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여러분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다래의 역사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로빈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음악]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 개통 이주민과 압록강 유역 졸본지방의 토착세력이 결합하여 건국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처럼 5개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으로 각 부가 각자의 주민과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오부족은 개루브 절노부 손오부 관노부 순노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개로브 출신의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대로 폐자 등의 제가들이 있었고 각기 사자 조이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대가들은 나라의 중대한 일은 제가 회의를 통해 합의로 결정하였는데 회의의 수장을 대대로 또는 망리지라 불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 취소재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랑이 혼인하여 신부의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지어 생활하다 자식이 장성하면 처자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대리사위 제도인 서욱재가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국내 성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산 중턱의 자리잡은 국동대혈이라는 동굴에서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화 부인을 섬겨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제천 행사인 동맹을 열었는데 제천행사는 하늘의 풍요를 기원하는 동시에 온 나라 사람들이 음식과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합의 자리였습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압록강 유역의 졸본 지역은 산간지역으로 농토가 적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부족을 약탈해 생계를 유지하는 약탈 경제활동을 하였고 곡식은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에 저장하였습니다 [음악] 그러한 탓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평야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 사회 기간을 유지하기 위해 형법 적용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도둑질한 자는 물건값에 12배를 배상하게 하는 일책 12법이 있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한 후 사용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녹이로 삼았습니다 또한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 다시 목을 배웠고 마찬가지로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고구려의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오부 출신의 귀족들이 차지하였는데 이들은 지위를 세습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고구려는 1세기 초 유리왕 때 졸본에서 국내선으로 수도를 옮기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1세기 후반 태조왕은 옥저를 정복하여 청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현도군을 공격하여 요동지역으로 진출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게르보 고시에 왕위 독점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은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부족적 성격의 오부는 이후 행정적 성격의 5부로 정착되었고 5부의 지배자는 중앙귀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백성들은 대부분 자영농민이었지만 생활이 불안정하여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국천왕 때에는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농민 몰락방지를 위해 진대법을 실시하였는데이는 봄의 국가가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 갚게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이는 국가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던 고구려는 3세기 중엽 동천항대의 위나라 장수 관고검의 침입으로 체력이 위축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 미천왕은 중국 5호 16국 시대에 혼란을 틈타 암록당 하류의 서한평을 점령하면서 중국대륙과 한 9년인 낙랑군 대방군의 연결고리를 제거하였습니다 뛰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한 미천왕은 중국의 9년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할 수 있었고 요동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전현과 대립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 중역 고국원왕 때에는 전현무용황의 침략으로 수도인 국내성이 함락되며 리처넘느니 도굴 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남쪽에서 올라온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내부의 체제 정비를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4세기 후반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고 왕이 곧 부처라는 왕죽불 사상을 내세워 지방세력을 통합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의 최고 교육기관인 퇴학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율령이란 형렬과 법령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율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형율이며 영은 행정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법령을 말합니다 이러한 개혁으로 고구려의 중앙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음악] 4세기 말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를 바탕으로 중국 위진 남북조의 혼란계를 틈타 정복 활동을 펼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서북쪽으로는 후연과 거란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열을 굴복시켜 요동지방을 포함한 만주 남부지방과 두만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아신왕이 다스리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신라 뇌물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의 침입한 외를 물리쳤으며 외와 우호적인 금관 가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는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에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관개토대왕은 광활한 영토 확장의 결과로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강력한 왕권과 자주성을 표현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김은혜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 관개토대왕의 영토 확장과 외군의 격퇴 과정 묘지기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세기의 주기한 장수왕은 중국이 남조와 북조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자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대부분 평양천도 이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교육기관인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장수왕은 천도후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수도 한성을 함락시켜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산만에서 중령 경북 동해안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는데이 사실은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의 비석입니다이를 통해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 진출을 확인할 수 있고 신라를 동의 신라의 왕을 매금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장수왕식이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성장은 백제와 신라의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습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백제와 화친하는 등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경계하였습니다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자왕은 494년 부여를 병합하며 부여의 왕과 일족을 고구려의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낮에 동맹을 맺은 신라 백제와 일진 일퇴를 거듭하며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고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업적을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5세기에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이르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왕을 태왕이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왕족인 