나름대로의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고구려와 낭랑 이게 압박을 받았고 동해 안에 치우친 지리적 여건 등을 이유로 선진 문물 수용에 분리하여 연맹 왕국으로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고구려의 특산물을 바치며 연명하다 옥저는 1세기에 동해는 5세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중남부 지역에 위치하였던 진은 중국과의 교육 과정에서 고조선의 방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후 한나라의 압력을 받으며 고조선 사회가 혼란을 겪자 한반도에는이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유민들의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었습니다 고조선의 문화는 토창 문화와 융합되었다 현재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한 마하는 제국을 비롯한 54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목지국 진왕이 지배자로 추대되어 사만 전체를 이끄는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진은 국을 포함한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변한 역시 구야국 포함해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마는 고조선과 달리 재정 분리의 사회였습니다 신지 견지 불의 읍차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이 각 소국을 다스렸고 종교적 지배자인 천군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습니다 만에는 천군이 다스리는 도라 불리는 신성 지역이 있었는데 소도는 군장의 권력이 인이 이곳으로 도망을 가면 군이라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는 혹한 평야지대에 자리하여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히 철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사를 많이 지었으며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5월과 추을 마친 10월에는 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을 직인 있 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만 시대에는 밭이나 눈뿐만 아니라 수로 보 저수지 등을 축조하였는데 대표적인 저수지로 제천 의림지 미량 수산제 등이 있습니다 한편 마한 진한 변한의 지역별 특징을 살펴보면 마한에서는 초가지붕이 있는 토실 생활하였고 진한과 변환에서는 영혼이 새처럼 날아오르기를 기원하며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치뤘습니다 또한 변환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덩이쇠 화폐처럼 사용하였고 풍부한 철을 낭랑 외 등으로 수출하였다 개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으로 각 부가 각자의 주민과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부족은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순노부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대로 폐자 등의 제가들은 있었고 각기 사자 조이 선인 등의 관리를 거렸습니다 대가들은 나라의 중대한 일은 제가 회의를 통해 합의로 결정하였는데 회의의 수장을 대대로 또는 막리지 불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 취수제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랑이 혼인하여 신부의 집 뒤에 작은 체를 지어 생활하다 자식이 장성하면 처자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대릴 사위 제도인 서재가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잡은 국동 대이라는 동굴에서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하 부인을 섬겨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제천 행사인 동맹을 열었는데 제천 행사는 하늘의 풍요를 기원하는 동시에 온 나라 사람들이 음식과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합의 자리였습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암록 유역의 졸본 지역은 산간 지역으로 농토가 적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부족을 약탈해 생계를 유지하는 약탈 경제 활동을 하였고 곡식은 집집마다 부경이 아는 창고에 저장하였습니다 그러한 탓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평야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형법 적용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도둑질한 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는 일책 12이 있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가들이 의논한 후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습니다 또한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 다시 목을었고 마찬가지로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고려의 지층은 족인고 부신의 족들이 지하 이들은 지위를 습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고구려는 1세기 초 유리왕 때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발한 정복활동을 치며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1세 후 태은 옥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현도군 공격하여 요동 지역으로 진출을 깨 아였다는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부족적 성격의 부는 이후 행정적 성격의 부로 정착되었고 부의 지배자는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백성들은 대부분 자영 농민이었다 아여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국 천왕 때에는 을파소 국상 임명하고 농민 몰락 방지를 위해 진대법을 실시하였는데이는 봄의 국가가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 갑게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이는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던 고구려는 3세기 중엽 동천왕 때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체력이 위축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 미천왕 중국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암록 하류에 서평을 점령하면서 중국 대륙과 한 년인 낭군 대방군의 연결 고리를 제거하였습니다 뒤어 낭군과 대방군을 점령한 미천왕 중국의 9년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할 수 있었고 요동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전년과 대립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 중엽 고국 원항 때에는 전연 모용황의 침략으로 수도인 국성이 함락되면 미천 왕릉이 도굴 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남쪽에서 올라온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국가 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한 소수림왕은 내부의 체제정비를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4세기 후반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고 왕이 곧 부처라는 왕불 사상을 내세워 지방세력을 통합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의 교육기관인 태을 립하 전를 성하 령을 반포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윤이란 혁과 법령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율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형이며 영은 행정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법령을 말합니다 소수리 망의 이러한 개혁으로 고구려의 중앙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4세기 말에 한 관토 대항은 소망의 정비를 탕으로 남북조의 혼란기를 틈타 정복활동을 펼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서북쪽으로는 후연과 거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숙신 동부여를 굴복시켜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남부 지방과 두만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아신왕이 다스리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한 관계 대왕은 신라 뇌물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 침입한 며 외와 우호적인 금관 가야를 공격하였습니다이는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에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계토 대왕은 광활한 영토확장의 결과로 만조와 한반도 중부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강력한 왕권과 자주성을 표현하였습니다 왕의 뒤를 이어 주기한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지인성 지한 시의 광계토 대왕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 광계토 대왕의 영토 확장과 외군 격퇴 과정 묘지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에 즉위한 장수왕은 중국이 남조와 북조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내성을 기반으로 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자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대부분 평양 천도 이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 교육 기관인 경당에서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장수왕은 천도 후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수도 한성을 함락시켜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산 만에서 중령 경북 동해안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는데이 사실은 충주 고구려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비석입니다이를 통해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 진출을 확인할 수 있고 신라를 동이 신라의 왕을 매금 표현한 것을 통해 수식이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성장은 백제와 신라의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습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백제와 화친하는 등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경계하 장수왕의를 이어 기한 문왕은 494년 부 하며 부여의 왕과 일족을 고구려에 편입시켰다 백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고 광계토 대왕 장수왕의 업적을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5세기에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이르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왕을 태왕이 부르고 독자적인 연어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 고시를 비롯한 오부 출신의 귀족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는데 대대로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관리를 여관 등으로 분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행정구역은 수도 오부 지방 부로 나누었고 지방 장관으로 욕살 철 근지 등을 두어 행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구에서는 학문이 발달하고 중앙 집권 체제가 발전하면서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역사서인 유기가 편찬되었다 권을 편하였고 그려는 다양한 고분을 만들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돌무지 무덤을 만들었는데 돌무지 무덤이란 돌을 쌓아올려 만든 무덤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널리 만들어 졌으며 대표적인 분으로는 장군 총이 있습니다 장군총은 중국 지인성 지한 현에 있는 7층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둘레돌 in 호석이 둘러져 있고 무덤 옆에 딸린 무덤인 배총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후기에 이르러 돌무지 무덤 대신 굴식 돌방 무덤을 만들었는데이는 주로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굴식 돌방 무덤이란 돌을 이용해 외부에서 이어지는 길과 방을 만들고 방 안에 시체를 넣는 관인 너를 안치한 뒤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강서 대묘 무용총 각저총 등이 있습니다이 고분들은 천장의 구조가 점차 모서리를 좁혀가며 쌓아올리는 방식인 모 주림 천장 구조의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고 그려 사람들은 현세 생활이 사후 세계에도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과 함께 뭇 거리를 묻기도 하였고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무용총의 무용도 각저총의 씨름도 등이 있습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준다는 도교의 위신을 그린 그림으로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은 북쪽은 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분벽화의 사도에서 보여지듯 삼국시대는 불교 아니라 도교문화 역시 수용하는데이는 주로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행하였습니다 도교는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불로장생과 현세 복을 추가하였는데 후에 소개될 연계 소문은 불교 세력을 하기 위해에게 도교의 수입과 성을 하여 국가종교 주도적인 지위에 올려놓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주변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영하고 전파하였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동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중국 수아 당의 궁중에서는 고구려 악이 연주되었으며 연애에서는 고구려 무용으로 흥을 도두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역과 활발하게 서역 계통의 인물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였고 이와 반대로 서역의 궁전 벽화에서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졌습니다 고구려는 무덤만 아니라 건축도 발달하였는데 장수황 때 평양에 세운 궁궐인 안학 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안낙 3호분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가혹 형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불상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금동연가 7년명 열의 입상이 가장 대표적인데 불상 뒷면의 명문을 통해 고구려 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일본에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7세기 초 승려 담징이 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하였고 호류사 금당 벽화를 남겼으며 승열 해자는 일본 쇼토쿠 회자의 스승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다카마스 고분 벽화가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벽화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활발한 영토 확장과 독자적 문화를 꽃피우며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황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며 세력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세력을 팽창시키는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세기 말인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체력을 확장하며 고구려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인 돌과 연합하여 이에 대응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항하면서 6세기 말 이후의 국제 관계는 고구려 백제 외 돌거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이 연합하는 동서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주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수제는 고려의 국서를 보내 복속을 강요하 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양왕은이를 거절하였고 598년 오히려 요서지방을 선재 공격하였습니다 수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하지 군량미 수송의 중단과 홍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성과없이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후 수나라 문제의를 이은 양제는 11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강력하게 저항하며 공격을 막아 내었고 이에 수양제는 또다시 우중문 등에게 30만 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612년 평양으로 가는 길목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였고 퇴각하는 수의 군대를 현재의 청천 강인 살수에서 크게 물리쳤는데이를 가리켜 살수 대첩이 부릅니다 이후에도 수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무리한 전쟁과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수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은 한동안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은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고 돌을 제압한 후 고구려를 압박하는 주 국가에 대한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당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구려에서는 연계 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보장왕을 왕으로 세우고 당과 신라에 대해 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태종 소문의 정변과 고구려의 신라 공격 등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 하였습니다 645년 대군을 이끌고 침략에 나선 당태종은 랴오허강 1대의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 진격하였다 당의 공격을 막아내자 당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성을 이용한 전술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수아 당의 연이은 공격을 막아내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동안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현재 경남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고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려 춘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계 소문이 신라가 점령한 옛고구려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동맹을 제외하였습니다 마침 여러 차례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던 당태종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다시 공략하고자 제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백제 고려 정을 위한 나당동맹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군은 백강 전투에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에게 패하였고 황산벌에서 개이 이끄는 백제의 결사대 마저 김유신이이 신라군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피신하던 의이 복서 망습니다 킨 나당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고구려는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연계 소문의 지휘하에이를 잘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연계 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새 아들이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을 버렸고 정권의 구심점이 약해지자 귀족 세력과 지방 세력 마저 분열하며 정치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당은 지배층에 의 내분을 틈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의 성들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보장왕이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들은 곳곳에서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고문은 오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건 은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한성을 근거지로 고구려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안승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투항하여 금마저 보덕국 세우며 전통을 이어가려 하였습니다 한편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의 의도를 파악한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의 공세가 거세지고 지도층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고려 부흥운동 은 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와 고려에서 내려온 이주민과 한강유역의 토착세력이 결합하여 성립되었으며 한강유역의 위례성을 도읍지로 하여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왕족의 성씨를 부여시 하였다는 점 서울 석천동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이 고구려 돌무지 무덤 양식과 유사한 점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비옥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경문화와 철기 문화가 발달하였고 바닷길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유리하였다 반포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 통치를 위한 기준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관제를 정비하여 6좌평제 실시하였는데 내신 좌은우 자평은 물자와 창고를 내법 자평은 예법과 의식을 위사 자평은 수기 병사를 조정 좌은경 송사를 병관 자평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맞게 하였습니다 또한 16관 등을 마련한 후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은 꽃으로 장식하게 하였으며 품 이상은 붉은 옷을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였습니다 고이왕은 밖으로는 북쪽의 낭랑 대군과 싸우고 남쪽으로는 마한의 목지국 제압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으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된 문물을 수용하는 등 적극적인 대회 확장을 하였습니다 이후 4세기 중엽 제위에 오른 근초고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마한의 남은 영토를 정복하여 지금의 호남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해안까지 진출하였으며 남동쪽으로는 가야의 세력이었던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외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하였습니다 이어 북쪽으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을 시키고 황해도 일대를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서 백제는 황해도와 강원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막강한 수력을 바탕으로 중국 남조의 동진과 교류하여 선진문물을 수용하였고 외 교슈 지방과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중국의 요서 지방에 진출하는 등 발한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근 에 제작되어 제후왕 있 외왕게 하사한 것으로 보여지는 칠지도는 전체 길이가 75cm 있 창 모양의 칼로 좌우로 각각 세 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으며 60일의 문자가 금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칠지도의 용도는 무기라다는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칠지도는 당시 활발하였던 백제와 외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백제의 불교는 4세기 말 주기한 침류왕 때에 인도의 승녀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백제로 들여옴 최초로 전래되었을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국왕 중심 집권 체제에 사상적 뒷받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고려와 유사하게 문화적인 기풍이 씩씩하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습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 씨와 팔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역사책을 즐게 읽었고 관청의 실무에도 뛰어났으며 투호 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습니다 백제는 형법의 적용이 엄격하여 도둑질 환자는 훔친 물건값의 두 배를 물게 하고 귀양을 보냈으며 반역한 자나 전쟁에 패한 자 살인한 자는 목을 베는 사형에 처하였을 수수나 공금 횡령시 세배를 배상하게 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했습니다 백제는 학문의 토착화를 위해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유학 경서에 능통한 사람에게는 박사의 칭호를 주었는데 그중 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등 오경에 능통한 사람을 오경 박사라 하였습니다 삼국시대는 농경 사회에서 천문 현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이에 천문 관측을 중시하고 발달시켜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일식 월식 혜성 등 다양한 기상 이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는이를 