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은 영웅 신화를 왜 망쳤을까? 오디세이 재해석 분석
영화 <오디세이> 리뷰: 놀란 감독이 신화를 재해석한 방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디세이>를 만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란이 호머의 무덤을 더럽혔다"고 난리였어. 일론 머스크도 그랬지. 영화 개봉 전부터 인터넷은 이미 전쟁터였어. 왜 헬렌은 흑인 배우냐? 왜 트랜스젠더 배우가 고대 그리스 전사를 연기하냐? 솔직히 나도 예고편 보면서 좀 불안했거든. 근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지. 놀란 감독은 처음부터 영웅 이야기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는 걸.
오늘은 2026년 최고의 영화, <오디세이> 리뷰를 해볼게.
1. 캐스팅 논란? 알고 보면 완벽한 선택!
가장 큰 논란은 역시 캐스팅이었어. 헬렌 역에 루피타 뇽, 시논 역에 엘리엇 페이지. 인터넷은 개봉 전부터 뜨거웠지. "왜 헬렌은 흑인이야?", "왜 트랜스젠더 배우가 고대 그리스 전사를 연기해?"
솔직히 나도 예고편 보고 좀 걱정했어. 혹시 배우의 이미지 때문에 캐릭터를 바꾼 건 아닐까 하고. 근데 영화를 직접 보니, 그 논란의 배우들이 오히려 캐릭터를 완벽하게 완성하더라고.
헬렌: 원래 신화에서 헬렌은 "천 척의 배를 띄운 얼굴"로 유명하잖아. 근데 영화 속 헬렌의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어. 이건 원래 신화에는 없는 설정인데, 영화는 누가 그 상처를 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 대신 메넬라오스가 헬렌의 얼굴을 거칠게 잡으며 비웃는 장면이 나오지. 한때 천 척의 배를 띄웠던 얼굴이 이제 겨우 다섯 척 정도밖에 안 된다고.
이 흉터의 범인을 밝히기보다, 영화는 먼저 헬렌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를 보여줘. 전쟁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이용당했고, 전쟁 후에는 망가진 아름다움 때문에 조롱당했지. 루피타 뇽의 캐스팅은 바로 여기서 빛을 발해. 루피타 뇽이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헬렌 하면 떠올리는 금발 백인 미녀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던 거야.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든, 한 여자의 얼굴이 10년 동안 지속된 전쟁의 진짜 이유가 될 수는 없잖아. 남자들은 권력과 정복을 위해 전쟁을 벌였고, 그 책임을 헬렌의 얼굴에 떠넘긴 거지. 헬렌은 전쟁을 시작한 여자가 아니라,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당한 사람이었던 거야.
시논: 시논은 좀 더 복잡해. 영화에서 시논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보내진 인물이야. 10년의 전쟁을 살아남았지만, 화면 속 그는 완전한 어른도, 아이도 아닌 모습으로 보여. 바로 여기서 엘리엇 페이지의 캐스팅이 중요한 역할을 해. 그의 작은 체구와 어린 듯한 외모가 주변의 거구의 전사들과 대비되면서, 시논의 미성숙함과 연약함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단순히 트랜스젠더 배우라서 역할에 어울렸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남자 전사'의 이미지와 다른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시논이 이 전쟁에 얼마나 부적합한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야. 그는 영웅이 되고 싶었지만, 영웅담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소모된 인물이었지.
트로이 목마는 오디세우스의 기발한 전략으로 기억되지만, 그 전략이 성공하려면 시논이라는 인물이 필요했어. 그는 트로이 앞에 홀로 서서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해야 했지. 오디세우스는 영웅으로 기록되지만, 시논은 영웅담을 이어가기 위한 장치로 남았어.
헬렌과 시논, 두 인물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핑계'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도구'였어. 둘 다 영웅 서사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도둑맞은 사람들이지. 놀란 감독은 그 자리에 루피타 뇽의 흉터 있는 얼굴, 엘리엇 페이지의 체구와 흔들리는 눈빛이라는 구체적인 얼굴들을 가져다 놓은 거야. 정치적 올바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캐릭터를 다양하게 보여주기 위해 캐스팅을 바꾼 게 아니라, 오히려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캐릭터를 더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2. 현실감 넘치는 신화의 재현
놀란 감독은 신화를 현실적으로 만든다고 했어. 이게 단순히 CG를 덜 썼다는 뜻이 아니야. 괴물과 마법에 실제 무게감과 촉감을 부여해서, 인간의 몸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인간성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를 우리 눈앞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해주는 거지.