개루부 고씨를 비롯한 오부 출신의 귀족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는데 대대로가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관리를 10여관 등으로 구분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행정구역은 수도 5부 지방 5부로 나누었고 지방 장관으로 욕설 철여금지 등을 두어 행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는 학문이 발달하고 중앙집권 체제가 발전하면서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역사서인 유기가 편찬되었는데 영양왕 때 이문진이 6위 100권을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다양한 고분을 만들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돌무지 무덤을 만들었는데 돌무지 무덤이란 돌을 쌓아올려 만든 무덤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널리 만들어졌으며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장군 종이 있습니다 장군총은 중국 지린성 지안 현에 있는 7층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둘레돌인 호석이 둘러져 있고 무덤 옆에 딸린 무덤인 대총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후기에 이르러 돌무지 무덤 대신 굴식 돌박 무덤을 만들었는데이는 주로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학 등지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굴식 돌방 무덤이란 돌을 이용해 외부에서 이어지는 널 길과 넓방을 만들고 방 안에 시체를 넣는 관인 너를 안치한 뒤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강서 대묘 무용총 각저 총 등이 있습니다이 구분들은 천장의 구조가 점차 모서리를 좁혀가며 쌓아올리는 방식인 모주림 천장 구조의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현세의 생활이 사후세계에도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과 함께 껴묻거리를 묻기도 하였고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강서대며 사신도 무용총의 무용도 각자 총의 씨름도 등이 있습니다 강서대며의 사신도는 죽은 자의 사후세계를 지켜준다는 도교의 방위 신을 그린 그림으로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남쪽은 주작 북쪽은 현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분벽화의 사신도에서 보여지듯 삼국시대에는 불교뿐 아니라 도교문화 역시 수용하였는데이는 주로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성행하였습니다 도교는 산천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근로장생과 현세 구복을 추가하였는데 후회 소개될 연개소문은 불교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구강에게 도교회 수입과 융성을 건의하여 국가 종교의 주도적인 지위에 올려놓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주변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였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동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중국 수와 당의 궁중에서는 고구려 아기 연주되었으며 연애에서는 고구려무용으로 흥을 도둑이도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역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서역 개통의 인물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였고 이와 반대로 서역의 궁전 벽화에서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졌습니다 고구려는 무덤뿐만 아니라 건축도 발달하였는데 장수왕 때 평양에 세운 궁궐인 안학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아낙 사모분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가혹 형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불상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금동연과 7년명 열애 입상이 가장 대표적인데 불상 뒷면에 명문을 통해 고구려 불쌍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일본의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7세기 초 승려 담쟁이 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하였고 포류사 금당 벽화를 남겼으며 승려 해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벽화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활발한 영토 확장과 독자적 문화를 꽃피우며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신라지능왕과 백제 상황에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며 세력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세력을 팽창시키자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세기말인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세력을 확장하며 고구려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인 돌궐과 연합하여 이에 대응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의 대항하면서 6세기말 이후의 국제관계는 고구려 백제 왜 돌궐의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이 연합하는 동서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주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수 문제는 고구려의 국서를 보내 복속을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양왕은이를 거절하였고 598년 오히려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하였습니다 수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불량 및 수송의 중단과 홍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성과 없이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후 수나라 문제의 뒤를 이은 양재는 11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강력하게 저항하며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에 수양제는 또다시 우중문 등에게 30만 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612년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식량 보급을 차단하였고 퇴각하는 수의 군대를 현재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크게 물리쳤는데이를 가리켜 살수대첩이라 부릅니다 이후에도 수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무리한 전쟁과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수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은 한동안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은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고 돌궐을 제압한 후 고구려를 압박하는 등 주변 국가에 대한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음악] 당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보장왕을 왕으로 세우고 당과 신라에 대해 강경한 대외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과 고구려의 신라 공격 등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습니다 645년 대군을 이끌고 침략에 나선 당 태종은 랴오허강일대의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성주와 백성들이 단결하여 당의 공격을 막아내자 당구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당은 여러 차례의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고구려는 성곽을 이용한 전술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수와 당해 연이은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동안 백제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현재의 경남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고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의 김춘추를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신라가 점령한 옛 고구려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동맹을 제외하였습니다 마침 여러 차례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던 당태종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다시 공략하고자 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백제 고구려 정벌을 위한 나당 동맹이 성사되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군은 백강전투에서 수정방이 이끄는 당군에게 패하였고 황산벌에서는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결사대 마저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의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고구려는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연개소문의 지휘하에이를 잘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이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을 벌였고 정권의 구심점이 약해지자 귀족세력과 지방세력마저 분열하며 정치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당은 지배층의 내분을 틈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의 