연구하기 위해 역법 전문가인 박사와 천체와 기상을 관측하는 일관 등의 기술관을 하였 또한 의학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인 박사가 존재하였는데 후기에 이르러 의학의 분립에 따라 의박사 약사로 나뉘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역사서를 하였습니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이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대표적인 로 의자왕 때에 고위직인 대좌를 지낸 사택 지적이 저를 짓고 세운 비석인 사택 지적 비가 있습니다 우리는이 비석에서 인생무상의 내용이 담긴 도교적인 색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산수무늬 벽돌 금동 대향로 등을 통해 백제인들의 산천 숭배 신선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백제인들이 불로장생과 현세 복을 추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는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 무덤 형태가 존재하였습니다 한성 시대에는 고구려와 유사한 형식의 돌무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이를 통해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 계통 이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으로는 서울 석촌동 고분이 있습니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의해 수도를 옮긴 웅진 시대에는 굴식 돌방 무덤이 유행하였습니다 웅진 도기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이에 속함 큰 규모에 비해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분으로는 공주 송산리 고분이 있습니다 웅진 시대에는 굴식 돌방 무덤 이외에도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무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고분으로 공주 송산리 호분과 무령왕릉이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이미 조사가 완료된 다른 무덤들 장마철 침수방지 공사를 하다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주인을 알 수 있는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 무덤의 형태를 뛰고 있기 때문에 백제와 남조가 교류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무덤 안에는 지석 아니라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 백제의 금제 관장식 함으로 된 짐승인 석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수도를 다시 옮긴 사비 시대 역시 굴식 돌방 무덤을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고분으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고분 내부에는 벽화가 존재하였고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백제는 건축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익산 미륵산은 7세기 무왕 때 세워진 백제 최대의 사찰로 중앙의 목조 탑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석탑을 배치한 독특한 구조가 특징입니다 현재는 익산 미륵사터 목탑 양식을 계승하여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금제 사리 봉안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또한 부여에는 목탐 양식을 계승하여 세워진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이 석탑은 백제 멸망 후 1층 탑신의 당해 장수 소정방이기를 새겨 평제탑이라고도 불립니다 제는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상으로는 절벽에 새겨진 서산 용현리 마해 열의 삼존이 있는데 부드러운 자태와 온화한 미소가 특징으로 백제의 미소라 불리고 있습니다 백제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아스카 문화가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백제의 학자 아끼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교육하고 박사는 천 과 논어를 전했으며 6세기 성황 때에는 승려 노이사 치계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습니다 4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광계토 대왕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백제는 외와 가야의 원조를 받으며 저항하였으며 항복하며 한강 이북 지역을 상실하였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광계토 대왕의 뒤를 이어 주기한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실라와 낮에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475년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는 치욕을 겪으며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한강유역 상실 후 개로왕의 뒤를 이어 주기한 문주왕 수도를 한성에서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세력이 위축되어 무역 활동 역시 침체기에 빠졌습니다 이후 주기한 동성왕은 493년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낮에 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며 왕권 강화를 깨어졌지만 호족 세력에게 암살 당하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동성왕의를 이어 기한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의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세력을 통제하는 등 백제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활발히 [음악] 교류하였다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변경하였습니다 또한 지방 제도를 수도부 와 지방 방으로 정비하였고 중앙 관청을 22부 확대 및 재편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상황은 중국 남주 및 외와 교류하였다 7개가 외에 건너가 불경과 불상을 전해준 것도 성황의 제위 시기에 해당합니다 상황은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551년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진흥왕의 기습 공격으로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고 553년 낮에 동맹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백제군이 신라에 복수하기 위해 관산 성을 공격하였지만 성황이 신라군에 목숨을 이으면서 백제의 중흥을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지나 7세기에 즉위한 무왕은 익산의 미륵사를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무왕은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무왕 이후 주기한 의자왕은 윤을 보내 대야성을 점령하는 등 적극적인 공격으로 신라의 40여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벌포 전투에서 소정방이 끈 당군에게 패하였고 계백의 결사대 마저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의 패하였습니다 뒤 공격으로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자 660년 웅진으로 신하였던 의자왕이 항복하였고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유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은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 성에서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흑치상지 역시 임존 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습니다 신라에 흡수 당하며 700년 백제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철기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다 하류 변한 지역에서는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정치 집단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가야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고 3세기경부터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금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였습니다 북쪽 구지봉 신비한 기운이 있어 사람들이 모이니 하늘에서 나라를 세워 임금을 모시라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으로 만든 상자가 내려와 열어보니 황금말 여섯 개가 있었다 여섯은 얼마 후 어린아이가 되었는데 첫 번째 아이를 왕으로 모셨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라고 하였다 이처럼 가야의 건국 신화를 살펴보면 금관가야의 시가 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관가야는 은 철을 생산하여 종 철제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덩이를 화폐와 같은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낙동강 하류의 해상 교통을 기반으로 낙과 외 등의 철을 수출하며 중계 무역을 주도하였습니다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라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야는 4세기 말를 와 실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실라는 침입해 온 외를 물리치기 위해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광계토 대왕은 신라의 5만 군사를 보내어 적군을 추출하였습니다이 과정에서 금관가야 역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고 큰 타격을 받아 맹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습니다이는 전기 가야 연맹의 해체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가야의 세력권은 낙동강 서쪽 일대로 축소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쇠퇴하자 5세기 후반 고구려 군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않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지나 시왕이 시조라 전해지는 대가야는 농업의 유리한 입지 조건과 풍부한 철 산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우수한 품질의 철로 갑옷과 기뿐 아니라 금동관 등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가야는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여 세력 범위를 섬진강 하류 일대와 소백산맥 서쪽까지 확장시켰습니다 중국 남조의 사신을 보내고 신라를 공격한 고구려를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는 등 국제적인 위상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고 때문에 지배력을 한대 모으지 못하였고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한계와 두 나라의 세력 다툼에 의해 점차 는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어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왕 위기인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멸망하였고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 등 가야 왕족 일부가 신라 진골로 편입되었습니다 금관가야의 왕인 김구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벼을 주었으며 본국을 시급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가야 왕족이 신라로 편입된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562년 대가야가 신라 진흥왕에 병합되면서 가야 연맹은 해체되었습니다 이로써 가야는 여러 소국의 연맹왕국 단계를 벗어나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데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야는 여러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진왕에게 투항한 대가야 출신 우륵은 가야금과 가야 음악을 신라에 전했고 가야의 일부 세력이 외 진출하여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기하였습니다 또한 독이 박장식 잔과 독이 기마 인물형 뿔에서 가야인들의 섬세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고 김해 대성고 에서 된 금관가야의 판갑옷과 고령지산동 3호분에서 출토된 대가야의 판갑옷과 투구 금동관 등을 통해 당시 가야의 철기 제작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역사는 기원전 57년 지난해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 시작되었습니다 아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실라 최초의 왕으로 전해지며 경주지역의 토착세력과 남하한 유민 력 합쳐져 경주 1대를 중심으로 건국되었다는 뛰어난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주변에 진한 세력을 정복하여 점차 발전하였지만 한반도 동남 쪽에 치우친 불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가 어려웠고 체제 정비와 국가 통합이 늦어졌습니다 부종 연맹체 있던 신라는 육부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였고 초기에 박 석 김해 삼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왕의 칭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의 순으로 바뀌었는데 거서 가은 군장 또는 우두머리 차차웅 무당 이금은 연장자를 마가는 대군장 의미합니다 이렇게 칭호가 바뀌어 나간 것은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정치적 발전을 의미합니다 신라는 4세기 후반 네모랑 때에 이르러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네모랑 그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을 확립하였으며 왕을 부르는 칭호도 이사금의 마립간 바꾸었습니다 또한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버려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이 무렵 가야와 외의 연합 세력이 신라의 영역을 을 침입하였고 그려 광계토 대왕이 군사를 보내이를 물리친 일이 있었습니다이를 개기로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신라는 자주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433년 눌지왕 때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 낮에 동맹을 맺었고 493년 소지왕 때 백제와 혼인 동맹을 체결하며 낮에 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실라는 6세기 초 지증왕 때에 본격적인 제도 정비를 실시하였습니다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의미에 신과 사방을 망라 한다는 의미에 라를 합쳐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를 마립 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었습니다 지증왕은 수도와 지방의 행정구역도 정리하였는데 지방 행정구역을 주 군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였습니다 또한 이사부를 보내 지금의 울릉도 일대인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은 법왕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율령을 하였습니다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이 회의를 주관하게 하였고 지배층의 신분 제도인 골품제 정비하였으며 관리의 등급을 17 등급으로 나누어 복으로 서열을 분하는 등 관등제 역시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자 병부를 설치하였고 김해지역에 금관가야를 하였으며 중국과 대한라 나타내기 위해 권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527년 불교를 공인하였다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불교 지능을 위해 황룡사를 건립하였고 불교 집회 등을 통해 나라의 통합과 발전을 기원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화랑도는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 단체로서 교육과 군사 및 사교 단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한 이후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한강 유역을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이어 후기 가야 연명의 맹주인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동강을 차지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양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이러한 영토 팽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단양 신라 성비와 창령 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등의 비석을 건립하였습니다 순수란 원래 천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 민심을 살던 풍을 하는데 진흥왕은 자신이 확장한 국경을 살펴보고이를 기념하기 위해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진흥왕은 왕권 강화와 강해진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스스로를 태왕이 칭하였으며 계국 태창 홍제 등 독자적 연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거칠부 하여금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국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로를 확보하여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고 농사의 유리한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여 경제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즉위한 진평왕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원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청하는 글인 사표를 짓게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라왕 에오른 선덕 여왕은 성대를 건립하였고 자장의 권위로 황용사 구층 목탑과 분사 모전 석탑을 세웠습니다라는 선덕여왕 시기에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비롯한 40억의 성이 함락되면 국가정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김춘추가 고구려의 동맹을 요청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뒤를 이어 주기한 진덕 여왕은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집사를 설치하며 장관을 중시 하였고 당나라의 김춘추를 파견하여 나당 동맹을 성립시키는 등 친당 외교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신라는 초기 부족 사회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신라에서는 귀족 회의체인 화백회의를 열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는데이는 부족 대표들이 중심이되어 정치를 운던 건국 초기의 전통을 유지하며 일제로 운영되었습니다 또한 화백 회의를 통해 국왕의 추대 및 폐위를 결정하는 등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가 있었습니다 골품제는 신라의 지방 부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생긴 폐쇄적인 신분 제도로서 선골 진골 육두품 두품 등 골품 따라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관직 진출뿐만 아니라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 복색 수레 등 일상생활에서도 차등을 두어 규제하여 신라에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한 화랑도 조직이 있었습니다 화랑도는 인재양성과 계층간의 대립 및 갈등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고 원광의 세속 5개를 화랑도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후 화도는 진흥 의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신라의 상업 활동은 주로 대도시에서 발달하였습니다 지증왕 시기에 금성에서 시장이 열렸고 감독관청인 시전이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역하 신라는 당항성을 확보한 이후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는 국 중 가장 늦은 6세기 이후의 되었습니다 행정구역을 수도 6부 지방 5주로 나누었고 진골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이 화백 회의를 주관하여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이벌찬 이하 17관 등으로 구분 관리들이 국정을 나누어 담당하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유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신라의 비석인 임신 이석을 통해 청소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습니다 알 수 있는데 기석의 내용은 효를 지켜 과실이 없고 나라가 위급할 때 충으로 행할 것을 맹세하며 시경 상서 예기 춘추 시전을 습득할 것을 서약한다 내용입니다 이것은 국가 충성에 대한 두 청년의 서약으로 진평왕 34인 임신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서문의 구절마다 반드시 맹세할 서자를 기하여 서임을 강조하였는데이는 그들의 덕성과 그 실천 의지가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라도 다른 나라처럼 역사서를 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정통성을 세우기 위하여 거칠부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 민간으로 전승되는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지 못하였지만 풍왕 때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다 그 후 풍에서 진덕 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는 등 불교는 왕권과 밀착하여 행하였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친 승려 원광은 진평왕의 명을 받아 사표를 지었고 선덕여왕때 자장은 황용사 구충 목탑 건립을 권하였습니다 신라는 농경사회에서 천문 현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선덕여왕때 동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 때인 성대를 건립하였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금속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화려한 금관 등을 통해 신라의 금세공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을 살펴보면 신라는 고구려 백제가 주로 사용한 돌무지 무덤이나 굴식 돌박 무덤이 아닌 돌무지 덧널 무덤을 만들러 사용하였습니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땅 위 또는 지하에 시신과 거리를 넣은 나무 덧을 넣고 그 위에 돌을 싸운 후 돌 위를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든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입니다이 무덤은 벽화가 없으며 무덤의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다수의 뭇 거리가 출토되었는데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병 유리잔 등을 통해 신라 시대에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마 총에서는 말의 안장에 부속된 말다 그려진 그림인 천마도가 출토되었으며 호우총에서 고구려 광계토 대왕의 영향력이 신라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호우명 그릇이 출토되었습니다 칠라 시대에는 건축도 발달하였습니다 6세기의 진흥왕은 거대한 사찰인 황룡사를 건립하였고 선동 여왕은 자장의 권위로 황용사 구층 목탑을 건립하였습니다이 는 신라를 위협하는 주변 아홉 세력을 부처님의 힘을 빌려 물리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만든 목탑으로 포국 불교적 성격을 지녔는데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대 불레 타 소실되었습니다 신라는 불상 또한 발달하였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은 경주 배동 석조 열의 삼존 입상 있데 살진 뺨과 다정한 얼굴 푸근한 자태가 특징입니다 신라 시대에는 여러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지증왕 때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 상속 문제가 기록되어 있으며 풍왕 때 세워진 울진 봉평 신라비 풍왕 때에 율령이 실제로 행해졌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영천 청제비 연못의 축조와 보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단양 신라 성비는 진흥왕때 신라가 한강 상류로 진출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이 비석에는 정복한 역의 백성을 회유하고 위로하는 내용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이 새롭게 정복한 한강 유역을 돌아본 후 세운 비석입니다 조선 후기 김정희는 금석 과한 록에서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 이을 밝혀냈습니다 신라는 일본의 배를 만드는 조선 술과 재방을 쌓는 축제 수를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에서는 신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연못을 한인의 연못이라 부릅니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 및 외와 연합하여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대륙을 통일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인 돌궐과 연합하여 수에 대응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항하였다 수에 걸사표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세기 말 이후 동북 아시아에서는 고구려 백제 외 돌로 이어지는 남북 연합 세력과 신라와 수당을 연결하는 동서 연합 세력이 대립하는 정세가 형성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당과 치열한 전쟁을 전개하는 동안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대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고 실라가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위계 저한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의 장군 연계 소문은 실라를 돕는 대가로 실라가 점령한 옛 고구려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결국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이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나당 동맹을 제외하였습니다 마침 여러 