키클롭스 동굴: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는 CG가 아니야. <인터스텔라>에서 로봇 TARS를 연기했던 빌 아이윈이 실제 동굴 안에서 60피트짜리 실물 크기 꼭두각시를 조종하며 연기했지. 그래서 키클롭스가 무섭다는 걸 알면서도 믿게 돼. 아무리 정교한 CG 거인이라도 화면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근데 이 키클롭스는 동굴 바닥을 딛고, 병사들의 살점을 씹을 때 나는 소리와 무게감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놀란 감독의 영화는 잔인한 장면을 길게 보여주거나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중요한 순간에 화면을 끊거나, 피해의 결과보다는 그 장면이 캐릭터에게 남기는 충격에 집중하지. 이번에도 수위를 낮췄지만, 꽤 잔혹해. 어두운 동굴, 거대한 시선, 비명, 무언가를 씹는 소리…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만드는 요소가 더 많아. 하지만 배우와 실제 소품의 크기 차이를 이용해 촬영했다는 걸 알면, 공포가 더 직접적으로 다가와.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같은 공간 안에서 작은 인간의 몸을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보이지. 판타지 모험보다는 생존 호러에 가까워.
키르케의 섬: 이 끔찍함이 절정에 달하는 장면은 키르케의 섬이야. 굶주린 병사들이 음식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먹기 시작하지. 그리고 키르케가 나타나는 순간, 그들의 얼굴과 몸이 천천히 뒤틀리기 시작해. 코가 튀어나오고, 입과 피부가 점토처럼 변해. 늘어나면서 돼지의 형상이 인간의 얼굴 위로 밀고 들어오지. 이 장면을 보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이 떠올랐어. 근데 기예르모 델 토로가 실사로 찍고 놀란 감독 특유의 무겁고 절제된 스타일로 다시 한번 다듬은 느낌이었달까. 마법이 반짝이는 빛이나 연기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살과 뼈가 실제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표현되니까 마법 장면이 아니라 완전한 바디 호러가 되는 거야.
근데 이 장면이 단순히 끔찍해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게 아니야. 키르케는 "내가 돼지가 된 건, 내가 돼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하지. 낯선 사람들이 결국 자신을 해칠 거라고 믿고,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인간의 형태를 빼앗아버린 거야. 사실 병사들은 키르케를 공격할 의도가 없었어. 하지만 키르케는 이미 병사들의 폭력과 탐욕을 확신하고 있지. 원작에서는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연인이었고, 섬에서 약 1년 동안 함께 보내지만, 영화는 그 로맨스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키르케를 짧고 무서운 존재로 바꿔버렸어.
그래서 이 장면에서 중요한 건 키르케의 매력이 아니라, 배고픔과 탐욕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이미지야. 생각해보면 병사들은 마법에 걸려서 갑자기 돼지로 변한 게 아니야. 음식을 발견한 순간부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이미 인간적인 판단력을 잃었던 거지. 어쩌면 마법은 그들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신시킨 게 아니라, 그 순간 그들 안에 있던 형태를 몸 밖으로 끄집어낸 것뿐일지도 몰라.
3. 무너지는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
영화는 시작부터 '크세니아'라는 단어를 꺼내. 고대 그리스의 환대 원칙이지. 낯선 사람과 손님을 보호하고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거야. 단순히 예의 바르게 사는 게 아니라, 바다를 건너야 했던 시대에 누구나 낯선 땅에서 여행자가 될 수 있었고, 오늘 내가 손님을 환대하듯 내일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크세니아는 낯선 사람을 무엇보다 인간으로 대하겠다는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제우스가 직접 관장하는 신성한 의무였지.
근데 <오디세이>가 시작될 무렵, 이 법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어. 이타카에서는 구혼자들이 오디세우스의 궁전에 쳐들어와 가축과 음식을 먹어치우고 페넬로페와 왕좌를 차지하려 하지. 손님이 주인 자리를 완전히 빼앗으려는 격이지. 그리고 트로이에서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져.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포기하는 척하며 거대한 나무 목마를 해안에 남겨두고 철수해. 평화의 상징, 신들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이라고 믿었던 트로이 사람들은 그 의미를 믿고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어들여. 그리고 밤이 되자, 그 선물 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기어 나와 성문을 열고 도시를 불태우고 무장하지 않은 사람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시작하지.