성대를 차례로 무너뜨렸고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보장왕이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들은 곳곳에서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고연무는 오골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탄성을 근거주로 고구려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안승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투왕하며 금마저의 보덕국을 세우며 전통을 이어가려 하였습니다 한편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의 의도를 파악한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의 공세가 거세지고 지도층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와 고구려에서 내려온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성립되었으며 한강유역에 위례성을 도읍지로 하여 건국되었습니다이는 주몽의 아들 온조가 하남 위례성의 건국하였다고 전해지는 삼국사기에 기록과 왕족의 성취를 부여시로 하였다는 점 서울 석촌동에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이 고구려 돌무지 무덤 양식과 유사한 점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비옥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경문화와 철기 문화가 발달하였고 바닷길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유리하였습니다 백지는 이러한 질의적 문화적 이점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음악] 삼색이 중엽 고이왕에 이르러서는 형제상속을 통해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적 국가통치를 위한 기준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관제를 정비하여 6 좌평재를 실시하였는데 내신좌평은 왕명출납을 내두 좌평은 물자와 창고를 내법 좌평은 예법과 의식을 의사자평은 수기 병사를 조정 좌평은 형벌과 송사를 병관자평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맞게 하였습니다 또한 16번 등을 마련한 후 객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유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장식하게 하였으며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였습니다 고유황은 밖으로는 북쪽의 낙랑 대방군과 싸우고 남쪽으로는 마한의 목주국을 제압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으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된 문무를 수용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확장을 하였습니다 이후 4세기 중엽 재위에 오른 근초고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마한의 남은 영토를 정복하여 지금의 호남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남해안까지 진출하였으며 남동쪽으로는 가야의 세력권이었던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외로가는 교통로를 확보하였습니다 이어 북쪽으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 일대를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백제는 황해도와 강원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막강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중국 남주의 동진과 교류하여 선진문물을 수용하였고 왜 규슈 지방과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중국의 요서지방에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습니다 근초고왕 시기에 제작되어 재후황인 외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여지는 칠지도는 전체 길이가 75cm인 창모양의 칼로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으며 61자의 문자가 금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칠주도의 용도는 무기라기보다는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칠지도는 당시 활발하였던 백제와 외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이선호 카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백제의 불교는 4세기말 즉위한 침류왕 때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백제로 들여움으로써 최초로 전래되었습니다 백제는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구강중심 집권 체제의 사상적 뒷받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고구려와 유사하게 문화적인 기풍이 씩씩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습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시와 팔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역사책을 즐겨 읽었고 관청의 실무에도 뛰어났으며 투호 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습니다 백제는 형법에 적용이 엄격하여 도둑질한 자는 훔친 물건값의 두 배를 물게 하고 귀향을 보냈으며 반역한 자나 전쟁에 패한자 살인한 자는 목을 베는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또한 관리의 뇌물수수나 공금 횡령 시 3배를 배상하게 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했습니다 백제는 항문에 토착화를 위해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유학 경서의 능통한 사람에게는 박사의 칭호를 주었는데 그 중 역경 시경 석영 얘기 춘추 등 오경의 능통한 사람을 오경 박사라 하였습니다 삼국시대는 농경사회에서 천문 현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이에 천문관측을 중시하고 발달시켜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일식 월식 혜성 등 다양한 기상이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는이를 연구하기 위해 역법 전문가인 역박사와 천체와 기상을 관측하는 일관 등의 기술관을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의학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인 의박사가 존재하였는데 후기에 이르러 의학의 분립에 따라 의박사와 체약사로 나뉘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역사서를 편찬하였습니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이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습니다 백제는 불교뿐 아니라 도교역시 발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의자왕 때에 고위직인 대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저를 짓고 세운 비석인 사택 지적비가 있습니다 우리는이 비석에서 인생무상의 내용이 담긴 도교적인 색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산수문이 벽돌 금동대향로 등을 통해 백제인들의 산천숭배 신선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백제인들이 불로장생과 현세 구복을 추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시기에 따라 여러가지 무덤 형태가 존재하였습니다 한성시대에는 고구려와 유사한 형식의 돌무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이를 통해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 대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분으로는 서울 석촌동 구분이 있습니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의해 수도를 옮긴 웅진 시대에는 굴식 돌박 무덤이 유행하였습니다 웅진 도읍기에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이에 속하며 큰 규모에 비해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부분으로는 공주 송산리 구분이 있습니다 웅진 시대에는 굴식 돌박무덤 이외에도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무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이미 조사가 완료된 다른 무덤들의 장마철 침수 방지 공사를 하다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주인을 알 수 있는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에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무룡왕릉은 중국 남주에서 유행하던 벽돌 무덤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백제와 남조가 교류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무덤 안에는 지석뿐 아니라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 백제의 금제 관장식 응회암으로 된 짐승상인 석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수도를 다시 옮긴 사비시대 역시 굴식 돌방 무덤을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구분으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고분 내부에는 벽화가 존재하였고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백제는 건축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익산 미륵사는 7세기 무앙대 세워진 백제 최대의 사찰로 중앙의 목조 탑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석탑을 배치한 독특한 구조가 특징입니다 현재는 익산 미륵사터의 목탑 양식을 계승하여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이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금제 살이 봉한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또한 부여에는 목탑 양식을 계승하여 