차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당태종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공략하고자 제일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위한 나당 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군은 기벌포 전투에서 소정방이 끈 당군에게 패하였고 개의 결사대 마저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끈 신라 패배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를 함락하자 웅진으로 신하였던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연어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연계 소문의 지휘하에이를 잘 막아냈지만 연은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으며 집권자인 연계 소문이 죽자 그의 새 아들이 후계자 승을 둘러싸고 권력다툼을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이틈을 이용하여 고려의 성들을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하였고 고구려는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옛 땅에 웅진을었고 라의 금성 림 도덕을 두었습니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실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여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고 백제 유민과 연합하여 사비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몰아내 이뿐만 아니라 실라는 금마저 보덕국 세우고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고 백제 땅의 지배권을 확보하여 웅진 도덕을 요동으로 켰 이어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는 당의 수군을 선하고 안동도호부를 추출하였습니다 이로서 실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외세인 당 힘을 빌렸고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땅 대부분을 잃었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유민과 함께 힘을 합쳐 당을 몰아내는 자주적인 통일을 달성하였고 백제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는 당을 축출하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룬 후 장된 영와 인증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대외관계가 안정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군사력을 확보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신라의 제 29대 왕인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굴 출신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직계 자손의 왕위 습을 확립하여 왕권 안정에 기여하였습니다 무은 상력 견제를 위해 집사부 그 책임자인 중시의 기능을 강화하였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을 이어 주기한 제 30대 문무왕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나당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인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에게 승리함으로써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문무왕의를 이어 주기한 제 신문왕은 돌의 난을 하였습니다 돌의 난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던 김돌이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 사건을 말합니다 반란의 괴수 돌과 흥원 진공 등은 그들의 재능이 훌륭하여 지위가 올라간 것이 아니며 관직도 실로 전에 힘입었다 그런데도 의지 한 행으로 관를 하고 상하를 기만하였습니다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모아 거사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제 요사한 무리가 진압되어 근심이 없어졌으니 병사들을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보고하여이 뜻을 알도록 하라 이처럼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으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왕 때에는 구주 오소경 지방조직을 성하며 중앙정치 기구와 지방 행정조직을 정비하였고 중앙에서 주요 군현의 태수와 현령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급을 폐지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유교정치 이념의 확립과 유교적 소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였고 군사조직을 중군 지방군 10정 정비하였습니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진골귀족 세력이 약화되자 육두품 세력이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문왕은 아버지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은사를 하였는데 은사 건 이후 만파식적 피 이야기가 전해지 있 검은 옥다 하여 오색 비 금 옥으로 보답하고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어서 바다로 나오자 산과 용은 호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이 은에서 유숙하고 행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고에 보관하였다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감 때 비가 오고 비올 때 개며 람이 들고 파도가 평해 이를 만파식적이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를 통해 감은사 만파식적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제 33대 성덕왕은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안정적인 재정 확보와 국가의 토지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습니다 이후 왕위의 올은 제 35대 경덕왕은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체제 정비 및 왕권 확립을 도모하고 구주를 비롯한 년의 명칭과 중앙 관부의 관직을 중국식으로 변경하는 등 한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경덕왕은 국학의 명칭을 태학감 바꾸었고 박사와 조교 등을 두어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왕 신종의 제작에 착수하였습니다 또한이 시기에는 전제 왕권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달로 노급이 부활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중앙 통치 조직은 왕명을 받들어 행정을 총괄하고 기밀 사무를 수행하던 왕의 직속 기구인 집사부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제 35대 왕인 경덕왕 시기에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의 명칭이 시중으로 변경되었는데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중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집사부의 역할이 커졌고 이로 인해 상대의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집사부 아래에는 위화부 비롯한 13부를 두어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다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을 나누어 전국의 구주를 설치하였고 그 아래 군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주 장관의 명칭은 군주에서 총관으로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주 장관의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신라는 수도인 금성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지리적 취약성을 보완하고 고구려 백체 가야 등 피정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군사상 행정상의 요충지에 소경을 두었습니다 소경에게 남원경 북원경 중원경 금관경이 있었는데이는 지방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밖에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나 정복지에 향 부곡 등의 특수 행정 구역을 두어 일반 군현의 농민들 다 많은 공물을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군현 소경 아래에는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이 있었습니다 촌은 몇 개의 자연 촌락을 합친 것으로 토착 세력인 촌주 지방관의 통제를 받아이를 관리하였습니다 신라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향리 또는 그의 자재를 수도 금성의 여러 관청에 보내어 일정 기간 동안 근무하게 하는 일종의 인질 제도인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거사의 차림으로 도성을 떠나 무진주 수행하니 주의 향리 안길이 그를 정성껏 대접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이 떠나면서 말하기를 도성에 올라오면 찾아오라 하였고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나라의 제도에 해마다 외주의 향리 한 사람을 도성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보내 지키게 하였다 지금의 기인이다 안길이 올라가 지킬 차례가 되어 도성으로 왔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통해 상수리제도 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는 지방관을 감찰하고 감독관으로 외 사정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군사 조직을 정비하여 구서당 정을 설치하였는데 구서당 구강 직속 부대인 중앙군이 민족융합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인 함께 옛고구려 백제 말갈인 등 피정복민의 포함시켜 편성하였습니다 지방에는 정을 두었는데 구주에 한 개씩의 정을 두고 국경 지대임 동시에 관할 구역이 넓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한 주에는 두 개의 정을 두어 총 정을 배치하였습니다 신라의 유교정치 이념을 살펴보면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 휴경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제 38대 왕인 원성왕 때 이르러서는 유학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상품를 실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춘추 자시전 예기 문선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겸하여 논어와 효경의 밝은 자를 상품으로 하고 공예와 논어 휴경을 읽은 자를 중품 하고 공예와 경을 읽은 자를 하품으로 하였다 독서 상품과는 학문과 유학의 보급에 받지 하였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재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통일신라는 경덕왕때 관청과 행정 구역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변경하는 등 관료 조직을 재정비하여 혜공왕 때 다시 환원되었다 통일 이후 안정을 되찾았으나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골 귀족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반란이 계속되었고 그러던 중 해공이 피살되는 왕위 쟁탈전이 이에 155년 간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웅주 도덕이었던 김창이 자신의 아버지가 원성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어 난을 일으켰고 청해진의 장보도 중앙의 왕위 쟁탈전에 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실라는 점점 국정운영 능력을 상실해 갔습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 자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고 사적 예민을 늘리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하였습니다 결국 부족한 재정적 보충을 위해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나 초적 되기도 하였습니다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가 더욱 심화되자 전지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의 난의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나라 안에여 주에서 공부를 치지 않으니 창가 비어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곳에서 도적이 벌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노이 근거로을 켰다 과 난을 통해 신라말 농민기에 대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말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고 사회가 혼란해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여 일정한 지역에 독립적인 지배권을 행사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 군대를 거느렸고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부르며 그 지역의 행정과 군사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사 한편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 지리서를 들려왔습니다 풍수지리설은 금성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호족들에게 크게 환영받습니다 한편 골품제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신라 사회에서 관직 승진에 제한이 있었던 육두품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인 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진골 귀족이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전개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거나 지방 호족 세력과 함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10세기 초 신라말의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과 궁에는 세력을 모아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상주 출신의 군인이었던 견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나주와 진주를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이후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며 완산주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전라도를 차지하여 그 지역에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습니다 육두품 세력을 포섭하여 체제 정비에도 힘을 쏟았고 중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신라의 왕족 출신인 궁에는 북원의 도적 양길의 무리 속에서 힘을 길 강도 경기도 일대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고구려 부흥을 내세우며 송악의 도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이후 궁에는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하였다가 철원으로 도을 옮기고 국호를 봉으로 고쳤으며 최고 중앙 부인 광평성 설치하는 등 독자적인 관제를 정비하여 점차 국가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자 호족을 탄압하였다 칭하며 주변 인물들을 숙청하고 전제 정치를 강화하였습니다 이에 호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태봉의도이었던 철을 떠나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경이라 불렀습니다 고려와 후백제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태조 기 이후 웅주 인근 지역이 백제에 투항하고 서원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호족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태조는 지방의 호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의 딸과 하였습니다 또 신라 정책을 취하여 신라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었습니다 마침내 고려군과 백제군이 대체하였고 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보려는 후삼국 통일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백제에서는 왕이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견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아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을 금 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견은 탈출하여 고려에 하였고 신라의 경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왕건에게 항복하였고 리천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땅을 지배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허강 서쪽의 영주 지방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곳에서는 고구려 유민 외에도 말갈인 거란인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강제 이주되어 당에 통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란의 반란을 개기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출신 대조영은 698년 고구려인 말갈인 이끌고 중국 지린성의 동모산 지역에 정착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되면서 한반도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고구려 개승 의식을 내세웠습니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고 대시가 그 북쪽을 영유하기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 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이를 편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시가 누구인가로 고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구의 땅인가로 고구려 땅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공은 자신이 술한 발해를 통해 남북국 시대을 제시하였으며 해 고려 승 의식을 주장하였습니다 대조의를 이어 주기한 왕은 연호를 만주를 에 나섰습니다 발의 세력이 커지자 당은 흑수 말갈과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압박하여 흑수 말가 정하게 하는 한편 돌 일본과 교류하며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조치에 불만을 품고 732년 장문휴가 지휘하는 수을 보내 산동지방 해 왕이 말기를 수말 처음에는에게 길을 빌려 통하였다 그런 당이지 관직을면서에게 리지 않으니이는 당과 함께를 격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생부 이에게 군사를 거리를 명다 발해 무왕의 흑수말갈 정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해와 당의 대립 관계는 문왕이 즉위하면서 해소되었습니다 무왕 이후 발해의 왕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문항 역시 독자적 연호 있 대응을 사용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당 신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체제 정비에 힘썼습니다 문왕은 당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삼성 6부제를 기반으로 중앙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신라와의 상설 교통인 신라를 개설하고 사신을 교환하는 등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또한 도을 중경 현덕부 상경용천부 천도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바는 9세기 초 선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세기에 한 선은 독자 연인 건을 사용하며 말 세력을 속하였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요동 남으로는 대동강 2부까지 확장하여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고 5경 15부 62주 지방통치 체제를 완비하였습니다 이무렵 당은 전성기를 맞이한 발해를 가리켜 바다 동쪽에 번성한 나라라는 뜻에 해동 성국이 불렀습니다 발레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중앙정치 조직은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삼성 6부제를 받아들였으나 그 명칭과 운영은 독자적이고 아래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을 두었고 정당성의 장관인 대상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아에 좌사정 우사정 두어 각각 3부 총 6부로 나누어 국정을 맞게 하였고 부에는 유교적 명칭인 충인의지 예 신부를 사용하였습니다 발레는 삼성 6부 이외에도 중정대 주자감 문적원이 존재하였습니다 중정대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주자감 발의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유학을 교육하였을 책과 문서 관리 비문 충문 외교 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방행정 조직은 선왕 때 5경 15부 62주 조직되었습니다 군사 행정적 요충지에 상경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등 5경을 설치하였고 이중 상경 천부가 가장 오랜 기간 발해의 수도였습니다 지방의 중심 도시에는 15부를 두고 62주 나누어 관리하였습니다 부에는 도덕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승을 지방관으로 파견하고 도독의 일원적인지 를 하였으며 지방행정의 말단인 락은 수령이 불리는 토착 세력이 자치적으로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 12를 조직하여 군과 수도를 경하게 하였으며 지방의 중요 지역에는 별도의 지방군 두어 지방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처 발전하던 발는 10세기 초 지배층의 권력다툼으로 력이 크게 쇠퇴 시작하였 한편 거의 유라 보기는 부족을 통합하고 북 아시아에서 대규모 정복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레는 세력을 넓힌 거란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926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발해가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민들은 고려에 망명하였고 남은 세력은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후발해 정국 등 발 승 국가를 세웠습니다 역사를 이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중국과의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 후 궁의 신하가 되어 수을 이끌고 한강 유역과 금성 지역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우면서 신임을 얻어 재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려의 승을 내세워 918년 호를 고려 정하고 연호를 천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919년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개경이 불렀습니다 고려와 후백제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태조 주기 이후 웅주 인근 지역이 후백제 투항하고 서원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호족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태조는 지방의 호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의 딸과 혼인 하였으며 신라의 화친 정책을 취하여 신라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었습니다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자 고려군은이를 돕기 위해 출전하였지만 봉산에서 후백제 군에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 후인 930년 고려군과 후백제이 대체하였습니다 때 고창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고려는 후삼국 통일에 유리한 위치를 지할 수 있 한편 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네분이 일어났습니다 견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아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을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위 되었습니다 이에 견은 탈출하여 고려에 귀하고 신라의 경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고려에 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는 6년 1 2천 전투 황산 전투에서 신검 이끄는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태조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백성의 조세부담을 줄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이에 조세 세율을 10분의 1로 정하여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빚으로 노비가된 일부 양민을 값을 치르고 풀어주 기관인 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태과 실라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제도를 마련하고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 등을 통해 호적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였습니다 사심관 제도란 중앙의 고위 관리에게 출신 지역의 호족을 관리하게 한 제도를 말합니다 신라왕 김부가서 항복하자 신국을 애 경주라 하고 하여 부호장 이하 관직 등을 주관 하였다 신관은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그 지방에 치한 유지 풍속 교정 공무 조달 등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기인 제도란 지방 호족의 자재를 수도에 파견하게 한 제도를 말합니다 국초에 향리의 자재를 뽑아 개경에서 볼모로 삼고 또한 출신지에 일에 대한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이를 인이라 하였다 이는 중앙정부가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이며 실제로는 인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태조는 호족 통제 정책뿐 아니라 회유 정책도 실시하였습니다 호족의 딸과 혼인하는 혼인 정책 왕씨성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펼쳤으며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로와 인품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주는 역분전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 는 정와 개백 요서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고 예절을 강조하여 구안과 신하의 분을 엄격히 