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제자 중에 하나로서 디드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그의 손의자국을 내 손가락을 그자국에 넣으며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다쳤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내 손가락을 이리내밀러 내 손을 보고 내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우리 29절은 같이 읽을까요? 예수께서 시작되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시라 아멘 오늘 우리의 구원과 소망되신 주님께서 그 어떤 것도 이기시되 사망의 권세까지 깨뜨리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서시고 돌파하시고 승리하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 오늘 제가 도마라는 잘 알려진 제자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자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바뀌 죽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도마라는 제자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중에 유달리 의심 많고 잘 믿지 못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특별히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한 찬송가 300 135장 보면요.
의심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성경 구절에서 의심 많다는 말은 없습니다.
없는데 찬송가 이렇게 박제시켜 놨어요.
그래서 뭐 찬송 물어다 보면 아 어려이 도많은 의심 많구나 이렇게 낙인 찍어 버리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저는 오늘 좀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의심이 많은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 여러분 의심이 없으시군요.
저는 교회 다니면서 참 의심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얘기해 볼까요? 안 믿어지는데도 믿는 척 하는 거보다 차라리 도저히 못 믿겠다.
나는 의심스럽다라고 말하는게 훨씬 더 용기 있는 건 아닙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니신 분들은 그럴 거예요.
성경 속 이야기가 늘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해요.
그냥 늘 들어왔기 때문에 그냥 믿는데요.
글쎄요.
한 번도 그런 의심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런데 저는 교회 다니면서 여러 가지가 낯설고 어색하고 때로는 의심스러웠습니다.
이 이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는데 국어 사전 만한 책에서 도대체 어디를 펼쳐야 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성경을 곧곳 읽으면서 이걸 왜 잃었지? 이건 왜 이렇지? 너무 궁금한게 많았습니다.
한두 가지만 예를 들까요?이 시간 설명을 해 드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태초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넷째 날에 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냐이 말입니다.
의심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 저를 한번 따라서 하시죠.
의심하는 것은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여러분,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의심하고 왜 그런지 물어보고 그래야 제대로 할 수 있죠.
이번 특별 새벽 기도의 첫 번째 날 말씀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같이 창조하셨습니까? 따로 창조하셨습니까? 따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 혼자 있는 걸 보고 복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평가하십니까? 이상하잖아요.
저는 오늘 도마에게 우리 도마 형님에게 의심 많다는 꼬리표를 확실히 떼기 위해서이 강단에 올라왔습니다.
이해가 안 되고 믿어지지 않아서 못믿다.
못 믿겠다고 말하는 것은 의심 많은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입니다.
회의하고 의심하는 과정을 거칠 때 믿음은 더 견고해지고 깊어집니다.
여러분, 내가 정말 성숙한 믿음의 과정으로 가는 길에 난 다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분은 정말 천연 기념물입니다.
정말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믿음의 은사를 주시기로 작정하신 0.
01%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의심합니다.
그런데 그 의심은 성숙과 깊은 믿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거죠.
저는 청년 시절 성경을 읽으며 끊임없이 의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왜 이렇지? 끊임없이 물었어요.
그 시간이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무조건 덮어 놓고 믿는 것은 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한번 따라서 하시죠.
덮어놓고 믿지 말고 덮어놓고 믿지 말고 펼쳐놓고 믿겠습니다.
펼쳐놓고 믿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펼쳐놓고 믿으려면 의심이 가고 이해가 안 되면 물어봐야죠.
교회는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솔직한 감정을 숨기라고 강요하는 것이 되어서 안 됩니다.
저는 이거 안 믿어지는데요.
이거 왜 그래요? 언제든지 찾아와서 질문하십시오.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에게 눈치 주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아 저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그럼 기도하면 되는 것이죠.
물론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눌 때는 반드시 사랑과 존중이라는 태도의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자,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도마는 의심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니까 찬송가 135장 3절 가산을 저는 바꾸고 싶어요.
도마는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20장 24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하필 그 자리에 도마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24절 말씀은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2제자 중에 시작.
12제자 중에 하나로서.
자, 그러니까 여러분이 디두모라는 것은 이제 헬라오로 쌍둥이란 뜻인데 도마 역시 같은 뜻에 알아봅니다.
그 아마 도마는 쌍둥이 형제 중에 하나였던 거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죽으신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도마가 없었어요.