세워진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이 석탑은 백제 멸망 후 1층 탑신에 당일 장수 소정방이 글귀를 새겨 평재탑이라고도 불립니다 [음악] 백제는 불쌍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절벽의 새겨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데 부드러운 자태와 온화한 미소가 특징으로 백제의 미소라 불리고 있습니다 백제의 문화는 일본의 전파되어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아스카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백제의 학자 아즈키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교육하고 박사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으며 6세기 성황대에는 승려 놀이사 측에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습니다 4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백제는 외와 가이아의 원조를 받으며 저항하였지만 결국 고구려의 항복하며 한강 이북 지역을 상실하였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주기 한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신라와 낮에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475년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는 치욕을 겪으며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한강유역 상실 후 개로왕의 뒤를 이어 주기한 문주왕은 수도를 한성에서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해 왕권이 약화된 백제는 귀족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였고 대외적으로도 세력이 위축되어 무역 활동 역시 침체기에 빠졌습니다 이후 주기한 동성왕은 493년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낮에 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며 왕권 강화를 깨어였지만 호족 세력에게 암살당하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주기한 무령왕은 지방의 22남로의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등 백제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남자의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하였고 그들의 영향으로 남조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 양식으로 무령왕릉을지었습니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황은 538년 지금의 부여에 해당하는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변경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제도를 수도 5부와 지방 오방으로 정비하였고 중앙관청을 22부로 확대 및 재편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상황은 중국 남조 및 외화 교류하였는데 백제의 승려인 노리사치계가 왜 건너가 불경과 불상을 전해준 것도 상황에 재위 시기에 해당합니다 상황은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551년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진흥왕의 기습공격으로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고 553년 낮에 동맹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백제군이 신라의 복수하기 위해 관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성황이 신라군에게 목숨을 잃으면서 백제의 중흥은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지나 7세기에 주기 한 무왕은 익산의 미륵사를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무왕은 서동료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무왕 이후 주기한 의자왕은 윤충을 보내 대하삼을 점령하는 등 적극적인 공격으로 신라의 40여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벌포 전투에서 소정방이 이끈 장군에게 패하였고 계백의 결사대마저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의 패하였습니다 뒤은 공격으로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자 660년 웅진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항복하였고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유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왕족인 복싱과 승려 도침은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품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흑치 성지 역시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지만 신라의 흡수 당하며 700년 백제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음악]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자 낙동강 하류 변환 지역에서는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정치 집단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가야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고 3세기경부터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금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였습니다 북쪽 구지봉의 신비한 기운이 있어 사람들이 모이니 하늘에서 나라를 세워 임금을 모시라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으로 만든 상자가 내려와 열어보니 황금알 6개가 있었다 6알은 얼마 후 어린아이가 되었는데 첫 번째 아이를 왕으로 모셨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고 하였다 이처럼 가야의 건국 신화를 살펴보면 금관 가야의 시조가 김수로 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관가야는 우수하고 질 좋은 철을 생산하여 각종 철제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덩이새를 화폐와 같은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낙동강 하류의 해상 교통을 기반으로 낙랑과 외 등의 철을 수출하며 중계 무역을 주도하였습니다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였을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야는 4세기 말 백제와 외를 도와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친밀해온 외를 물리치기 위해 고구려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관개토대왕은 신라의 오만 군사를 보내어 적군을 추출하였습니다이 과정에서 금관 가야 역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고 큰 타격을 받아 맹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습니다이는 전기 가야 연맹에 해체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가이아의 세력권은 낙동강 서쪽 일대로 축소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쇠퇴하자 5세기 후반 고구려군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하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진아 시황이 시조라 전해지는 대가야는 농업의 유리한 입지 조건과 풍부한 철산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우수한 품질의 철로 갑옷과 무기뿐 아니라 금동관 등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가야는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여 그 세력 범위를 섬진강 하류일 때와 소백산맥 서쪽까지 확장시켰습니다 중국남주의 사신을 보내고 신라를 공격한 고구려를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는 등 국제적인 위상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가야연맹은 각 수국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지배력을 한데 모으지 못하였고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한계와 두 나라의 세력 다툼에 의해 점차 쇠퇴하였습니다 이에 대가야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버프왕 제위기인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의 병합되면서 멸망하였고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 등 가야 왕족 일부가 신라 진골로 편입되었습니다 금관 가야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시급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가야왕족이 신라로 편입된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562년 대가야가 신라 진흥왕에게 병합되면서 가야 연맹은 해체되었습니다 이로써 가야는 여러 소국의 연맹 왕국 단계를 벗어나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데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야는 여러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진흥왕에게 투항한 대가야 출신 우륵은 가야금과 가야 음악을 신라의 전했고 가야의 일부 세력이 왜 진출하여 일본 고대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독이 바퀴 장식 꿀잔과 독이 기마 인물형 불잔에서 가야인들의 섬세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고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가야의 판갑옷과 고령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대가야의 판갑옷과 투구 금동관 등을 통해 당시 가야의 철기 제작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역사는 