하였으며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태조는 옛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 세력을 지배 세력으로 수용하여 민족을 통합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의 귀순을 적극 받아들였는데 발해의 왕자 대광이 유민 수만을 이끌고 들어오자 왕족으로 대우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가을 7월 발해국의 세자 대광이 물이 수만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자 성명을 하사하여 계라 하고 종실의 족보에 넣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 대광의 고려 귀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 유민 중에는 관리 장군 학자 등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적재 적수에 임명하여 후삼국 동일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하였다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낙타 피를 보내왔는데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 매어 노와 굶어 죽게 한 만부교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태조는 건국 초부터 서경을 중시하여 남쪽에 인구를 이주시키고 이곳에 관부와 관리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북진 정책과 발해 유민의 합류로 청천강에서 영에 이르는 지역까지 국경선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태조가 많은 아들을 남기고 죽자 귀를 이어 왕이 된 해종 정종 때에는 왕규의 난을 비롯해 치열한 왕이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이에 뒤어 주기한 광종은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주에서기를 영입하여 호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을 강화하기 개혁정치를 추진하였습니다 광종은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습니다이를 통해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쌍기의 권위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향을 갖추고 문예를 공부한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였습니다 광종은이를 통해 를 장악하던 공신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 선발한 관리들을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광종은 관리의 복색을 관등에 따라네 가지 색으로 정하여 관리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고 국왕 중심에 새로운 관료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왕 9년 처음 과거를 시행하였다 한림학사 기에게 명하여 진사를 뽑았다 왕 11년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세 곳 중단 이상은 붉은 세곳 도경 이상은 세곳 소주부부 등 광종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종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였습니다 수도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불렀으며 광덕 풍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또한 주현 단위로 조세와 곡물 부역 등을 부과하는 주현 공부법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고 빈민의 구호 및 질병 치료를 위해 제위보 설치하여 노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거한을 견제하고자 손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불교를 중요하게 여겨 화엄종 승려 균열을 통해 귀사를 창건하였습니다 광종의 뒤를 이어 주기한 경종은 다소 급진적이었다 광종의 정책을 처리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공신 세력을 다시 중용하고 광종의 정책을 뒷받침하였다 신진 세력을 제거하여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시정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여 전 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공물을 수취할 수 있는 토지인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토지인 시지를 지급하였습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주기한 성종은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의 심후 28절을 받아들여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중앙집권적 귀족 정치를 추구하였습니다 성종은 태과 신라의 제도를 토대로 당의 삼성 6부제를 참작하여 이성 부제의 중앙 관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지방통치 제도를 정비하여 주요 지역에 목을 설치하였고 절사를 파하 며 지방 세력 통제를 위해 향리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이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성종은 유교 교육 진흥을 위해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고 개경에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하였습니다 국자감 유학부 기술학부 구성되어 있었는데이를 통해 많은 관리와 유학자를 배출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의 향교를 설치하고 경서에 통달한 경학 박사와 의료를 담당하는 의학 박사를 파견하였습니다이는 지배 이념인 유교를 권장하여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종은 유교를 진행시킨 반면 연등회를 축소하고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국가적인 불교 행사를 억제하고 토속적인 신앙 의뢰를 폐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고 지방의 인재를 불러 교육하며 유교적인 모범 사례를 발굴하여 표하였습니다 성종과 목에 이어 주기한 현종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성대하게 거행하는 등 자주적인 문화정책을 쳤습니다 현종은 전국을 경기와 오도 양로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팔목을 비롯한 군진을 설치하여 지방도를 확립하며 과 군사문제 처리를 위해 도병 마사를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구강 친위 부대인 이군을 설치하고 향리 자제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주현 공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10세기 초에 당이 멸망하고 여러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거란의 유라 보기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분열되어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91년 요를 건국하였다 는 력을 장하이 주위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942 요은 고려의 사신 30명과 함께 낙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태조왕 거라는 발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사신들을 섬으로 배보고들은 보에 있는 였는데이를 가리켜 만부교 사건이라 부릅니다 이후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 후대의 왕들을 위해 남긴 훈유 10조를 통해 거라는 금수의 나라이니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주기한 정종은 947년 농민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관군을 창설하며 거한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을 통일한 송이 거란과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자 고려는 손과 친교를 맺고 거란을 배격하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자 거란은 993년 장수 소을 보내 고려에 침입하였고 고의던 서희는 소과 담하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알리며 북방 교통로를 확보하면 손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하다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거라는 암록 동쪽 이남의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는 을하 거의 장수 소손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실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어찌하여 그대의 나라가 지하고 있는가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통한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이 말을 듣고 서희가 말하기를 리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하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거란의 동경도 모히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 하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서희의 외교 단판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약속과 달리 손과의 교류를 유지하였습니다 한편 강동주가 정벌과 고려 압박에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라는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고려의 무관이었던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왕으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란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고 공격에 고려는 속절없이 무너져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고 종이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피를 입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고려는 현종의 친조 조건으로 화친을 청하였고 거라는 이을 받아들여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에 무신 양가 이끄는 군대는 구하는 거란군을 급습하고이 과정에서 거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시간이지나 거라는 고려에 약속한 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병을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않고이 거는 강동육주 반을 였 그러나 고려은이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배합이 이끄는 거란군은 신마녀 군사를 동원하며 고려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은 199년 귀주 대첩에서 거란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거란의 병사가 귀를 지나자 강찬 등이 교에서 맞아 싸웠다 아군이 추격하여 건너 발령에 이르니 시신이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과 노한 말 낙타 갑옷 무기는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강감찬의 귀주 대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 후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일 때에는 암록 어에서 동해의 돌연 포에 이르는 지역에 천리 장성을 축조하여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부처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고자 초조 대장경을 조판하는 거란과 친선 관계를 수립하였고 손과 거란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습니다 시기에 따라 숙신 또는 말갈 등으로 불리던 여지는 발해의 옛 땅인 만주와 두만강 일대에서 부족 단위로 생활하였습니다 이후 여진은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10세기 초에는 고려국경 근처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긴 여진은 곡물로 토산물을 바치고 마리나 모피를 고려의 식량 농기구 포목 무기 등과 교환하였습니다 고려는 여진의 추장들이 주고 물품을 하사하는 회유 정책을 펼치는 등 귀순해 오는 여진 인들을 자치주 통해 통치하였습니다 대체로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와 여지는 12세기 초에 완니엔 부의 추장 인계를 중심으로 강성해지면서 충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숙종은 여진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윤관의 북벌군주 기병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윤관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기병인 신기군 중심으로 보병인 신보군 승병이 항마군 구성된 별무반을 편성하였습니다 윤관이 말하기를 신이 패한 바는 적은 병이고 우리는 보병이 가히 대적할 수 없었기 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권하여 처음으로 별무반을 우고 말을 가진 자는 신기군 삼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에 속하게 하였다 또한 승을 선발하여 마군을 편성하였다 이와같이 고려사를 통해 무반의 구성 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대비하던 중 숙종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뒤어 주기한 예종은 117년 관에게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의 거점을 벌하게 하였습니다 고려는 천리장성 이북의 동북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새로 개척한 영토에 동북 구성을 쌓고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진의 계속된 침입으로 수비가 곤란하고 여진이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고려는 1년 7개월 만에 구성을 다시 여진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동북 구성은 공험진 위치를 두만강 북쪽에서 그 이남인 정까지 보고 함경도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설 길주 내지 마은영 남부터 정평지점 이북에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설 등 세 가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후 부가 중심이 된 여진은 세력을 확장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고 1115년 금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며 고려의 형제 관계를 제외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은 본래 고려에 복속된 종족이었으나 금이 침입해 우자 고려의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고려는 금과 거한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정세를 활용하여 의주를 확보하였습니다 그 후 거한을 멸망시킨 금이 사대 관계를 요구하자 고려를 집권하고 있던 이자겸은 전쟁을 피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과 사대 외교를 맺었습니다 이로써 건국부터 추진해온 고려의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한편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뒤 송을 공격하였습니다 송은 고려에 함께 금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지만 고려는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후 고려 의 외교는 금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성종 이후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면서 중앙 관료화된 지방 호족과 신라 육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 배출한 가문을 가리켜 문벌 귀족이라 하였는데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는 경원 2시 이자겸 해주최 시 최충 경주김 시 김부식 안산김씨 김은부 파평윤씨 윤관 등이 있었습니다 문벌 귀족은 과거제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 문화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전국을 주도하였습니다 또한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전의 혜택을 받아 안정된 경제기반을 확보하였고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초기 족은 균형잡힌 정치를 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수화되고 편안함을 추구하여 왕권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비슷한 가문이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권력기반을 강화하였고으로서의 지위를 바탕으로 정권을 잡기도 하였습니다 일부 문벌 귀족들은 유력 가문이 아닌 계층에 과거 응나 관직 수열을 가로막고 왕권에 정당한 행사를 하였습니다 이종 은 과거에 합격한 지방 향리 출신 관료를 등용하여 문벌 귀족을 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여진이 고려의 국경을 침입하였을 때 대부분의 문벌 귀족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현상 유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진에게 구성을 돌려주고 여진 정보를 완수하지 못하자 보수적 문벌 귀족들은 윤관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예종 때에는 이자겸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 대표적인 문 벌인 경원 이시 가문은 문종 때부터 80여년 동안 계속된 왕실과의 혼인으로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습니다 인종의 외조 부었던 이자겸은 예에게 둘째 딸을 왕비로 보낸 후 다시 셋째 넷째 딸을 외손자인 인종과 혼인하게 하여 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자겸은 스스로 국공에 올라 자 등한 예를 받았다 또한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올리는 글을 임금과 동등하게 전이라 불렀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으며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근이 날마다 썩어 나갔다 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당시 귀족인 이자겸의 력이 마나 컸는지 얼마나 심각하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자겸의 권력 장악이 지나치게 커지자 인종은 자신의 측근 세력들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이를 눈치챈 이자겸은 1126년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고자 중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는데이를 가리켜 이자겸의 난이라 부릅니다 한편 이자겸의 아들 이의 비와 경의 노비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이자겸과 경의 사이가 틀어지자 인종은 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이자겸은 왕명을 받든 경에게 진압 당하였고 영광으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인종은 경에게 공신 칭호를 주어 하였고 경은 문화 실에 임명되어 잠시 권력을 잡았지만 이자겸의에 가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뒤 암태도 유배되고 았습니다 비록 왕권은 되찾았지만 이자겸의 나로 인해 궁궐이 불타면서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던 기족 사회는 중앙 지배층 사이에 분열이 심화되어 크게 동요하 있습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이 과정에서 인종의 개혁 정치와 금에 대한 사대 외교를 둘러싸고 묘청 정지상 중심의 개혁적인 석경 세력과 김부식 중심의 보수적인 개경 세력이 대립하였습니다 묘청 등 석경 세력은 풍수 지리서를 이용하여 도을 서경으로 옮길 것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 것 금을 정벌할 것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묘청 등이 말하기를 신등이 보건대 석경 임원역 지세는 음양가 말하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워 이어하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금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주변의 3국이 모두 신화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묘청 등 석경 세력이 주장한 개혁 내용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의 인종은 석영 세력의 주장에 동조하여 석경의 대화을 짓고 그 안에 착신을 섬기는 성당을 설치하였습니다 반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귀족 세력은 도상을 배 기존의 유교정치 이념에 충실할 것과 금의대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석영 세력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왕이 묘청의 말을 따라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서경으로 행하고자 하였다 김부식이 아뢰어 말하길 올해 여름에 석영 대화궁 30여곳에 벼락이 쳤습니다 만약 이곳이 좋은 땅이라면 하늘이 이처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은 아직 가 간다면 반시 곡식을게 될 것이니 성에게 인을 풀고 만물을 사랑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이 같이 고려사를 통해 김부식의 천도 반대 주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개경 세력의 반대로 천도가 좌절되자 묘청은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 정고을 일으켰습니다 일어 도를 한 력을 제거하고 반란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에 묘청 경 세력은 1년 동안 저항하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묘청 난 이후 고려 사회는 보수적인 성향이 더욱 지어졌습니다 란을 진한 김부식 등 문벌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무신에 대한 별이 심화되었습니다이는 신정이 발하는 경이 되었습니다 도운동 인해 경의 권위가 약화되었고 개경에에도 별도의 독립적인 기관을 두는 제도인 분사 제도와 삼경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이 싸움은 난가 및 불교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한파의 싸움이다 또 독립당 당의 싸움이고 진보대 보수의 대결이다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이다이 싸움에서 묘청이 하고 식 로 조선의 역사가 사적이고 보수적인 유교에 정복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이 싸움을 천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 묘청의 석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1천년 내 제일대 사건이라고 표현하며 묘청의 자주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후에도 문벌 기족의 권력 독점이 계속되자 고려사회의 모순과 분열은 더욱 심해졌 또한 무신이 승진 등 여러 방면에서 차별을 받고 하급 군인들이 군인 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무신들의 불만은 나나리 커져갔습니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문신과 무신의 조화를 도모하였습니다 하지만 문벌 귀족의 반발로이를 저지당하자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습니다 이에 정중부와 이방 등은 1170년 의종의 보현원 행 때 무신정변을 을찾아 어두워지자 어가가 보현원 가까워지니 이와 이의방이 앞서가서 왕이라 속이고 순검군 집합시켰다 왕이 보현원 문에 들어서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날 무렵에 이고이 임종식 이복기 한뢰 등을 죽였다 구을 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환관이 모두 해를 입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정중부가 왕을 협박하여 군으로 기고 는 영은 관으로 옮기게 하였다가 끝내는 왕은 거제 현으로 추방하고 태자는 진도 현으로 추방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무신정변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 정권 초기에는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국정이 혼란하여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한 후 무신들의 회의 기구인 중방 통하여 권력을 고려의 중앙군이 2군 6위의 상장군 대장군으로 구성된 무신 회의 기구였던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의 집권 전까지 최고 권력 기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은 정치적 혼란을 바로잡기 보다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토지와 노비를 늘리고 사병을 길러 세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러자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로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교종 승려의 난 등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왕위에서 물러난 의종은 김보당의 거병의 보기 되기를 기다렸지만 거병이 실패하자 천민 출신 이의민게 비참하게 살해 당하였습니다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자 집권자가 자주 교체되는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1179년 정중부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경대승은 자신의 신변 경호를 위해 만든 사병 조직인 도방을 설치하고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는 등 무신 정변으로 와해된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113년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종을 살해했던 이의민이 경대승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이 의미는 그 후 12년간 집권하였다 일으킨 최원에게 살해 당하였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원은 최고 정치 기구인 교정 도감을 두어 정책을 결정하고 반대세력을 감시하며 교정도감 장관인 교정은 최시 집권자들이 습하 있습니다 또한 사병 조직인 도방을 확대하여 경호를 강화하였으며 농민 봉기를 탄압하였다 최충원 왕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개혁을 건의하였으나 최충원 자신도 토지와 노비를 늘리고 어장 등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독점하는 등 정권을 유지하 데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 결과 봉사 10조는 최충원 권력을 안정시키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최충원 뒤를 이어 집권한 아들 최우 역시 교정 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다는 독자적 인사행정 기구인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서방을 설치하여 문학과 행정 능력을 갖춘 문신들이 정책을 