가론 유다는 죽었으니까 열명의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는데 그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가로 유다를 제외한 열명의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감격하고 흥분했겠어요.
자, 그리고 그 예수 예수님께서 열명의 제자들을 만난 사건이 바로 그 위에 기록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0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여러분 손과 여기서부터는 같이 읽읍시다.
시작.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때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문을 꼭 걸어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친 문을 뚫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 한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거 십자가에 못 바뀐 내 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손목이죠.
손목 뼈 사이를 이제 못 받는 거예요.
그리고 로마 병정의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쏟으셨던 그 옆구리 구멍난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열명의 제자는 도마를 제외한 열명의 제자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망 선고를 받은 예수님을 생생하게 목격한 겁니다.
오 진짜 주님이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모든게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갈릴리 고기 잡던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겁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이 자리에 누구만 없었다고요? 저를 따라서 하시죠.
도마만 없었습니다.
도마만 없었습니다.
칼질할 때 쏘는 그 도마 말고요.
예수님 제자도마하는 겁니다.
여러분 잘 들으셔야 됩니다.
자 그러니 열명의 제자들은요.
어쩔 줄 모르는 희열과 감격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야 정말 주님이 다시 살아렸어.
이야 이야 이게 꿈이야 생시야.
어 그런데 도마가 어디 갔지? 아 참이 친구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어디 간 거야? 그럼 여러분 조금 있다가 예수님은 떠나시고 도마가 왔다면 부활했다는 사실을 도마한테 말해 줘야 되겠습니까? 입닫다야 되겠습니까? 말해 줘야죠.
그래서 25절에 보면 제자들이 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25절 읽겠습니다.
우리 같이 읽으시죠? 다른 제자들이 시작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를 하니 여러분 여기서 이르되라는 말은 어떤 뜻이냐면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헬라우 성경 원문을 보면 미완료 시절로 돼 있어요.
이건 계속 얘기한 겁니다.
야 부활한 주님을 봤다니까 부활한 주님을 봤다니까 진짜 주님 부활하셨어.
내가 못 적극난 손도 만져봤다니까.
귀에 못이 바뀌도록 이야기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 놀라운 기적과 영광의 현장을 목격했는데 입 닫고 있으면 그 사람 나쁜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참 죄송한 말이지만.
그 첫 번째 이유가 말이 많아요.
아, 뭐 이랬다 그러고 저랬다 그러고 막 간증한다 그러고 그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혼자만 조용히 믿으면 되지.
굳이 다른 사람한테 믿으라고.
왜 그렇게 얘기하는가? 아, 심지어 길 가다 보니까 예수 전당 불신 지역 확 피켓 들고 다니는 할아버지도 있고요.
저는 솔직히 되게 무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깐요.
저도 말이 많아졌습니다.
아, 예수를 믿으니까 말이 많아져요.
웬 줄 아십니까, 여러분? 저를 따라서 하시죠.
은혜를 맛본 사람은 은혜를 맛본 사람은 할 말이 많습니다.
할 말이 많습니다.
여러분, 맞습니까, 아닙니까? 은혜를 맛봤는데 입 닫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죠.
정말 제대로 예수를 믿고 은혜의 맛을 은혜의 경험을 했는데 입을 닫고 있다.
그 사람 비정상이에요.
제가 얼마 전에 우리 부목사님들하고 이제 물래동에 있는 밥집을 갔는데 순대국집이에요.
와 너무 맛있는 거예요.
예전에 제가 대림동에 가서도 야 이렇게 맛있는 집이 있나 했는데 야 그 집 저리가라 할 정도로 너무 맛있는 거예요.
제가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저희 아내한테 그 집를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그다음 주 월요일 날 바로 여러분 11시에가 가지고 오픈이라 그죠? 11시에 딱 줄써 가지고 안 기다리고 순대국 먹고 온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근데 만약에 뭐 굳이 이걸 뭐 아멘을 하실 것까지.
근데 여러분 만약에 아이 말은 그거네요.
저기 그 집을 소개해 달라이 말 제가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야이 집 나만 알아야지 괜히 사람 모르면 다음에 갈 때마다 줄 사야 되고 그 귀찮은데 나만 조용히 갔다 와야지.
여러분, 이런 사람을 뭐라고 하냐면요.
욕심 많고 질 안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혼자만 조용히.