기원전 57년 지난해 소국 중 하나인 사루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래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신라 최초의 왕으로 전해지며 경주 지역에 토착세력과 남하한 유의민 세력에 합쳐져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되었습니다 신라는 뛰어난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주변의 진한 세력을 정복하여 점차 발전하였지만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불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기가 어려웠고 체제정비와 국가 통합이 늦어졌습니다 6부족 연맹체였던 신라는 육부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였고 초기에 박 석 김해 삼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음악] 왕의 칭호는 거서갈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의 순으로 바뀌었는데 거서관은 군장 또는 우두머리 차차웅은 무당 이사금은 연장자를 마립간은 대군장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칭호가 바뀌어 나간 것은 통치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강화되어가는 정치적 발전을 의미합니다 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물항대에 이르러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내무랑은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을 확립하였으며 왕을 부르는 칭호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에 지난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가야와 외의 연합세력이 신라의 영역을 침입하였는데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군사를 보내이를 물리친 일이 있었습니다이를 계기로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신라는 자주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433년 눌지황 때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 낮에 동맹을 맺었고 493년 소지황 때 백제와 혼인동맹을 체결하며 낮에 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 때에 본격적인 제도 정비를 실시하였습니다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의미의 신과 사방을 막라 한다는 의미에 라를 합쳐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었습니다 지중앙은 수도와 지방의 행정구역도 정리하였는데 지방 행정구역을 주 군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였습니다 또한이 사부를 보내 지금의 울릉도 일대인 우산국을 정벌하였고 경상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해 우경을 장려하였고 노동력 확보를 위해 순장을 금지하였으며 수도의 시장인 동시를 열고이를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며 상업을 장려하였습니다 지중앙에 뒤를 이은 버프왕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율령을 반포하였습니다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 등이 회의를 주관하게 하였고 지배층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정비하였으며 관리의 등급을 17등급으로 나누어 복색으로 서열을 구분하는 등 관등재 역시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자 병부를 설치하였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병합하였으며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권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527년 불교를 공인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불교지능을 위해 황룡사를 건립하였고 불교집회 등을 통해 나라의 통합과 발전을 기원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음악] 활용도는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 단체로서 교육과 군사 및 사교단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지능왕은 백제 성황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이후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한강 유역을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이어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이러한 영토팽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영 순수비 등의 비석을 건립하였습니다 순수란 원래 천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산천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 민심을 살피던 풍습을 뜻하는데 지능왕은 자신이 확장한 국경을 살펴보고이를 기념하기 위해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지능왕은 왕권 강화와 강해진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짐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하였으며 개구 태창 홍제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거칠부로 하여금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항쟁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로를 확보하여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고 농사에 유리한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여 경제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주기한 진평왕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청하는 글인 걸사표를 짓게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라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건립하였고 자장의 거리로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 모전 석탑을 세웠습니다 칠라는 선덕여왕 시기에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 성의에 함락되며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김춘추가 고구려의 동맹을 요청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뒤를 이어 주기한 진덕여왕은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집사부를 설치하며 장관을 중시라 칭하였고 당나라의 김춘추를 파견하여 나당동맹을 성립시키는 등 친당 외교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신라는 초기 부족사회의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신라에서는 귀족 회의체인 화백 회의를 열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는데이는 부족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운영하던 건국 초기의 전통을 유지하였으며 만장일치제로 운영되었습니다 또한 화백회의를 통해 국왕의 추대 및 폐위를 결정하는 등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음악]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가 있었습니다 골품제는 신라의 지방 부족장들이 중앙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생긴 폐쇄적인 신분제도로서 성골 진골 육두품에서 1두품 등 골품에 따라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관직 진출뿐만 아니라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 복색 수레 등 일상생활에서도 차 등을 두어 규제하였습니다 [음악] 신라의 상업활동은 주로 대도시에서 발달하였습니다 지증왕시기에 금성에서 시장이 열렸고 감독관총인 동시전이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무역하던 신라는 강항성을 확보한 이후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는 삼국중 가장 늦은 6세기 이후에 정비되었습니다 행정구역을 수도 6부 지방 5주로 나누었고 진골 귀족의 대표인 상대 등이 화백 회의를 주관하여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이발찬 이하 17관 등으로 구분된 관리들이 국정을 나누어 담당하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유화기 발달하였습니다 신라의 비석인 임신 서기석을 통해 청소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의 내용은 효를 지켜 과실이 없고 나라가 위급할 때 충으로 행할 것을 맹세하며 치경 상서 얘기 춘추 좌시전을 습득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국가 충성에 대한 두 청년의 서약으로서 진평왕 34년인 임신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서영문의 구절마다 반드시 맹세할 서자를 기입하여 서약임을 강조하였는데이는 그들의 유교적 도덕성과 그 실천 의지가 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라도 다른 나라처럼 역사서를 편찬하였습니다 지능왕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정통성을 세우기 위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 민간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지 못하였지만 버프왕 때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습니다 그 후 버프왕에서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는 등 불교는 왕권과 밀착하여 성행하였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세속 5개를 가르친 승려원광은 진평왕의 명을 받아 걸사표를 지었고 선덕여왕 때 자장은 황룡사 9층 목탁 건립을 건의하였습니다 신라는 농경사회에서 천문 현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선덕여왕 