트로이 목마는 단순한 기발한 전략이 아니었어.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뢰, 즉 선물이 악의가 없다는 믿음, 신들에게 바친 물건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괜찮다는 믿음을 전쟁의 무기로 바꿔버린 사건이었지. 10년 동안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지만, 그 승리를 위해 사람들 사이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린 셈이야.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우리는 제우스의 법을 영원히 어겼다"는 대사가 무겁게 다가오는 거야. 그날 단 하나의 규칙을 어긴 게 아니라는 거지. 선물 안에 병사를 숨기면, 다음 선물도 순수하게 믿을 수 없어. 손님이 주인을 죽이면, 다음 여행자를 기꺼이 집에 들이기 어려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에서 사용된 의심이 남아있지. 상대가 속일 테니까 먼저 속이고, 상대가 공격할 테니까 먼저 칼을 뽑는 거야. 이 논리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만남은 전쟁이 돼.
앞서 본 키클롭스와 키르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키클롭스는 낯선 사람을 손님이 아닌 먹잇감으로 보고, 키르케는 아직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남자들을 미래의 가해자로 단정하지. 마찬가지로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낯선 땅에 도착할 때마다, 상대방의 상황을 듣기보다 먼저 음식과 전리품을 찾지. 누가 먼저 법을 어겼는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게 돼.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폭력을 확신하기 때문이야.
이타카의 구혼자들도 똑같은 붕괴를 반복해. 그들은 환영받는 손님으로 오디세우스의 집에 들어왔지만, 그 환대를 악용해서 집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 트로이 사람들은 평화의 선물을 믿었다가 도시를 잃었고, 오디세우스의 가족은 손님을 받아들였다가 궁전을 잃을 위기에 처해. 오디세우스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주인을 몰아냈던 방식이, 단지 다른 형태로 그의 집으로 돌아온 거야.
그래서 영화에서 "우리는 제우스의 법을 영원히 어겼다"와 "우리의 청동기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두 대사가 하나처럼 들렸어. 트로이 목마 하나가 실제로 청동기 시대를 끝낸 게 아니라는 거지. 오히려 시대가 무너지기 전에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무너진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어. 선물은 함정이 되고, 손님은 침입자가 되고, 낯선 사람은 먼저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먼저 제거해야 할 적이 되는 거야.
근데 왜 놀란 감독은 수많은 시대 중에서 이 수천 년 전의 법을 다시 꺼내 들었을까? 그의 전작 <오펜하이머>를 떠올리면 이유가 좀 더 명확해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 10년 전쟁을 끝냈지. 둘 다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한 천재였고, 그 해결 덕분에 역사에 영웅으로 남았어.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지. 오펜하이머가 만든 폭탄은 전쟁을 끝내면서 동시에 인류가 언제든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어. 오디세우스가 만든 트로이 목마도 트로이 전쟁을 끝내면서, 신성한 선물과 환대조차도 학살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남겼지. 승리를 위한 방식이 전쟁 후의 세상도 바꿔놓은 거야.
그래서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 이후 차기작으로 <오디세이>를 선택한 것이 우연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 과거의 과학자와 가장 오래된 신화의 영웅… 시대는 다르지만, 무기는 다르지만, 두 사람은 같은 경계선 앞에 서 있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세상이 지켜온 선을 넘는 것이 허용되는가? 그리고 그 선을 넘어서 얻은 승리가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계속되는 무력 충돌을 보면서,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서로를 지칭하는 단어가 어떻게 변하는지 목격했어. 이웃은 적이 되고, 민간인은 숫자가 되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행위 자체가 배신으로 취급되지.
그래서 크세니아는 모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단순한 해결책이 아니야. 낯선 사람을 잘 대하면 세계 평화가 올 거라는 순진한 처방도 아니고. 오히려 놀란 감독은 전쟁 전에 무엇이 사라지는지를 묻고 있어.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는 태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조차 인간으로 보려는 마음. 그런 최소한의 약속이 사라진 후에야 폭력은 너무 쉽게 정당화되지. 역사는 언제나 그 폭력 속에서 새로운 영웅들을 기록해: 오펜하이머와 오디세우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영화에서 영웅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아. 그것은 자신이 넘어선 선을 기억하면서, 그 후에 만들어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에 더 가까워.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그 기억을 신들의 저주라고 부르지.