자문하고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를 관료로 추천하였습니다 최후는 야별초 조직하여 치한을 안정시키고 정권을 보위하기 하였습니다 야별초 이후 좌별초 우별초 분리되었고 몽골의 포로로 잡혀갔던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 군이 추가되어 삼별초가 되었습니다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몽골 침입 당시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끝까지 항하 한편 몽골이 침입하자 최시 무신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대장 도감을 설치하여 불타버린 초조 대장경을 대신할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는 천도하여 끝까지 전하였고 압력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신들의 정권장악 이후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은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또한 천민 출신이었던 이의민이 무신 정권의 집권자가 되자 농민이나 민들도 신분 상승을 꿈꾸었습니다뿐만 아니라 무신들은 농민을 위한 개혁에는 소홀한 채 불법적인 방법으로 대농장을 소유하고 노비를 늘렸으며 하민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가혹한 수탈의 자연재해까지 겹쳐 생활이 더욱 궁핍해 백성들은 전국 각지에서 공개하였습니다 한편 서경 뉴스 조위 총은 무인들의 폭거와 의종 시해를 명분으로 내세워 1174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반란에 동참하였습니다 특수 행정구역인 공주 에서는 망이 망소이 형제가 소의 차별에 반발하여 망이 망소이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본기의 세력이 점점 커져 충청도 일때까지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명소를 충으로 승격하여 이들을 유하 전주에서는 가혹한 부역 동원에 반발하여 관노비 군사들이 기한 전주 관노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경상도 운문의 삼와 초전의 심은 신흥을 외치며 지방관의 지나친 수타를 국가에 호소하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경주의 이비와 폐자 역시 고려 왕조를 부정하며 신라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서경의 최광수 고구려 부흥운동을 담양의 이연년 형제는 백제 부흥을 외치며 공개하였습니다 개경의 산업이었던 만적은 다른 노비들 함께 자신들의 주인과 최충원 죽인 후 노비 문서를 불태우기로 모의하였다 또한 누구나 공경 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제 철패를 주장하였습니다 신종 1년 산호 만적 인이 산에서 나무 하다가 공비들을 불러 모의하였다 나라에서 경인 사년 이후로 고관이 천민과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수화 재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할 수 있다가 왜를 괴롭히면서 을해 라고 하니 여러 노비가 모두 그렇게 여겼다 우리가 성 안에서 기하여 먼저 최충원 등을 죽인다이어서 각각 그 주인을 쳐서 죽이고 천인 호적을 불살라서 우리나라에 천인이 없게 하자 그러면 공경 장상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만적이 시도한 신분 해방 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무신정권기 민들은 지배층에 의 지나친 수탈과 억압에 저항하고 불평등한 신분 제도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지만 항쟁은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권력자들은 항쟁을 진압하데만 집중하였습니다뿐 하층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궁핍하고 차별적인 이들의 생활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최시 무신 정권이 고려를 지배하는 동안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여 몽골이 전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려는 몽골에게 쫓겨 내려온 거란을 함께 격퇴한 강동의 역 사건을 통해 몽골과 처음 접촉하였을 평화적으로 몽골과 국교를 수립하지 이후 몽골은 고려의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몽골 사신 저고여 귀국길에 피살된 것을 계기로 1231년 살리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하였고 침략하자 고려는 박서가 주성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몽골군을 막아내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패하였습니다 몽골군이 개까지 내려오자 전세가 불리해진 고려은 화친을 요청하여 몽골군을 몰아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은 물러나지 않았고 개경과 북쪽의 점령지역에 다루 가치를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륙의 백성들에게는 몽골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몽골군의 사육과 약탈에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다 몽골은 개경 천도와 친조 요구하며 살리타 앞세워 고려에 다시 침입하였고이 제차 침입하자 승녀 김윤후는 처인 성에서 부곡민 합세하여 살리타 사살하였다 처인 현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충주성 하민이 중심이 되어 두 차례 모두 몽골군에 저항하여 싸웠는데 김윤후는 충주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몽골군이 쳐들어와 70여일 간 주성을 포하 군량이 거의 바닥났다 김윤후가 군사들을 북돋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해 싸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재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로고는 관노 문서를 불사르고 소와 말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사료를 통해 김윤의 충주성 전투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대구 부인 사에 보관 중이던 고려 최초의 대장인 초조 대장경이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3년 후인 1235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침입시 몽골군은 경주까지 침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황용사 구층 목탑이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 조판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몽골의 침입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국토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중앙의 통제력 역시 약화되었습니다 이에 몽골과의 강화를 지지하던 김준이를 몰아 후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이로서 62년간 이어진 최시 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김준 임현 유무로 이어지던 무신 정권은 유무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끝이 났고 이에 100여년간 유지된 무신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고려는 독립과 풍속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를 맺었고 1270년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도하 한편 최우 양성한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몰락과 몽골과의 강화의 불만을 가져 대몽항쟁을 지속하였습니다 배중 손의 지휘 아래 왕을 왕으로 추대하며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으며 이후 배중손 주도 아래 진도에서 김정의 주도 아래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장기간 전하였고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자 원은 일본 원정을 위해 행성을 설치하고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하였습니다 고려와 원해 연합군은 두 차례 일본 원장을 행하였지만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일본 원정으로 인한 고려가 입은 경제적 군사적 손실은 막대하여 원과 강화 후 고려는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내정 간섭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원은 고려 지배를 위해 화주의 쌍성총관부 서경의 동부 제주의 총관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고려는 왕이 원의 공주와 혼인해 하는 부국이 되었습니다 왕부터 공민지의 왕들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고 태어난 왕자들은 원에서 교육받은 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며 원의 지시를 받아 왕을 교체하는 일이 았습니다 부국이 되자 왕실의 호칭 및 관제는 제후국의 수준에 맞게을 낮춰야만 했습니다 조 혹은 종으로 리던 의 호칭은 원의 지배를 충실히 따르라는 뜻에서 충으로 시작해 왕으로 끝났습니다 왕이 스스로를 칭하던 짐은 고가 되었고 폐하가 전하로 바뀌었으며 태자를 세자로 불러야 했습니다 또한 고려의 중앙정치 조직이었던 중서 문화성 상성이 입부 통합되는 등 이성 6부가 1부 사사로 격하되는 정동 행성의 부속 기구인 이소를 통해서도 고려 내정을 간섭하였다 조직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원에 관리인 다루 가치를 감찰관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한편 원은 조공이란 명목으로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여 원은 공녀와 환관을 뽑아 갔으며 음방을 설치하여 사냥용 매를 수탈하고 금은 자기 호피 배 인삼 약재 등 특산물을 거두어 갔습니다 원은 고려의 문화 역시 바꾸었습니다 고려에서는 변발 호복 족두리 연지 등의 몽골 풍습이 유행하였고 원에서는 고려 풍습이 유행하였습니다 또한 공려 차출을 피하기 위해 조혼 풍습이 등장하였고 성리학 목화 화약 서양 문물 등 새로운 문물이 전래되었을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며 국경에서 성할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공려 차출로 인해 고통받은 고려 백성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의 간섭이 지속되자 친원 성향을 가진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권문세족은 기존의 문벌 귀족이나 무신 집권기에 등장한 신흥 가문뿐만 아니라 몽골어를 익힌 통역관 응방 출신자 등과 같은 부류로 구성되었습니다 친원 성향의 권문세족은 원 세력을 바탕으로 도평의사사를 장악하는 등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토지를 빼앗아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지위를 습하며 강제로 농민을 노비로 삼아 불을 축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권이 악화되었고 국가 재정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농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 이에 고려 왕들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개혁을 도모하였습니다 충렬왕은 전민 변정 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약탈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된 양민을 해방시키려고 원이 설치한 동부와 탐라총관부 회복하였습니다 충선왕은 사림을 설치하여 신진 관료를 중용하고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소금 전제인 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원의 만권당 설치하여 이재현 등 고려 유학자들과 원 유학자들이 교류하게 하였습니다 수강은 찰리 변의 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소유한 땅과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은을 지하고 고대를 금지하였으며 내정 개혁 기구인 정치 도감을 설치하여 정치 경제 사회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14세기 중반 국민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자주성을 회복하고 신진 사대부를 성장시키며 권문세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국민당은 대표적인 친원 세력이자 자신의 누의 동생이 원나라 순재의 기황 우인 점을 이용하여 위세를 떨치던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다 또한 몽골식 풍속을 금지하고 원나라에 의해 격하된 왕실 호칭과 중서 문화성 상서성 등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원 중심의 연호와 원의 내정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 등을 폐지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천령 이북의 고려 땅을 되찾고 옛고구려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적 성향을 가진 승 돈을 등용하고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들을 중앙 전개에 진출시켰고 및 과거제 정비를 통하여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신진 관료를 육성하였습니다 최시 무신 정권기 최후가 설치한 인사행정 기구인 정방을 폐지하였습니다 국민당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전민변정 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신돈을 전민변정 도감에 책임자로 임명할 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약탈한 토지와 노비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은 양민으로 해방시켰습니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반발로 인해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되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에 원의 세력이 쇠퇴하자 한족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본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원 정부는 홍건적 소탕에 나섰고 원 공격에 쫓긴 홍건적을 공민왕때 두 차례나 고려에 침입하였을 1359년 홍건적의 1차 침입되는 이승경 이방실 등이 이들을 격퇴하였다 개경이 함락되는 등 피해가 막 심해 공민왕이 복주가 피난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은 최영 이성계 정세훈 안우 이방실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탈나 13세기 전반부터 고려를 괴롭히던 외구 14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그 세력이 매우 강력하 이에 고려는 정몽주 등을 보내 일본 정부와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에 원나라로 화약 제조법을 습득해 온 최무선은 화통 도감을 설치하고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 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또한 최영은 산전에서 이성계는 황산 대첩에서 외를 토벌하고 창황 때 박는 스시마 섬을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최영과 이성계 등은 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흥 무신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훗날 이들은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권문세족을 전개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지방 향리 출신이었던 신진 사대부들은 소 쌓아 과거를 통해 전개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권문세족이 저지른 불법과 횡포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수용하며 불교 폐단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은 경제적 기반이 미약하였지만 원명 교체기에 고려는 홍건적과 외고의 침입으로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뜻이 맞은 신흥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들은 힘을 합쳐 권문세족을 전개해서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은 개혁의 방법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 분열하여 이색 정몽주 등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을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신흥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손잡은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 개혁파는 역성 혁명을 일으켜 새 왕조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원을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은 고려를 압박하며 천령 이북의 땅을 직접 다스리겠다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우왕과 채영은 이성계와 조민수 등을 앞세워 요동 정보를 추진하였지만 이성계는 4 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습니다 지금 을 정하는 일에는 네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번째 옳치 못함이요 온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러 가면 외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번째 울지 못함이요 이제 곧 덥고 비가 많이 올 것이므로 활의 악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가 전염병을 앓을 것이니 네번째 옳지 못함입니다 이와 같이 태조 실록을 통해 이성계가 주장한 요동 정벌이 불가능한네 가지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왕과 체형은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동 정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명령을 받아 출진한 이성계는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고 큰 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우왕에게 요동 정보를 포기할 것을 다시 한번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왕과 채영이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 성계는 1388년 위화도 해군을 단행하여 체형을 숙청하고 우왕과 창왕을 이따라 폐위한 뒤 공양왕을 세우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1391년 정도전 조준 등 급진 개혁파의 권위로 현직 관리와 퇴직 관리에게 경기지역의 토지의 한정의 수조권을 지급하는 과전법 실시하여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의 급진파는 몽주 등의 온건파를 제거하고 고려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명예 요구에 반발한 최형 등의 명령에 요동 정보를 나선 이성계는 1388년 암록 하구의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여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자 신진 사대부들은 개혁 방안의 차이에 따라 온건파와 급진파 나뉘어졌습니다 정몽주 이색 등의 온건파 사대부들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고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 사대부들은 새로운 왕조 개청과 다른 성씨로 왕조를 교체하자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고려는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토지 제도의 문란이 지속되자 조준 등의 권위로 1391년 과전법 시행하여 토지를 재분배하고 권세가의 토지 사유화를 축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로써 민생이 안정되고 국가 재정이 되었으며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할 수 있었습니다 공양왕 3년 도평 의사가을 올려 과전을 주는 법을 정하자고 요청하니 왕이 따랐다 경계는 사방의 원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살며 왕성을 호위하는 자는 임관과 무직 임관을 막론하고 과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과전법의 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듬해인 1392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을 비롯한 급진파 사대부들은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며 조선을 건국하였다 뜻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여 경복궁 종묘 사직 관화 등을 건설하였으며 이를 유교 사상에 따라 배치하였습니다 조선건국의 가장 큰 공을 세운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 운영을 주장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 경제문감 고려국사 등을 저술하였고 불시 좌변을 통해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여 유불 정책의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훌륭한 재상을 얻으면 육전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임금이 할 일은 한 사람의 재상을 정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모든 관리를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자리이니 그 직분이 매우 큰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경국전 통해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공신이었다 한때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태주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이방원은 정몽주 등을 제거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지만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후 막내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는 세자 이방석을 보좌하며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계국 공신과 종친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방원은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세자 이방석을 무력으로 제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태조 이성계가 둘째 아들인 이방과 왕위를 물려주어 정종이지게 하였고 이방원은 왕세자로 책봉되어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정권을 잡은 이방원이 국정을 독점하는 품은 넷째 이방간 박포 함께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방원에 의해 되었고 그 결과 정종이 양해하여 이방원은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으로 지게하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먼저 국정의 총괄 기구인 의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큰 것을 염려하였다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여 재가를 받도록 하는 6조 직계제 실시함으로써 의정부의 권한을 문하부 사를 사간원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위해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백성과의 소통을 위한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태종은 을 강화하고 국가의기를 다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대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양영 대군이 자로서의 미를 손상시키는 사건들을 일으키자 태종은 양영 대군이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대군에게 떠난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세자를 할 것을 청하였고 이에 대군은 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태중의 마음은 셋째 아들 충령 대군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1418년 태종은 대구는 천성이 민하고 또 항문의 독하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하며 대군을 세자에 책봉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의를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대구는 조선의 네번째 임금 종이 습니다 세종은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모여 유교 경전 등을 공부하며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인 경연과 세자가 장차 올바른 군자가 될 수 있도록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는 교육인 서연을 활성화하였다 학문과 정책 연구를 의정부에서 논의한 후 왕에게 올리도록 하는 의정부 사제를 실시하여 상들의 권한을 보장하는 한편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황위 맹사성 등 유능한 재상을 용함으로써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습니다 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에에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보내 시행한다 다만 2조 병조의 재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이와 같이 세종 실록을 통해 세종이 실시한 의정부 사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세종은 북방의 여진을 토벌하고 최윤덕 김종로 하여금 각각 4군 과 육진을 개척하게 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이종무로 하여금 외구의 근거지인 스시마 섬을 토벌하 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계속된 요청으로 부산포 제포 연포 해당하는 산포를 개항하고 1443년 일본과 개해 약조를 체결하여 일본인에게 제한적으로 무역을 허가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의 훈민정음을 을 1443년 창제하고 1446년에 [음악] 반포하였다 하뿐만 아니라 발달된 인수를 이용하여 금속활자인 갑자를 제작하였습니다 또한 글과 그림으로 유교 윤리를 표현한 삼강 행실도 행 등 유교윤리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였으며 국산 약제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 집성방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종합한 서인 농사직설 등을 편찬하기 한 법서인 정산 내편을 하였습니다 정산은 원나라의 수시력 명예 대통력 아라비아의 외력을 참고해서 제작하였지만 기존의 역법이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였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 4후 문종을 거쳐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치의 실권이 김종서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종 제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고명 대신 중심의 국정운영에 불만을 품고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후 2년 후인 