때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였습니다 신라시대에는 금속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화려한 금관 등을 통해 신라의 금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을 살펴보면 신라는 고구려 백제가 주로 사용한 돌무지 무덤이나 굴식 돌박 무덤이 아닌 돌무지 덧날 무덤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돌무지 던널 무덤은 땅 위 또는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 던너를 넣고 그 위에 돌을 쌓은 후 돌 위를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든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입니다이 무덤은 벽화가 없으며 무덤의 구조상 도구리 어려워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다수의 껴묻거리가 출두되었는데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병 유리잔 등을 통해 신라시대의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마총에서는 말에 안장의 부속된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인 천마도가 출토되었으며 호우총에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향력이 신라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호응형 그릇이 출두되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건축도 발달하였습니다 6세기의 진흥왕은 거대한 사찰인 황룡사를 건립하였고 선덕여왕은 자장의 권위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습니다이는 신라를 위협하는 주변 9 세력을 부처님의 힘을 빌려 물리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만든 목탑으로 호국 불교적 성격을 지녔는데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때 불에타 소실되었습니다 신라는 불쌍 또한 발달하였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은 경주 배동 석조열의 삼존입상인데 살찐 뺨과 다정한 얼굴 푸근한 자태가 특징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여러 비서기 세워졌습니다 지증왕 때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실라비에는 한 인물의 재산소유와 사후 상속 문제가 기록되어 있으며 거품왕 때 세워진 울진 봉평 신라비는 버프강 때에 윤령이 실제로 행해졌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영천 청제비는 연못에 축조와 보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 때의 신라가 한강 상류로 진출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이 비석에는 정복한 지역의 백성을 회유하고 위로하는 내용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지능왕이 새롭게 정복한 한강 유역을 돌아본 후 세운 비석입니다 조선 후기 김정희는 금속과학록에서이 비석이 지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습니다 신라는 일본의 배를 만드는 조선술과 제방을 쌓는 축제 수를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에서는 신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연못을 한인의 연못이라 부릅니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삼국항쟁의 주도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 및 외와 연합하여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습니다 한편 6세기 후반 중국에서 수가 대륙을 통일하고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인 돌궐과 연합하여 수에 대응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의 대항하였습니다 고글이와 백제의 연합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은 신라는 수에 걸사표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세기 말 이후 동북아시아에서는 고구려 백제 왜 돌궐로 이어지는 남북연합세력과 신라와 수당을 연결하는 동서연합세력이 대립하는 정세가 형성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당과 치열한 전쟁을 전개하는 동안 백제의저왕은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대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고 신라가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의 장군 연개소문은 신라를 돕는 대가로 신라가 점령한 옛 고구려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결국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나당 동맹을 제외하였습니다 마침 여러 차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당태종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공략하고자 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위한 나당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군은 기벌포 전투에서 수정방이 이끈 단군에게 패하였고 계백의 결사대마저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끈 신라군의 패배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를 함락하자 웅진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연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하에이를 잘 막아냈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으며 집권자인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세 아들이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을 벌여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은이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성대를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하였고 고구려는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옛 백제 땅에 웅진 도덕부를 두었고 신라의 금성에는 계림도둑부를 두었습니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는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여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고 백제 유민과 연합하여 사비의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몰아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신라는 금마저의 보덕국을 세우고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왔고 백제땅의 지배권을 확보하여 웅진 도덕부를 요동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어 675년 내수성 전투에서 당일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는 당의 수근을 선멸하고 안동 도호부를 축출하였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었고 3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외세인 당의 힘을 빌렸고 대동강 이북에 고구려당 대부분을 잃었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유민과 함께 힘을 합쳐 당을 몰아내는 자주적인 통일을 달성하였고 백제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발전에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라는 당을 축출하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룬 후 확장된 영토와 인구 증가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대외관계가 안정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군사력을 확보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신라의 제29대 왕인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직계 자손의 왕위 세습을 확립하여 왕권 안정의 기여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상대등 세력의 견제를 위해 집사부와 그 책임자인 중시의 기능을 강화하였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뒤를 이어 주기한 제30대 문무왕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나당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인 메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에게 승리함으로써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3국 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주기 한 제31대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였습니다 김흠돌의 나는 신문왕의 장인이었던 김흠돌이 하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 사건을 말합니다 반란의 괴수 흠돌과 흥왕 진공 등은 그들의 재능이 훌륭하여 지위가 올라간 것이 아니며 관직도 실로 은전에 힘입었다 그런데도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관료를 능멸하고 상하를 기만하였으며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모아 거사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제 요사한 무리가 진압되어 근심이 없어졌으니 병사들을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보고하여이 뜻을 알도록 하라 이처럼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왕 때에는 구주 오소경의 지방 행정조직을 완성하며 중앙정치기구와 지방 행정조직을 정비하였고 중앙에서 주요 군현의 태수와 현령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문무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노급을 