그러니까 여러분, 사실은 혼자만 알고 싶은 맛집 그건 뭐냐면 내가 욕심 많다는 거죠.
자, 은혜를 맛본 사람이 입 닫고 있을 수 있습니까? 못자국난 예수님의 손과 구멍난 옆구리를 목격한 제자들이 침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살았는데 입닫고 있는다고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열명의 제자들 가운데 유독 도마 한 사람만 그 자리에 없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아유 진짜 예수님 살아나셨다니까 제발 좀 믿어.
열명이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이 도마라는 사람이 단호합니다.
25절 말씀에 이렇게 돼 있어요.
제가 읽어 볼게요.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도마가 굉장히 냉정하게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이 가당기나 한 말이요.
제발 좀 그만이 좀 얘기하시오.
예수님 옆구리에 창이 질려 가지고 피를 쏟고 물을 찍으셨는데 나는 주님의 못 자공난 손과 그 옆구리에 나 확인하기 전까지 나 못 믿어 그랬어요.
여기서 믿지 않겠노라이 말은요.
굉장히 강한 부정의 의미입니다.
두눈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믿겠다는 강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이 부분 때문에 의심 많은 도마라는 이상한 꼬리표가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제가 질문해 볼게요.
이게 도마가 믿음 없고 의심 많다고 할 만한 합당한 사유가 됩니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나머지 열 명이 왜 계속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얘기했습니까? 자기들이 봤잖아요.
이 구멍난 못자국과 옆구리를 자기들이 받잖아요.
은혜를 맛본 사람은 원래 할 말이 많은 것입니다.
결론은 이겁니다.
본 사람은 믿었고 보지 못한 사람은 못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못 봤기 때문에 내가 못 봐서 안 믿겠다, 못 믿겠다 하는데 그걸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믿음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어지는데 억지로 어떻게 믿게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잘 보세요.
믿어지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어요.
그럼 반대로요.
안 믿어지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저는 그래서 안 믿어졌던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변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지인 중에 더디 믿는다고 해서 절대로 다그치거나 부이진 마십시오.
말을 많이 한다고 믿어질 일도 아닙니다.
자, 여러분 잘 보세요.
도마는 안 믿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본 것처럼 여러분 저를 따라서 아시죠? 나도 보면 나도 보면 믿겠습니다.
믿겠습니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보기 전까지 못 믿겠다고 한 도마에 의심하는 것.
사실 이거 의심이 아니죠.
믿겠다는 고백이죠.
믿겠다는 고백을 일부러 일주일 동안 기다려 주십니다.
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6절.
여덟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이때는 도마도 같이 함께 있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다쳤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그랬어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며칠 후라는 날짜를 셀 때 그날 당위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거는 사실은 우리가 사용하는 7일 후, 일주일 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도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주일 만에 다시금 나타나셨습니다.
아마 나머지 열명의 제자들이요.
도마가 어디 나가려 그러면 좀 가만히 있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좀 가만히 있어.
그랬을 것 같아요.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런데 오늘이 26절 말씀을 보니까 여전히이 제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예수님은 평강할지어다.
괜찮아.
그러셨어요.
그리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단원한 도마를 바로 찾아오지 않고 일주일 기다렸다가 이제 찾아오신 것이죠.
도마에게 일주일이란 시간, 충분한 시간을 주셨습니다.
너 왜 날 못 믿냐? 도마가 내가 보지 않고서 못 믿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바로 찾아오셔서 채 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그치지 않고 그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사랑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가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 구절 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 13장이죠.
우리 4절과 5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사랑은 시작.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그랬습니다.
여러분 저를 따라서 하시죠.
사랑은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를 사랑하셔서 일주일을 일부러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랑의 첫 번째 모습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다림으로 그에게 무래하게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잠잠히 그를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깊고 진한 사랑이라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예수님은 너무도 단호하게 내 두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 난 절대 못 믿겠어라고 말한 도마에게 일주일이라는 완전 수죠.
충분한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실 26절 말씀을 보면 도마 한 사람만 기다려 주신 것이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도 기다려 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일주일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정말 담대하고 소망과 용기가 충만했다면 문 잠그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와, 주님 살아나셨어.
문을 열어야죠.
그런데 여전히 나머지 열명의 제자도 문 닫고 있잖아요.