1455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로 주의하 세조가 주의한 이후 지편전 학자 출신 중 일부는 단종의 보기를 꾀하였고 계획이 누설되어 성산 박의 사육신을 비롯한 70회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삼문이 아버지 성승 및 박팽년 등과 함께 상황의 보기를 모의하여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푸는 날에 거사하기로 기약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자 왕이 친히 하면서 꾸짖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하였는가 하니 성삼문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상황을 보기 시키려 했을 뿐이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듯이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라고 하였다 단종 보기 운동이 벌어지자 세조는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지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중지하였습니다 또한 의정부 사제를 폐지하고 조 직제를 다시 실시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세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법 를 실시하고 호적 조사를 통해 인구를 파악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의 난을 진압하였다 기구인 유향수 폐지하고 함길도 좌우로 나누어 통치를 강화하였습니다 한편 세조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각종 법전과 명령 등을 종합하여 경국 대전에 편찬을 시작하였고 이에 법전의 초안이 작성되었습니다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예종은 주이한지 13개월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예종의 뒤를 이어 주이한 성종은 유교 정체를 바탕으로 한 통치 체제의 틀을 완성하였습니다 지방 출신의 선비들을 뽑아 중요 관직에 등용하였다 중요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종은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거두어 관리에게 지급하는 관수 급제를 시행하였고 세조때 폐지되었던 유향소를 부활시켰습니다 아울러 세조때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조선의 기본 통치 이념과 유교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성종 때에는 고조선부터 고려까지 역사를로 정리한 동국통감 조선시대 악보를 정리한 음악인 악학 범 각도의 풍속과 지리 등을 소개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역대 문학작품을 선별하여 수록한 동문선 국가 행사의 유교적 의뢰를 정리한 국조 오래이 일본의 정치 외교 사회 풍속 등을 기록한 해동제국기 등이 되었습니다 조선 국에 참여한 급진파 사대부 계열인 훈구파는 세조의 집권을 도우며 정치력을 장 하였습니다 부국강병과 중앙 집권을 추구한 훈구파는 성리학 이외 학문에 관대하였다 기술 발달에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대지주가 되고 상공업을 독점하는 등 막대한 불을 쌓았고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쓰며 정 제 온건파 사대부의을 승한 사림들은 경기 충천 기반의 기호 지방과 경상도 지역인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체로 중소지주 출신이었던 사림들은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고 향촌 자치를 지향하며 서원과 향약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교의 기본적 철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경을 중시하였으며 천시하고 성리학 이외 사상을 배격하였다 찬 사업과 문물 정비에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과 사의 관직에 임용되어 언론 활동을 한 사림들이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고 정치 개혁을 주장하자 두 세력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습니다 성중에 이어 주의한 연산군은 훈구 세력과 사림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언론 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살림 세력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세력들은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이 쓴 조의 제문을 올린 것을 문제삼아 살림들을 축출하는 무호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김종직이 쓴 조이 재무는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초나라 의제의 죽음을 기리는 내용이었으나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기리는 의미로 해석되어 무호 사화에 발단이 되었습니다 세조의 후손이었다 연산군은 이에 자극을 받아 1498년 이와 관련되었던 사인파를 제거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무호 사화를 부릅니다 전하기를 지금 김일손이 사초의 부도덕한 말로서 선왕의 일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한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 제문을 실었다 대간 홍문관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 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연산군 일기를 통해 무호 사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호 사화가 일어나자 이미 세상을 떠났던 김종직은 부관을 당하였고 김필 정창은 유배되었으며 일는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많은 사림이 중앙 정에서 제거되었습니다 6년 후인 1504년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투기로 인해 되고 사사된 사건과 관련하여 이와 관계된 훈구 세력과 사림들이 제거되는데이를 가리켜 갑자 사라 부릅니다 윤씨를 비하는 의논에 참여한 자와를 올려서는 된 를 중으로 다스려 죽은 자는 그 시체를고 가산을 하였으며 그 가족이나 친족은 연하였다 살아 있는 자는 매로 때리며 신문한 후 멀리 귀양 보냈다 이와 같이 연산군 일기를 통해 하였던 갑자 사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신와 성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훈구 세력은 106년 연산군을 축출하고 종을 왕으로 세우는 중종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연산군을 축출하고 왕으로 주기한 중종은 중종 반정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전국을 주도하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비롯한 살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였다 는 전국 각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를 말합니다이 제도는 중앙과 지방 관청에 추천을 받은 인물들을 왕 앞에서 직접 시험을 치르게 하여 관리로 선발하였으며이는 사림이 관직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독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 폐지하고 소학을 보급하여 유교 윤리를 확산시켰으며 위훈 삭제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대사헌 조광조 등이 아뢰기를 반정 때 공이 있었다면 기록되어야 하겠으나 이들은 또 그다지 공도 없습니다 무릇 이들을 공신으로 중이 여기면 공과을 탐내게 되니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이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종 실록을 통해 조광조 등이 중종반정 의 공신 중 부당하게 공신이 된 일부 훈구 세력의 공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훈구 세력은 1519년 김묘 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을 제거하였습니다 이후 중종과 인종의 제위 시기를지나 명종 때에는 외척 세력간의 권력 다툼이 살림 세력에게 미친 또 하나의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1545년에 일어난 을사 사화는 명종의 외척인 소윤 일파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사로서 이로 인해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덕이 자백하기 평소 대윤 소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그들과 함께 모반을 꾸민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속 추궁 는 님이게 이르 경원대군 왕위에 올라 원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의 집안은 될 것이니 성군을 립하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명종 실록을 통해 대과 소윤 세력이 어떻게 대립하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의 결과 살림 세력은 또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또한 신에 의한 정치란 사 혼란이 야기되고 민생이 궁핍해지자 임걱정 같은 도적들이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된 사화로 큰 피해를 입은 사림은 향촌 사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16세기 이후에는 중앙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대한 제사를 지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학맥을 잇는 사립 교육 기관을 말합니다이는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도입한 을 위해 립한 동 서원이 시초이며 이후 사림이 중앙 전에 진출하면서 그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국가에서는 국왕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사액 서원을 지정하여 토지와 노비 서적 등을 지급하고 항문 연구를 장려하는데 백운동 서원은 이황의 권위로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은 성의 산과 향촌의 문화수준을 높이고정 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원의 수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면세 면역의 특권을 이용하여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고 같은 학파의 결속을 강조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향약은 향촌의 자치 규약을 의미합니다이는 중종때 조광조가 중국의 여시 향약을 들려와 한글로 번역하고 4대 목을 전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풍속의 유교윤리 더해져 만들어진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살림의 세력 기반을 이루었고 백성에게 성리학적 윤리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더업 상권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 잘못된 것은 서로 규제한다 예속 상교 예의바른 풍속으로 서로 교제한다 환난 상율 재난과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 이처럼 향약의 4대 덕목을 통해 향약이 향촌사회 풍속을 교화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이황은 예안 향약을 이인은 해주 향약과 서원 향약을 만들어 보급하였고 사림은 향약을 통해 향촌의 농민을 교화하고 향촌 사회를 안정시켰습니다 수령이나 향리 못지 않은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유학입니다 신진사대부 은 성리학의 핵심 원리인 스스로를 수양한 후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에 수기와 인을 정치와 생활에 적용하였습니다 계 이황의 사상은 이의 절대성을 주장하였으며 근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하였습니다 그는 군주의 도를 개의 도식으로 설명한 성악 10도에서 왕 스스로가 인격과 학식을 수행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황의 사상은 남와 동인에 을 임진란 이후 일본에 전파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성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이황을 동방의 주자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길를 강조한 율곡 이인은 이황에 비해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는 동호 문답을 저술하여 수치 제도의 개혁과 통치체제의 정비 등 다양한 개관을 제시하였고 성지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군주의 수을 도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하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의 사상은 기호 학파와 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이인은 방납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납을 쌀로 걷자고 한 개혁가인 수법을 주장하였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악 도와 성악 지요 모두 군주의 학문인 성악에 대한 내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황의 성 가 구왕 스스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의 성악 지변 신하가 국왕을 잘 필해야함을 강조하였다 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이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며 만물을 구성하는 기는 선과악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선한이는 존귀하고 선악이 함께 내재한 기는 비천한 것이다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여 물인 것 같지만 다른 점은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으며이는 작용이 없고 기는 작용이 있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와 기는 이미 두 가지 물건이 아니요 또한 한 가지 물건도 아니다 이처럼 이황과 이의 이론을 통해 두 성리학자 사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조 주기 후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살림 세력은 신정치 청산에 대한제 놓고 기성 사림과 신진 살림으로 나뉘어 대립하였습니다 신 정치란 12세의 어린 나이의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되면서 임금의 외척이 되는 관료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을 말합니다이 갈등은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심해져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붕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조 전이란 문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의 정과 좌랑을 함께 이르던 말로이는 3사의 인사권을 가졌으며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 이겸이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여 이조 전으로 고되나 외척이 하여 김효원이 반대 하였 이에 양편 친지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배척하여 동인 인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은 동쪽 천동에 있고 겸의 집은 서쪽 정릉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들의 생각은 결코 외척을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서인 쪽에서는 의겸이 공로가 많은 비인데 어찌 길를 막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같이 기술을 통해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붕당의 형성에는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 그리고 지역적 차이 등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기성 살림의 지지를 받은 서인은 신이라도 믿을만한 인물과는 협력할 것을 주장하여 척신 정치 청산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서인혜는 이와 성운의 문인들이 주로 가담하였고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 의 기호학파 선비들이 가하였습니다 반면 김효원을 중심으로 신진 살림의 지지를 받은 동이는 신정치 청산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동이는 서영덕 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신진세력이 적극 가담하였으며 개성 경상도 일 때의 영남학파 선비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붕당정치는 붕당 상호간의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견해를 인정하면서 비판과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진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전국을 주도하는 경향을 뛰었습니다 하지만 1589년 동인이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인물들이 박해를 받은 기추 곡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서인이 전국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에는 서인인 정철이 선주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을 것을 제의하였다 유배된 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인해 서인이 몰락하였고 그로 인해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두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화되었다 대립하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 정도전이 추진한 요동 정벌 문제로 명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이 집권한 이후 명과 사대 외교를 추진하여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등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는 조공과 책봉에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은 명예 연호를 사용하며 사대의 예를 갖추었고 명예 매년 하정사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 등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사대 문서와 조공품을 보냈습니다 명 역시 조공에 대한 담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조선의 필요한 물품을 보내 상호간 품의 공식적인 교환을 통한 일종의 공무역이었습니다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는 교린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조선에 협력하거나 귀화한 자들에게는 관직이나 정착할 토지 등을 주어 조선인으로 동화시키는 경성과 경원의 무역소 설치하여 국경 무역과 조공 무역을 실시하였으며 한양에는 여진족 사신의 숙식과 접대를 위하여 북평관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여진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약탈을 자행하는 경우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대응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암록 지역에 최윤 덕을 파견하여 군을 설치하였고 두만강 지역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육진을 설치하며 암록 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사민 정책을 실시하여 삼남 지방의 주민들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토창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도 교린 원칙에 따라 회유책 강경책을 병행하였습니다 화포와 병선을 동원하여 외구 격퇴하기 하였고 일본측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면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통신사를 보내고 일본의 막부 정권은 조선의 일본 구사를 파견하며 서로 보통 동네에 설치한 외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데마 도아는 조공의 형식으로 교육하였을 일본에 마포 면포 명주 화문석 포피 약재 대장경 문방구 서적 등을 제공하였고 일본으로부터 구리 유황 물감 향료 소목 후추 등 무기 원료와 기호품 등을 사드렸습니다 특히 조선에서 보내준 8만 대장경 인쇄본은 일본 불교 발전에 크게 바지 하였고 모카는 일본의 의생활에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본 해적인 외구 있습니다 조선 해안에서 외구의 침탈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은이 종물을 통해 외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교역을 요청하자 세종때 부산포 제포 연포 3포를 개방하였고 14 43년 매년 50척의 배만이 왕복할 수 있도록 하는 개해 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교육을 허가하였습니다 16세기에 들어 산포에 거주하는 외인이 늘면서 사회적 문제가 증가하였습니다 조선이 외인에 대한 통제와 무영을 제한하자 이에 반발한 외인은 중종 대인 1510년 3포 외란을 명종 대인 1555년 을묘 외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은 군사전략 기구인 변사를 설치하고 일본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유구 시암 자화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등과 교환하였습니다 특히 구화의 교역이 발하였습니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는 통일 이후 반대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대륙 진출의 야욕을 실현하고자 조선 침략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내 일본은 1592년 명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임진 외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은 전쟁 초기 국방력의 열쇠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위력에 밀려 패전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부산진 동래성을 빼앗겼습니다 이후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지만 조총 부대로 구성된 외군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충주 방어선 무너지고 일본군이 빠르게 북상하여 한성에 근접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봉하여 전 수습을 위한 임시 조정을 구성하게 하였고 한성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여 명예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후 일본군은 한성에 이어 평양까지 점령하였습니다 또한 함경도 지역에 쳐들어가 조선의 왕자 두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일부 병력은 두만강 건너 여진과 충돌하였습니다 하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 그리고 수근의 활약으로 전세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근은 옥포 회전에서 첫 승리를 거은 후 거북선을 앞세워 당포 회전 한산도 대첩 등에서도 연이어 하였 특히 한산도 대첩은 조선수군이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작전을 저지하는데 기여하였고 그 결과 외 진출로 및 보급로를 차단하여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홍의장군 제후 고경명 등을 비롯한 의병들은 전국 제에서 전직 관료 사림 승려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 고장의 익숙한 지형과 그에 맞는 전술로 저군 수의 병력으로도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조선의 수군과 의병이 활약하는 가운데 조선의 요청에 따라 명군이 전하자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김 시민이 진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명군과 조선 관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아 나였습니다 또한 권율 장군이 행주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한양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명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자 일본군도 해한 지역으로 물러나며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명과 일보는 3년에 걸친 휴전 협상을 추진하였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혀를 재정비 하였습니다 유성룡의 권위로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으며 고법을 실시해 지군을 반부터 까지 포함시켜 조직된 소군 개편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대규모 병역을 동원하여 다시 조선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직산 전투에서 북진하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는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오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조선과 명 일본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삼국의 내전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조선의 국토는 황폐해져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구가 감소하였으며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적 등의 소실로 세금을 부과할 근거가 사라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 또한 불국사와 경복궁 실록과 사고 등이 불타고 그림과 도자기 서적을 약탈당하는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는 돈이나 쌀을 받치면 관직을 주는 납속 책을 시행하였고 성명을 적재하는 관직 명장인 공명첩을 대량 신분 질서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은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의 무리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만주의 여지는 명예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조선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와 포로로 끌고 간 학자 기술자들을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수한 활자 인쇄과 23평 등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의 출판 및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유학자들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에 전래되기 하였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후 에도의 새 막부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조선은 19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의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요청으로 