폐지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과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였고 군사조직을 중앙군 구서당 지방군 십정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자 6두품 세력이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문왕은 아버지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감은 살을 창건하였는데 가문사 창건 이후 만파식적 피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음악] 용이 검은 옥대를 바쳤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 금 옥으로 보답하고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로 나오자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였다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감을 때 비가 오고 비 올 때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평온해졌다이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를 통해 감은사와 만파식적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제33대 성도강은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안정적인 재정 확보와 국가의 토지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제35대 경덕왕은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체제정비 및 왕권 확립을 도모하고 구주를 비롯한 9년의 명칭과 중앙 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변경하는 등 한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경덕왕은 국학의 명칭을 태학감으로 바꾸었고 박사와 조교 등을 두어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성덕대왕 신종의 제작에 착수하였습니다 또한이 시기에는 전제 왕권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달로 노급이 부활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중앙통치조직은 왕명을 받들어 행정을 총괄하고 기밀 사무를 수행하던 왕의 직속기구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제35대 왕인 경덕왕 시기에는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의 명칭이 시중으로 변경되었는데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중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집사부의 역할이 커졌고 이로 인해 상대 등의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집사부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불을 두어 행정업무를 분담하였으며 무열왕 때에는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정부를 두어 관리들에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지방 행정조직은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구주 오소경 체제로 정비하였습니다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을 나누어 전국의 구주를 설치하였고 그 아래 군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주 장관의 명칭은 군주에서 총관으로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주 장관의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신라는 수도인 금성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지리적 취약성을 보완하고 고구려 백제 가야 등 피정봉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군사상 행정상의 요충지에 오소경을 두었습니다 오소경에는 서원경 남원경 부건경 중원경 금관경이 있었는데이는 지방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밖에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나 정복지에 향 부곡 등의 특수 행정구역을 두어 일반 9년에 농민들보다 많은 공무를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군현 소경 아래에는 말단 행정구역인 촌이 있었습니다 초는 몇 개의 자연 촌락을 합친 것으로 토착세력인 촌주가 지방간의 통제를 받아이를 관리하였습니다 신라는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향리 또는 그의 자재를 수도금성에 여러 관청에 보내어 일정 기간 동안 근무하게 하는 일종의 인질 제도인 상수리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거사의 차림으로 도성을 떠나 무진주를 순행하니 주의 향리 안길이 그를 정성껏 대접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두콩이 떠나면서 말하기를 도성에 올라오면 찾아오라 하였고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나라의 제도에 해마다 외주의 향리 한 사람을 도성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보내 지키게 하였다 지금의 기인이다 안길이 올라가 지킬 차례가 되어 도성으로 왔다 위 선봉유사의 내용을 통해 상수리제도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는 지방관을 감찰하고자 감독관으로 외사정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군사조직을 정비하여 구서당 10점을 설치하였는데 구사당은 구강 직속부대인 중앙군이었으며 민족융합정책의 일환으로 신라인과 함께 옛 고구려 백제 말가린 등 키 정복민을 포함시켜 편성하였습니다 지방에는 십정을 두었는데 구주의 한 개씩의 점을 두고 국경지대인과 동시에 관할구역이 넓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한 주에는 두 개의 점을 두어 총 10정을 배치하였습니다 신라의 유교정치 이념을 살펴보면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 효경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제38대 왕인 원성왕 때 이르러서는 유학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상품과를 실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춘추 좌시전과 얘기 문선을 읽어서 그 뜻의 능통하고 겸하여 논어와 효경의 밝은 자를 상품으로 하고 공예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으로 하고 공예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으로 하였다 독서 상품권은 학문과 유학의 보급의 이바지하였지만 증골 귀족들의 반발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통일신라는 경덕왕 때 관청과 행정구역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변경하는 등 관료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나 최공항 때 다시 환원되었습니다 실라는 통일 이후 안정을 되찾았으나 탈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골 귀족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중앙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반란이 계속되었고 그러던 중 혜공왕이 피살되면서 왕위 쟁탈전이 격화되었습니다 이에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웅주 도덕이었던 김헌창이 자신의 아버지가 원성왕에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어 난을 일으켰고 청해진의 장보고도 중앙에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신라는 점점 국정운영 능력을 상실해 갔습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고 사적 예송민을 늘리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하였습니다 결국 부족한 재정적 보충을 위해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져갔습니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9세기말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가 더욱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원종과 no의 난 적구적인 난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나라 안에 여러 주군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비어 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에노 등이 사벌주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원종과 애노의 난을 통해 신라 말 농민 봉기에 대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 말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고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여 일정한 지역에 독립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아 군대를 거느렸고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부르며 그 지역의 행정과 군사에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한편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습니다 풍수지리설은 금성 중심의 질의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호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한편 골품제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신라 사회에서 관직 승진의 제한이 있었던 6두품들은 당의 유학하고 돌아와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진골귀족이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전개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거나 지방 호족 세력과 함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10세기 