이것은 일주일 전에 부활을 목격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의심과 근심을 털어내지 못한 그들의 두려움을 보여 주는 거죠.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요.
언제든지 연약한 제자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일으킬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주주 앉았던 인생이 소망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선택한 최선의 사랑이 뭔 줄 아십니까? 잠잠히 기다리며 그를 사랑함으로 잠잠히 기다리며 시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내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난 절대로 못 믿어 그랬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도마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나도 너희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고 싶어.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거야.
그 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도마의 영혼 깊은 외침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던 거예요.
여러분,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했던 수많은 말과 그 안에 담긴 본심까지도 다 지켜보고 일부러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사실 도마는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한 따른다 할지라도 제대로 따르고 온전히 따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요한복음 11장으로 거슬러가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병든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남쪽 유대로 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막 만료합니다.
유대인들이 막 예수님 죽이려고 돌들고 기다린다는 소문이 받아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8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또 유대 유대로 이스라엘 남쪽으로 나사로가 있는 배단위로 가려고 하십니까? 좀 가만히 계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이 자리에서 다른 제자들이 다 만하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 나는 주님 따라갈 거다.
나는 목숨을 걸고 따라간다라고 말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누군 줄 아십니까? 도마입니다.
도마.
요한복음 11장 16절 여러분 자막 보고 같이 한번 읽어 보시죠.
도마가 시작.
도마가 제자에게 말 우리도 수와 함께 하라.
여러분 도마는 의심하는 사람 아닙니다.
다들 몸살리면서 돌어서 지금 주님 치료하는데 어딜 가십니까? 좀 가만히 계세요.
도마가 뭐라고 줄 아십니까? 주님이 가자 그러시면 가는 거지.
야,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확신하는 일에는 목숨 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눈 앞에 그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병든 나사로에게 가시겠다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겠다는데 돌 맞으면 어때? 우리도 목숨 걸고 주님 따라가 보자.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던 사람은 도마입니다.
여러분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단 한 번을 믿어도 제대로 믿고 확실히 믿고 싶었던 사람이었다이 말이에요.
그 어떤 제자들보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싶었던 사람이 도마입니다.
그런데 열흘 전에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주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무기력하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았지 않습니까? 도마는이 비참한 현실을 너무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실망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랑을 쏟았고 그만큼 신뢰했다는 거거든요.
관심 없는 사람이 등돌리면 뭐 왔나 보다 가나보다 끝이에요.
내 모든 걸 걸었던 사람이 주지 앉으면요.
내 삶도 주지 않고 흔들리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도마가 마음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3일 후에 부활하셨고 도마를 제외한 열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지만 얘기해 줬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 제일 기뻤을 사람은요.
저는 도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마는 이번에도 확실히 믿고 확실히 따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 눈으로 상처한 주님의 손과 허리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난 못 믿겠어.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이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제대로 확인하고 확실히 믿겠다.
두 눈을 떠서 똑똑히 확인하고 제대로 주님을 목숨 받쳐 따르겠다는 사실은 여러분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런 도마의 마음을 너무도 잘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27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도마에게 시작.
도마에게 이 내 손가락을 이리 내고 내 손을 어 내에 오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고 믿는 자라 아멘 예수님은 일주일 동안 에타의 부활의 주님을 기다렸던 도마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멀리서도 제자들과 물리적인 거리는 떨어져 있었지만 도마의 마음과 생각 그의 말을 다 보고 듣고 계셨습니다.
난 보기 전까지 도저히 못 믿겠어.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도마를 보면서 되게 못마땅하시는 것으로 보입니까? 그리고 일주일 뒤에 찾아오셔 가지고 야, 너 못 믿다, 못 믿겠다면서 어디 한번 만져 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네가 정말 제대로 믿고 나를 온전히 따르기 원하는 것 내가 알지? 얼마든지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옷자국난 손, 구멍난 허리를 네가 만져 봐.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 그랬습니다.
여러분, 심지어 여기서 믿음 없는 자라는 의미도 확인하고 믿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신 믿는 자가 되는 의미가 뭐겠습니까? 이제는 도마야, 이제는 네가 믿음 있다는 거 알아.
그러나 이제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절망적인 현실을 믿음으로 뛰어넘는 사람이 되라.
여러분 그 말입니다.
