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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사연) 오갈 곳 없던 나를 가정부로 들여 동생들 다 대학 보내게 해준 사모님 유언에 따라 새사모에게 봉투를 전하자 내인생 기적 /감동사연/사이다사연/라디오드라마/사연라디오

게시일: 작성자: 자청의 유튜브 추출기

도시락 가게 사장님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

나는 남동생과 함께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처음엔 작게 시작했는데, 지금은 서울에 여러 지점을 둔 제법 큰 가게가 되었지. 며칠 전 아침, 가게에 출근했더니 남동생이 묻더라. "누님, 오늘이 그날이죠?" 맞아, 매년 이맘때쯤이면 꼭 가는 곳이 있거든. 남동생의 걱정을 뒤로하고 나는 서울 외곽의 추모공원으로 향했어. 그곳엔 내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분이 잠들어 계시거든.

산소 앞에 놓인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인사했지. "사모님, 저 왔어요. 춘천댁이에요. 작년에 찾아뵙고 벌써 1년이 지났네요. 가게도 하나 더 냈어요. 이렇게 사람 구실하고 사는 것도 다 사모님 덕분이에요."

사모님은 내가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나를 따뜻하게 받아준 유일한 분이었어. 20대 초반, 시골에서 상경해 동생들 학비 보태려고 입주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지. 사모님 집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번 돈은 대부분 친정으로 보냈고, 덕분에 두 남동생은 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어. 사모님은 내게 은인이자 가족 같은 분이었지.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사모님의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결국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매일 마음이 무거웠지. 그러던 어느 날, 사모님이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어. "춘천댁아, 나 이제 얼마 못 살 것 같아. 그동안 나랑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난 네가 진짜 가족 같았어." 사모님은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시며 부탁하셨지. "내가 떠나고 나면 우리 양반이랑 애들이 어떻게 살지 걱정이야. 춘천댁만큼 믿을 사람이 없어. 조금만 더 우리 집 살림을 봐 줘. 그리고 만약 남편이 재혼하게 되면, 그 사람한테 이 봉투 꼭 전해 줘." 며칠 뒤, 사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어.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집에 남아 사모님 가족들을 돌봤지. 사모님이 맡기신 봉투는 손도 대지 않고 서랍 깊숙이 넣어뒀어. 2년 뒤, 사장님이 재혼하셨고 새 사모님이 집에 들어온 첫날, 나는 봉투를 꺼내 새 사모님께 건넸지. 봉투를 열어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어. 그날 봉투를 열어본 뒤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내 고향은 강원도 시골이었어. 방 한 칸짜리 낡은 집에서 부모님과 두 남동생과 살았지. 아버지는 늘 아프셨고, 어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셨어. 나는 장녀로서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나가 돈을 벌었지.

스무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내게 결혼을 권하셨어. 상대는 군청 다니는 공무원이었지만, 이미 한번 이혼한 사람이었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 하지만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승낙했어. 결혼 후 몇 달 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작했지. 남편은 술만 마시고 외박하기 일쑤였고, 시어머니는 나를 구박했어. 아이도 생기지 않자 시어머니의 구박은 더 심해졌지.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말했지만, 시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탓했지. 얼마 뒤, 남편의 전처가 바람 때문에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거의 사기나 마찬가지였지. 결국 나는 이혼을 요구했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어.

친정 형편은 더 어려워져 있었어. 어머니는 무릎이 성치 않아 걷는 것도 힘들어하셨고, 동생들은 아직 학생이었지. 나는 다시 반일을 시작했지만, 벌이는 턱없이 부족했어. 그때, 중학교 동창인 친구가 찾아와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지.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서울에 가서 일하기로 결심했어. 동생들 학비라도 벌어주고 싶었거든.

서울에 도착해서 소개받은 집에 갔지만, 이미 다른 가정부가 와 있었어. 당황스러웠지만, 그때 옆집 사모님이 나를 불렀지. "괜찮으면 이 집 말고 우리 집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요?" 그렇게 나는 사모님 집에서 일하게 되었어. 사모님은 나를 '춘천댁'이라고 부르며 친절하게 대해주셨지. 사모님은 집안일이나 요리에 익숙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해왔기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어.

사모님은 나를 딸처럼 아껴주셨고, 함께 시장 구경도 가고 백화점에도 갔지. 내 생일에는 처음으로 예쁜 원피스를 선물해주셨어. 사모님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받는다는 것을 느꼈지.

사모님 집에서 일하면서 우리 집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고, 마침내 동생들의 대학 입학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어. 그런데 어느 여름,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지. 병원에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를 보며, 사모님은 직접 죽을 쑤어다 주셨지. "춘천댁아, 이러고 있으면 못만 죽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면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어. 이러지 말고 죽이라도 먹자." 사모님의 따뜻한 말에 나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어.

사모님은 내게 월급도 올려주시고, 목돈이 필요할 때는 빌려주시기도 했어. 덕분에 두 남동생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까지 얻을 수 있었지. 동생들이 모은 돈으로 사모님께 빌린 돈을 갚았을 때, 사모님은 기쁘게 돈을 받아주셨어.

그렇게 20년 가까이 사모님 집에서 일했어. 사장님 사업도 번창했고, 사모님 자식들도 모두 잘 되었지. 사모님은 나에게 음식점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어. 그때부터 나도 언젠가 작은 식당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지.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사모님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어. 결국 위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사모님은 내게 마지막 부탁을 하셨어. "내가 죽고 나서도 자네가 우리 집 살림을 조금만 더 봐주면 좋겠어. 그리고 만약 남편이 재혼하게 되면, 그 사람한테 이 봉투 꼭 전해 줘."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5년 뒤, 사장님이 재혼하셨어. 새 사모님이 집에 오신 날, 나는 사모님이 맡기신 봉투를 건넸지. 봉투 안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고, 새 사모님과 사장님은 그 편지를 읽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 편지에는 사모님이 나를 위해 써놓은 내용이 담겨 있었지. "춘천댁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당신에게 우리 춘천을 잘 부탁할게요."

새 사모님은 나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고, 사장님도 퇴직금이라 생각하고 돈을 주시며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하셨지. 하지만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살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 사모님이 응원해주신 마음을 등불 삼아, 나는 작은 도시락 가게를 시작했어.

처음엔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내 음식을 맛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가게는 조금씩 번창했지. 지금은 동생까지 함께 일하고 있어. 매년 사모님 기일이 다가오면 꽃다발을 사 들고 사모님을 찾아가. 그분이 내게 베풀어주신 따뜻함과 믿음, 그리고 그 손편지 한 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돌이켜보면 나는 참 오래도록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살았던 것 같아. 그런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자리를 만들어주신 사모님 덕분에 나는 마침내 내 자리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지. 이제 나는 그 자리를 지키며, 사모님처럼 누군가의 등을 또 조용히 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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