4. 신들의 침묵, 혹은 내면의 목소리
근데 정말 신들의 분노가 그를 따라다녔던 걸까? 영화에서 신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포세이돈은 폭풍과 파도로 존재하고, 제우스는 번개와 천둥으로만 느껴지지. 사실 아테나는 거의 유일하게 직접 얼굴을 보여주는 신이야. 근데 아테나는 오직 오디세우스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해. 처음에는 그저 신화적인 장치, 신이 자신이 선택한 영웅에게만 길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나는 익숙한 설정처럼 보일 수 있어.
하지만 영화 중반부 이후, 우리는 이 장면들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해. 트로이가 함락되던 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어린 여자를 봐. 그리고 동시에 병사들은 신전 안의 아테나 조각상을 모독하지. 나중에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난 아테나는 그 희생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영화는 그 여자가 정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테나였는지, 아니면 오디세우스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외면했던 얼굴을 신성한 형태로 다시 보는 것인지 영화의 마지막까지 명확하게 확인해주지 않아.
바로 그 모호함 때문에 나는 아테나를 오디세우스 바깥의 신이 아니라, 그의 죄책감이 빌려온 얼굴로 보게 되었어. 그가 외면했던 희생자들, 트로이 목마로 도시를 불태웠던 사람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어간 수많은 남자들… 오디세우스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신들의 저주라고 불러. 제우스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포세이돈이 그의 귀환을 방해한다고 믿는 거지.
하지만 모든 것을 신들의 저주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쉬울 수 있어. 그의 부하들의 죽음, 난파, 20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 모두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내린 벌이 되는 거잖아. 그러면 이 모든 비극이 자신의 선택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 잠시 동안은 밀어낼 수 있지. 하지만 아테나는 그런 변명을 허용하지 않아.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대신해서 심판하거나 그의 죄를 씻어주는 신이 아니라, 그가 외면했던 순간들을 반복해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야.
그래서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신들에게 쫓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기억에 쫓기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원작에서는 아테나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도와. 포세이돈이 그의 길을 막으면 신들 앞에서 그를 변호하고, 이타카에 돌아온 후에는 구혼자들을 물리치는 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하지만 영화는 인간 바깥의 신들의 개입을 줄이고, 그 목소리를 오디세우스 안으로 옮겨와. "신들은 왜 침묵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이 신의 목소리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자신의 양심은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옮겨가는 거야.
물론 이 선택에는 대가가 있어. 원작에서 인간을 압도했던 신들의 존재감이 오디세우스의 심리로 축소되면서, 신화 특유의 낯설고 웅장한 느낌이 다소 줄어들 수 있지.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이 있는 각색이 아니라, 고대 신화를 현대적인 죄책감 이야기로 납작하게 만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그 손실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신이나 운명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 해석은 영화 중반부의 또 다른 반전과 연결돼. 사람들은 바다에서 온 침입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마을을 습격하고, 음식을 훔치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말이지. 오디세우스도 처음에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야만적인 집단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바다에서 온 사람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어. 바로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이었지. 그들은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방문한 섬과 마을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훔치고 칼을 휘두르기 위해 바다에서 나타난 침입자였던 거야.
영웅과 약탈자의 차이는 누구의 이야기에 서 있느냐에 달려있어. 그리스인들에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영웅이지만, 트로이 사람들에게 그는 평화의 선물 안에 병사를 숨겨 도시를 파괴한 학살자였지. 그에게는 귀향의 여정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침략이었던 거야.
하지만 돌이켜보면, 오디세우스가 내린 모든 선택에는 항상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어. 전쟁을 끝내기 위해 트로이 목마가 필요했고, 살아남기 위해 괴물을 속여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했지. 문제는 모든 선택이 항상 오디세우스 자신의 생존으로 이어졌다는 거야. 그와 함께 출발했던 부하들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결국 오디세우스 혼자만 남았지. "내가 왜 살아남았을까? 내가 내린 결정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그가 짊어진 것은 단순히 죽은 자들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어. 그들의 죽음에 자신이 관여했다는 사실에 대한 고뇌였지.