국교가 재개되자 부산포 외 을 설치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역을 허용하는 기유의 약조를 체결하였습니다 선주 이어 주의한 광해군은 외란의 피해를 복구하고자 민생 안정 국가 재정 확충 사회질서 유지 등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을 정리하여 정확한 인구와 토지 파악을 통해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공납 제도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이원익의 권위로 경기도의 대동법을 실시하였습니다 대동법은 다양한 품목으로 거두던 공납을 쌀로 통일하여 납세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또한 파괴된 성각의 수리하고 불타버린 창덕궁과 사고를 재건하였으나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건강을 보살피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급성장한 여진족은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하였다 명은 외란 때 도와준 것을 내세워 조선의 지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광해군은 명예 요청을 거절할 수도 강성해진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이해 강홍립을 명의 원군으로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명령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강홍립이 장를 올리기를 신이 배동 관에 도착하여 먼저 통역관을 보내 밀기를 록 라에게 촉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기는 하나 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하지 않을 계획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진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료를 통해 광해군이 펼친 중립 외교의 방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광해군과 북인 정권의 외교는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양반층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서인 세력은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폐모 제가 일어나자이를 유교 윤리에 어긋난 정치라면 비판하였습니다 결국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인조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몹시 시기하고 모후를 원수처럼 보아 그 시기와 의심이 나나리 쌓여갔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해도에 안치하여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였다 이와 같이 인조 실록을 통해 인조반정 당시의 정세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인조 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인조가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괄의 잔당 세력이 후금에 투항하여 정묘 호란의 배경이 되었고 심상치않은 백성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호패법을 재실시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명예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 배금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한편 이괄은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었던 것에 불만을 품고 1624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난이 평정된 이후 일부 잔당은 후금에 투항하여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지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의 태종은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3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 호란을 일으켰습니다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까지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용골산성 봉수와 의주 지방의 이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함께 맞서 싸웠습니다 이에 복음가 끊어진 후금은 먼저 강화를 제한하였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그 후 후금은 명과의 전투에서 연 승리로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의 군신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이 조선 조정에서는 명기를 중심으로 외교적 교섭으로 해결을 주장하는 주화론과 김상헌 윤집 중심으로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1636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 호란을 일으켰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하였지만 청을 물리칠 힘이 없었던 조선은 항복할 수밖 그 결과 인조는 태종에게 아홉번의 절을 하며 예를 갖혀 항복하는 삼전도의 구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은과 군신관계를 체결하고 명과 국교를 하였으며 소연 세자와 훗날 종으로 기하는 봉림대군 그리고 척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과 악사을 비롯하여 많은 성들이 청 인질로 잡혀갔습니다의으로 평 황일 때는 크게 황폐해졌고 해마다 청에게 막대한 양의 공물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여진을 오랑캐로 여기던 조선은 문화적 자부심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는 사대관계 입각하여 다양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신의 왕래가 하였지만 한편에서는 조선의 문화가 명 못지않게 우수하다는 소중을 내세우며 청을 정벌하여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청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기한 효종은 주전론 펼쳤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 서인 세력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였습니다 효종은 성과 무기를 정비하고 어영청 등을 설치하여 군대 양성에 힘을 쏟았지만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원을 장악한 청을 정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대신들이 북벌을 북벌을 추진하던 마저 사망하자 정벌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한편 종 때 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의 출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두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하여 청을 도와 러시아군과 전하였습니다 청과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매년 청의 사신을 보내과 자주 하였습니다이를 서학이 조선에 전래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북학론이 제기되었습니다 한편 17세기 말 국경 지역의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인삼 채취와 사냥을 하다 청년들과 충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 양국간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숙종 때인 172년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는 백두산 1대를 답사하고 록과 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습니다 이후 조선과 청은 19세기에 이르러 토문 강의 위치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림은 선조 때 이조전랑 임명과 척신정치 청산 문제를 놓고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 후 붕당을 이루어 정치를 운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동인의 세력이 강하였고 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개기로 동이는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습니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득세하여 광해군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과 제도 개편을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북인과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으로 몰락하였고 이후 서인은 남인과 붕당 연합 체제를 이루어 전국을 이끌었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양난 이후 사회안전과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이 시기에는 당간 상호 공존과 비판이 비교적 잘 이루어졌으며 서원이나 향약을 통해 지방 사림의 여론을 모아 중앙정치에 반영하였습니다 따라서 향에서는 산림이 불리던 제야 사림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중앙에서는 공론을 주도하는 삼사의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이후 효종 때에는 북벌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다 종에 이어서는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나면서 당간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송은 효종과 효종비 계모인 자의 대비보다 먼저 죽자 자의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1959년과 1674년 버린 두 차례의 논쟁을 말합니다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은 주자 가리에 따라 왕과 일반 사대부의 예법이 같다고 주장하였고 남인을 대표하는 화목과 윤효은 주려나 예기 등을 근거로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의 예법이 똑같이 적용될 수 없으며 최고의 예우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659년 효종의 죽음이 발단이 된 기해 예성은 둘째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효종을 왕위를 계승한 장남으로 해석해야 할지 차남으로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서인과 나인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서인은 효정은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니 기연 복을 입어야 한다 주장하였고 남미는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하였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하여야 한다며 3년 복을 주장하였습니다 양측은 팽팽이 맞섰지만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었던 서인에 의해 연설이 채택되었습니다 효종이 돌아가셨을 때 예관이 장차 자유의 왕 대비해 복재를 논하려 하였는데 전 지평 윤한이 홀로 3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을 주장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자위 왕비서대 대왕의 상에 입어야 할 복재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떤이는 3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이는 기연 복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근거할 예문이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이와 같이 현종 실록을 통해 기해 예성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갑인 예성이도 불리는 2차 예성은 1674년 정비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벌어졌습니다 서인은 대공을 남인은 기복 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대비서 서거하셨습니다 효정 대왕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아닙니다 대왕 대비는 효종 대왕의 어머니라서 신하가 될 수 없고 효종 대왕은 둘째 아들이므로 대왕 대비해 상복입는 기간을 9개월로 해야 합니다 이처럼 갑인 예송에서 서인은 팽팽하게었고 예송논쟁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는 결과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은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두 당의 정치적 학문적 대립이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현중의 뒤를 이어 주기한 숙종은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였습니다 수도 및 군 수비를 위해 금형을 설치하여 형 체제를 완성하였고 통보를 시켰으며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 표시를 위해 백두산 개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집권당과 이을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며 전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을 여러차례에 거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서인과 아미는 번가라 집권하게 되었고 집권세력은 상대 당을 역적으로 몰아 배척하는 등 서로 가혹한 보복과 탄을 가하였습니다 80년에 벌어진 경신 환국은 남인인 허이 궁중의 물건을 허락없이 사적으로 사용하고 허적의 서자인 허이 영물을 모의하여 죄목을 받은 것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해 숙종은 남인 견제를 위해 적과 윤휴 등 남인을 [음악] 축출하였다 9년에 일어난 기사 환국은 왕비인 인현왕후가 오랫도록 후사가 없자 숙종이 훗날 경종이 되는 희빈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으려 한 것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서인이이를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인현 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5년 후인 1994년에 벌어진 갑술 환국은 인현왕후의 보기 문제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숙종이 패비 사건을 후회하던 중 서인이 패비 보규 운동을 전개하자 남인이이를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인현왕후와 송시열이 보규 및 복구되고 희빈 장시은 강등 당하며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환국의 결과 조선은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분당간 공존과 견제의 원칙이 무너지고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 경향이 나타났으며 사의 언론 기능 역시 변질되어 공론다는 자기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특히 숙종이 환국을 직접 주도함에 따라 왕과 가까운 외척이 종실 고위 관리들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으며 사익 추구를 비롯하여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개입하는 상황마저 벌어졌습니다 이해 숙종은 점점 격화되는 붕당의 대립 조정을 위해 탕평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와 대리 청정 문제로 대립하던 중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일찍 사망하자 경종의 이복 동생이었던 영조가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영조 죽이 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는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노론의 집권에 반대 하는 2인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영조는이를 진압하며 강력한 왕권을 얻었습니다 이후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이에 동의하는 탕평파 육성하였다 측근으로 삼아 전국을 운영하였습니다 특히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각 붕당의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세력 균형을 꾀하고 탕평의 의지와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자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각 붕당의 여론을 주도하는 살림의 존재를 부정하고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붕당의 집권 기반이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자 3사의 관리를 추천하던 관행을 폐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붕당 간의 극단적인 갈등이 점차 완화되었습니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심재를 시행하여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를 방지하였습니다 또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의 의견에 귀기 울리고자 신문고를 부활시키고 청계천을 준설하여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우리나라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 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의 평 정치로 인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지만이는 붕당의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실상 영조는 노론에 의존하는 정치를 하였고 국왕과 혼인 관계로 이어진 측근 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신 정치의 폐단이 발생하였습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할아버지였던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시파와 벽파의 갈등 속에 기하였습니다 정조는 영주의과는 달리 준론 탕평을 펼쳐 각 당파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렸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부터 세력을 키워온 외척과 환관 세력을 배척하여 영조때 탕평파 비판하였던 노론 소론 일부와 그동안 권력에서 제외되었던 남인 계열 등 붕당의 관계 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학술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책 자문 기구로 삼고 젊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하여 재교육하는 초개 문신제 실시하여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육성하였습니다 구왕 직속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뒤받침하는 군사 기반도 확보하였습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곳에 정약용의 주도로 화성을 건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적 능을 부여하였으며 자신의 이상정치을 목적으로 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화성에 자주 행하여 일반 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민생에 관한 성의 의견을 직접 듣고자 하였으며이를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조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습니다이 지방의 향 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뿐만 아니라 1791년 신내 통공을 실시하여 기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 전권을 폐지하였습니다 금난 권이란 허가받지 않은 상인이 장사하는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데이를 폐지함으로써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 또한 공비의 해방을 추진하는 노비 한별을 줄이고 서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여 서울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사관에 등용하기 하였습니다 정조는 다양한 편찬 사업을 통해 문화 발전과 학문 장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경국대전 속대전 및 여러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인 대전 편을 만들어 왕조의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고 외교 문서와 사신의 명단 등을 모은 동문 휘고 재정 업무와 관련된 사례를 모은 탁지지 군사 훈련 교범이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였다 한 계층의 성정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붕당 정치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결국 정치 권력이 국왕과 그 주변의 소수 정치 집단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이는 정조 사후 세도 정치가 출연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순조는 갑작스러운 정조의 사망으로 인해 11세의 어린 나이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영조의 비인 정순왕후는 순조를 대신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수렴 청정을 하였고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벽파 세력은 전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론 벽파는 1801년 자신들의 집배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고이를 이용하여 및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규장각 출신들을 몰아내고 구강 직속 친유 부대인 장용영을 혁하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중심에 안동김씨 세력들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세도 정치는 헌종의 외척 가문이었던 풍양조씨 철종의 외척 가문이었던 안동김 씨까지 3대에 걸쳐 60여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세도 가문은 정치적으로는 비변사의 요직을 비롯한 정부 주요 관직을 군사적으로는 훈련도감 등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의정부와 조 3사 등이 힘을 잃어 재기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왕권 또한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한편 몇몇 새도 가문의 권력이 집중되자 중앙정치 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반이 되거나 아예 권력을 잃어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는 잔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몰락하여 반란을 꾀하거나 농민봉기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정치 세력 사이의 경쟁구도는 물론 정책 비판 기능 역시 마비되어 세도 가문을 견제할 집단이 없었습니다 세도 가문들은 서로 혈관계를 맺으며 전국을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왕권은 미해지 국가 기강은 점차 해이해졌다 세도 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에 급제할 수 없었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새도 가문의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높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뿐만 아니라 관직을 뇌물로 사고하는 매관 매직이 성행하는 등 각종 비리가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뇌물로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그 결과 순조 대인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정대인 1862년에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하는 등 백성의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같습니다 세도정치 시기에는 수치 체제를 이용한 법 탈로 인해 나라의 살림이 어려워지고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이를 가리켜 삼정의 란이라는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제도인 전정과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를 납부할 수 있도록한 제도인 군정 봄에 관청의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 되돌려받는 곡식 대어 제도인 환곡을 말합니다 전에서는 토지대장에 없는 토지와 황폐한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또한 운송비 손실비 등 각종 명목의 부가세를 추가로 징수하여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납부하게 하였으며 지주는 소장에게 세금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정은 대부분 군역 대신 군포의 납부로 바뀌었습니다 군포는 양인 남자에게만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황정은 람에 수하는 백골징포 등과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군역을 피하려고 도망하는 사람의 군포를 이웃이나 친척에게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지배층에 잦은 수탈로 고통을 받던 농민들은 족보를 사들여 양반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고 노비로 위장하거나 도망하는 등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들이 군역을지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만 군포를 내게 되었고 이에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같습니다 특히 삼정 가운데 폐해가 가장 심각했던 환국은 여러 방면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관리들은 허위 문서를 작성하거나 환국이 필요치 않은 백성에게 강제로 배부하였고 심지어 환곡을 빌리지 않은 백성에게도 이자를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고리대 징수하는 일이 공공연히 이루어져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고통이 커지자 정부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수령이나 향리의 부정 부패를 단속하고 하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삼정의 문란은 농업의 파탄과 농민의 몰락을 가속시키고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홍경 내의 난 임술 농민 본기 등과 같은 농민봉기의 발생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에서 아주 자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로빈의 역사 기록 [음악]
영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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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구석기인이 살기 시작했어요. 약 70만 년 전부터였어요.