초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에는 세력을 모아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상주 출신의 군인이었던 견원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나주와 무진주를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이후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며 완산주의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후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습니다 육두품 세력을 포섭하여 체제정비에도 힘을 쏟았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신라의 왕족 출신인 궁에는 부건의 도적 양질의 무리 속에서 힘을 길러 강원도 경기도 일대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고구려 부흥을 내세우며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이후 궁에는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하였다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으며 최고 중앙 관부인 광평성을 설치하는 등 독자적인 관제를 정비하여 점차 국가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자 호적을 탄압하였으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주변 인물들을 숙청하고 전제 정치를 강화하였습니다 이에 호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918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919년 태봉의 도읍이었던 철원을 떠나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개경이라 불렀습니다 고려와 후백제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태조 주기 이후 우주 인근 지역이 후백제에 투항하고 서원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호족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태조는 지방의 후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또한 신라의 화친 정책을 취하여 신라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었습니다 마침내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대치하였을 때 고창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보려는 후삼국 통일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네 분이 일어났습니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아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의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견원은 탈출하여 고려의 귀순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왕건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는 1 2천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지배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랴오허강 서쪽의 영주지방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곳에서는 고구려 유민 외에도 말갈인과 거란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강제 이주되어 당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란의 반란을 계기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출신 대조영은 698년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중국 지린성의 동모산 지역의 정착하여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신라북쪽의 발해가 건국되면서 한반도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웠습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시가 그 북쪽을 영위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 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시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자신이 저술한 발해고를 통해 남북국 시대론을 제시하였으며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주장하였습니다 대조영의 뒤를 이어 주기 한 무왕은 연호를 이난으로 정한 후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며 영토 확장에 나섰습니다 발해 세력이 커지자 당은 흑수 말갈과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압박하였습니다 이에 무왕은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과를 정벌하게 하는 한편 돌궐 일본과 교류하며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습니다 또한 흑수말갈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당의 조치의 불만을 품고 732년 장문 휴가 지휘하는 수군을 보내 산동지방을 선제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음악] 발해의 왕이 말하기를 흑수 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기를 빌려 당과 통교하였다 그런데 당이 지금 관직을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니이는 반드시 당과 함께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동생 대문예와 외숙부 이마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구당사의 내용을 통해 발해 무왕의 흑수말갈 정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해와 당의 대립관계는 문왕이 즉위하면서 해소되었습니다 무왕 이후 발해의 왕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문학 역시 독자적 연호인 대흥을 사용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당 신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체제 정비에 힘썼습니다 문왕은 당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삼성 6부제를 기반으로 중앙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고 사신을 교환하는 등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또한 도읍을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발에는 구색이 초 선왕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9세기에 즉위한 선황은 독자적 연호인 건흥을 사용하며 주변 말갈 세력을 복속하였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요동 나무로는 대동강 2부까지 확장하여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고 오경 15부 62주에 지방통치체제를 완비하였습니다이 무렵 당은 전성기를 맞이한 발해를 가리켜 바다 동쪽에 번성한 나라라는 뜻에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발해는 구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중앙정치 조직은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삼성 6부제를 받아들였으나 그 명칭과 운영은 독자적이었습니다 구강 아래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을 두었고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습니다 정당성 아래 좌사정과 우사정을 두어 각각 3부 총 6부로 나누어 국정을 맞게 하였고 6부에는 유교적 명칭인 춤인의 지예 신부를 사용하였습니다 발해는 삼성 6부 이외에도 중정돼 주자감 문적원이 존재하였습니다 중정되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였고 주자감은 발의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유학을 교육하였으며 문정원은 책과 문서관리 비문 축문 외교 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방행정조직은 선왕 때 오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습니다 분사 행정적 요충지에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등 오경을 설치하였고이 중 상경 용천부가 가장 오랜 기간 발해의 수도였습니다 지방의 중심도시에는 15불을 두고 62주로 나누어 관리하였습니다 부에는 도도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승을 지방관으로 파견하고 도덕의 일원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였으며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수령이라 불리는 토착 세력이 자체적으로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시비를 조직하여 왕궁과 수도를 경계하게 하였으며 지방의 중요 지역에는 별도의 지방군을 두어 지방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발전하던 발에는 10세기 초 지배층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거란의 야유라 부기는 부족을 통합하고 부가시아에서 대규모 정복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8에는 세력을 넓힌 거란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926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발해가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민들은 고려의 망명하였고 남은 세력은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후발해 정안국 등 발의 계승국가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역사를 이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발해의 역사 재밌게 보셨나요 저희는 고려의 역사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로빈의 역사 기록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