그리고 마침내 이타카에 돌아온 후에도 그의 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어. 구혼자들이 궁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 오디세우스는 다시 한번 칼을 뽑아 들었지. 그들은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페넬로페와 왕좌를 찬탈하려 했어. 그들은 환대의 법을 어기고 오디세우스의 가족을 위협한 자들이었지. 하지만 그들을 모두 죽인 순간,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트로이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반복했어. 문을 닫고, 탈출구를 막고, 안의 사람들을 하나씩 죽였지. 트로이에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고, 이타카에서는 가족과 집을 되찾기 위해서였어. 정당성은 바뀌었지만,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영웅이 단순히 제자리를 되찾는 완벽한 결말이 될 수 없어.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 안에 남은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거지. 결국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에게 왕좌를 넘겨주고 페넬로페와 함께 다시 서쪽으로 떠나. 고대 그리스의 상상 속에서 서쪽은 종종 석양, 세상의 끝, 지하 세계와 같은 이미지와 연관되는 방향이야. 그래서 나는 이 항해를 그의 실제 죽음보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상징적인 죽음에 더 가깝다고 보았어. 영화는 그의 육체적인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그의 시신은 살아있는 채로 이타카에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영웅으로서, 왕으로서,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이끈 전설적인 전략가로서, 그날은 끝이었지. 텔레마코스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오디세우스는 자발적으로 왕관을 내려놓았어. 20년 만에 되찾은 자리를 자신의 손으로 넘겨준 거야.
원작에서는 아테나가 구혼자 학살 이후 복수의 고리를 멈추고 오디세우스의 왕권을 회복시키면서 이야기가 끝나. 신화적인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완성되지. 하지만 놀란 감독의 오디세우스는 집에 돌아온 후에도, 오히려 과거의 영웅으로 살지 않기로 선택했을 때 비로소 완성돼. 만약 아테나가 오디세우스를 왕좌로 돌려보내려는 여신이었다면, 그가 다시 왕좌에 앉는 순간 그녀의 역할은 끝났을 거야. 하지만 만약 아테나가 오디세우스 자신의 양심이었다면, 왕관을 되찾았다고 해서 그 목소리가 쉽게 잠잠해질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그는 왕좌에 머물지 않고 다시 서쪽으로 떠나는 거야.
전쟁은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역사는 승리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전략과 업적을 기록하지. 하지만 놀란 감독이 보는 영웅은 조금 달라. 그것은 자신의 행동의 무게를 신이나 운명 탓으로 돌릴 수 없고,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야. 영화는 마지막까지 계속돼. 신들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 왜냐하면 오디세우스를 벌하기 위해 바다에서 신이 솟아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야. 그가 외면했던 희생자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의 결정 때문에 사라진 남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영웅이라고 불릴 때마다 영웅담 아래 묻혔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그 기억이 오디세우스에게 가장 긴 형벌이었던 거야.
그래서 <오디세이>에서 가장 무서운 신은 포세이돈도, 아테나도 아니야. 바로 자신 안에서 소환되는 신,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따라붙고, 승리가 끝난 후에야 말하는 신. 바로 '죄책감'이지.
최종 평가
자, 이제 이 리뷰의 마지막 점수를 남겨볼게. <오디세이>는 별 5개 만점에 4.5점이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 OTT, 유튜브,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는 지금도 왜 영화관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몸소 증명하는 감독이라는 거지. <오디세이>는 거의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1막부터 3막, 그리고 클라이맥스까지 끌고 가. 어쩌면 "끌고 간다"는 표현보다는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몰라. 익숙한 신화를 가져와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할 때마다 매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 전쟁 영웅을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으로 바꾸고, 괴물과 마법에 실제 살과 무게감을 부여하고, 수천 년 동안 반복된 이야기를 이렇게 신선하게 재해석한 것은 영화적인 차원을 넘어 문학적인 차원에서도 경이로웠어.
하지만 해석만 무거운 영화는 아니야. 바다와 전투, 키클롭스와 키르케,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폭발하는 긴장감까지, 예술적인 가치와 오락적인 재미를 모두 놓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오디세이>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또 다른 걸작이자, 2026년에 꼭 극장에서 경험해야 할 영화로 기억하게 될 것 같아.
오늘 이야기를 들은 분들은 댓글로 <오디세이>를 어떻게 보셨는지, 영화 속 아테나를 실제 신으로 보셨는지 아니면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으로 보셨는지 자유롭게 의견을 남겨주세요. 구독과 알림 설정을 하시면 다양한 영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필름 그린의 박그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