2. 서기와 뼈 도구를 사용하며 사냥과 가죽 벗기기를 했어요.

3. 찌개와 주먹도끼 등 석기들이 등장했어요. 석기 크기도 점차 작아졌어요.

4. 후기 구석기에는 돌날 돌이 만들어지고 창 끝 등에 활용됐어요.

5. 구석기인들은 동굴이나 강가에 집을 짓고 이동생활했어요.

6. 유적지인 평양 덕전, 충북 청원 등에서 화석 인골이 발견됐어요.

7. 1983년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어린아이 뼈가 발견됐어요.

8. 구석기 사회는 평등했고 경험 많은 자가 무리를 이끌었어요.

9.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다양한 동식물이 출현했어요.

10. 신석기 시대에는 강가와 해안가에 움집을 짓고 농경했어요.

11. 간석기와 토기를 만들어 곡물 저장과 조리를 했어요.

12. 빗살무늬 토기는 암사동 등에서 출토됐어요.

13. 농경과 목축을 하며 잡곡류와 벼농사도 했어요.

14. 사냥과 물고기 잡이도 계속 중요했어요.

15. 가락 바퀴와 뼈 바늘로 옷과 그물을 만들었어요.

16. 자연물 숭배와 애니미즘, 토테미즘도 믿었어요.

17. 기원전 2000년경 청동기 문화가 퍼졌어요.

18. 청동기 무기와 농기구, 토기들이 제작됐어요.

19. 강 주변에 집터가 형성되고 계급이 생겼어요.

20. 지배자는 왕이 아니었고 군장들이었어요.

21. 고인돌과 돌무지 무덤이 대표적 유적이에요.

22. 무덤 내부 벽화와 제사 풍습도 발견돼요.

23. 불교와 도교 문화도 수용됐어요.

24.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여러 나라가 형성됐어요.

25.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어요.

26. 단군 신화와 환웅, 곰 이야기 등 전설이 전해져요.

27. 고조선은 농경사회였고 하늘의 자손임을 자처했어요.

28.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유적이 대표적이에요.

29. 연맹 왕국인 부여, 옥저, 동해 등도 있었어요.

30. 부여는 농경과 풍습, 제천행사로 유명했어요.

31. 옥저와 동해는 해산물과 농경이 발달했어요.

32. 가야는 금관가야 신화와 철기 문화로 유명했어요.

33. 가야는 낙동강 하류에서 해상 무역을 했어요.

34. 신라의 역사는 기원전 57년부터 시작돼요.

35. 박혁거세가 초대 왕이고 경주 중심으로 발전했어요.

36.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경쟁하며 영역을 넓혔어요.

37. 진흥왕은 한강 유역과 동해안까지 확장했어요.

38. 진흥왕은 순수비를 세우고 왕권을 강화했어요.

39. 신라는 유교와 불교를 함께 수용하며 문화 발전했어요.

40. 무덤 양식은 돌무지 덧널 무덤이 주류였어요.

41. 벽화와 유물, 불상 등 문화재도 많이 남았어요.

42.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경과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어요.

43. 백제는 일본과 교류하며 문화와 기술을 전파했어요.

44. 무령왕릉 등 벽돌 무덤과 건축도 발달했어요.

45.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문화 발전을 이뤘어요.

46. 일본에 가야금과 음악, 도자기 기술도 전파됐어요.

47. 백제는 4세기 후반 고구려의 공격에 저항했어요.

48. 한강 유역을 잃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49.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거나 독자적 성장했어요.

50. 장수왕은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 남부까지 확장했어요.

51. 국내성에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영토를 넓혔어요.

52.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어요.

53. 왕권 강화와 유교 정책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했어요.

54. 진흥왕은 불교와 화랑도를 적극 활용했어요.

55. 삼국은 서로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했어요.

56. 고구려는 벽화와 건축, 불상 등 문화도 발전시켰어요.

57.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과 외교도 치열했어요.

58. 고구려는 수와 당의 침략에 강력히 저항했어요.

59. 멸망 후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켰어요.

60. 고려는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왕권을 강화했어요.

61.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개경을 수도로 정했어요.

62. 후백제와의 경쟁과 전투도 많았어요.

63. 고려는 몽골 침입과 전쟁도 겪었어요.

64. 몽골과의 강화를 통해 내부 혼란도 있었어요.

65.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정치 체제도 바뀌었어요.

66. 태조 이성계는 왕권을 강화하며 조선을 세웠어요.

67. 정도전은 유교적 통치 이념을 확립했어요.

68. 세종은 과학, 문화, 군사 등 여러 분야 발전시켰어요.

69.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도 있었어요.

70. 문화재와 유적, 기록들이 남아 있어요.

71. 조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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