주님은 결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만약에 이게 도마가 의심을 많이 해 가지고 난 안 믿어라고 했다면 그래서 주님이 정말 책망할 마음이 있으셨다면 일주일 동안 기다리지도 않으셨다이 말이에요.
그러면 도마가 예수님의 구멍난 허리에 손을 놓아 넣었을까요? 안 넣었을까요? 이번 고난 주간 특별 새벽 기도의 때 우리가 몇 번 봤죠? 우리 카라바주의 도마의 의심이라는 작품을 보십시다.
여러분, 여기 보시면 예수님의 구멍난 옆구리에 도마로 보이는 사람이 뭐 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다 읽어 보시고 살펴보시면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정황으로 봤을 때 예수님의 옆구리 그리고 상처한 모자국에 손을 넣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이 가라바즈가 그린 도마의 의심이란 작품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하나로 보셔야지 진짜 도마가 옆구에 손 넣었다.
여러분 저를 따라서 사시죠.
손 넣은 적이 없습니다.
손 넣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 찾아서 여러분 도마가 손 넣었다는 기록 있으면 들고 와 보십시오.
여러분 잘 보세요.
왜 도마가 손을 안 넣는 줄 아십니까? 도마가 원한 것은 상처를 만져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기를 원했던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를 만져보고 내가 그래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게 아니에요.
제대로 믿고 온전히 믿고 싶다는 도마의 신학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28절을 보면 예수님이 만져보라고 했는데 도마 만져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본 도마의 입에서 즉각적으로 신앙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 28절은 같이 한번 읽어 보시죠.
도마가 시작.
이되 나의 예수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라 예수님이 만져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음성과 얼굴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도마의 마음속에 확신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면 요한복음에서 요한복음에서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제자는 도마밖에 없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불신앙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향한 갈망이요 몸부림이었다이 말입니다.
어디 도마가 의심 많습니까? 정말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나도 두 명으로 확인하고 제대로 믿고 싶다는 열망이었죠.
누구보다 확실하게 제대로 믿고 싶은 사랑과 헌신의 고백이 나 보기 전선 전까지 못 믿겠어였어요.
다른 열명의 제자들은 참 고집 불통이네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네가 온전히 믿고 싶어서 그러지 주님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 도마의 갈망을 단숨에 채워 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너희를 찾아서 갈릴리로 가겠다는 부활의 약속을 이미 진작 예전에 하셨거든요.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32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제가 읽어 볼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도마와 제자들에게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지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태가 십자가에 못 바뀌시기 전 날입니다.
32절은 같이 읽으시죠.
그러나 시작.
그러나 내가 너희 먼저 갈리도록 하니라.
아멘.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끌려갈 때 제자들이 혼비 백산하여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도망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시 살아나서 너희에게 먼저 찾아올 것이다.
그것도 너희가 갈릴리로 갈 것인데 내가 갈릴리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책망할 마음이 없으셨다고요.
반드시 살아나서 너희를 다시 찾아갈 것이고 그리고 너희를 회복시키시고 회복시키고이 일이 일으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이 사실을 믿고 이제는 보지 않아도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이 되길 원하신 거죠.
결국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의 모든 절망과 한숨을 다 걷어내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지치고 연약한 우리의 삶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그 누구보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원했던 도마의 입술에서 12제자 중에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 터져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제가 보지 않고 이해되지 않아도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부활의 약속 앞에 무릎 꿇은 도마는 초대 기독교 회사를 보면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도 창에 찔려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도마는 그 누구보다 신실한 제자로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쏟아부은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부로 도마에게 붙어 있는 의심 많다는 꼬리편은 떼주자고요.
그거 아십니까, 여러분? 관심과 마음을 쏟지 않은 곳은 의심조차 생기지가 않습니다.
정말 제대로 믿고 온전히 믿고 싶은 자에게 왜 그럴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도마는 말했습니다.
내가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밑 믿지 못하겠어.
그런데 그 소리가 예수님께 이렇게 들렸습니다.
진짜 제대로 확인하고 목숨 걸고 온전히 주님 따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를 일주일 동안 기다려 주셨습니다.
왠줄 아십니까? 일주일 동안 기다리면서 그가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통과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에 그의 마음속에 있던 모든 의문과 무거운 마음들이 다 풀리는 것을 경험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 부활하신 복된 날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면 어떤 답답함과 절망과 고통의 그림자도 거쳐질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