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 주역! 장기영 부총리, 외자 유치와 숨겨진 이야기 (4-5편)
장기영 부총리, 외자 유치와 그 이후의 삶
지난 시간에 장기영 부총리가 추진했던 '금리 현실화' 정책에 대해 알아봤지? 오늘은 그가 외자를 끌어오는 데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그리고 부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 줄게.
왜 외자가 필요했을까?
금리 현실화 정책으로 국내 돈을 모으려고 해도,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했어. 당시에는 큰 공장 하나 지으려면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야 할 정도였지. 게다가 1960년대부터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돈도 줄어들고 있었어. 그래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오는 것, 즉 '차관 도입'이 꼭 필요했지.
하지만 외국 은행들은 한국 기업에 돈을 빌려주기를 꺼려했어. 그래서 정부는 1962년에 '상업차관 정부 지급 보증 제도'를 만들었어. 이건 "우리 기업이 돈을 못 갚으면 정부가 대신 갚아줄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돈 빌려줘!"라고 외국에 약속하는 거였지. 정부는 기업의 계획과 돈 갚을 능력을 꼼꼼히 보고 보증을 해줬지만, 그래도 돈을 빌려오는 건 쉽지 않았어.
가장 큰 이유는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부를 좀 경계했기 때문이야. 다른 나라에서도 돈을 빌려오는 게 힘들어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는 미국이랑 서독에서만 돈을 빌릴 수 있었지.
'차관 망국론' 속의 장기영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외국 돈을 너무 많이 들여오면 우리나라 경제가 외국에 휘둘리고 망할 거라고 걱정했어. 이걸 '차관 망국론'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장기영 부총리는 생각이 달랐어. 그는 "외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 성장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어.
'차관 부총리'의 활약
장 부총리는 외자를 끌어오기 위해 전 세계를 누볐어. 1964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서독에 가서 정부 간 차관을 요청했지. 그 결과 한국은 1,350만 달러의 재정차관과 2,625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게 되었어. 이건 이전 해에 미국과 서독에서 받은 차관 규모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 이 활약 덕분에 장 부총리는 '차관 부총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어.
그는 이후에도 활발하게 경제 외교를 펼쳤어. 한일경제각료회담, 한독경제협력회담 등 여러 나라와 경제 협력 회담을 만들었고, 1966년에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 조달을 돕는 '대한국제경제협의체'도 만들었지.
특히 1967년 도쿄에서 열린 제1회 한일각료회담은 그의 활약이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일본으로부터 받기로 한 돈 외에, 더 많은 상업차관을 요청했지. 일본은 바로 결정하지 않고 다음 회의로 넘겼지만, 장 부총리는 포기하지 않았어.
회의가 밤늦게까지 이어지자, 그는 일본 장관 다섯 명과 직접 담판을 벌였어. 2차 경제 개발 계획에 돈이 더 필요하다며, 원래 약속한 돈 외에 2억 달러를 추가로 달라고 요구했지. 새벽 4시까지 버틴 끝에, 결국 일본 장관들은 2억 달러 추가 지원에 동의했어.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에 일본 장관들도 결국 무릎을 꿇은 거지. 장 부총리 스스로도 이 밤샘 협상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해.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의 외자 유치 규모는 장 부총리가 부총리직에서 물러나기 직전 해인 1967년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어. 1959년부터 1966년까지 8년간 3억 2,500만 달러였던 외자 유치액이 1967년에는 2억 3,000만 달러, 1968년에는 3억 4,000만 달러, 1969년에는 5억 5,000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지.
하지만 너무 많은 외자를 들여온 부작용도 있었어. 돈을 갚을 시기가 되자 돈을 빌린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8.3 조치'라는 경제 정책으로 이어지게 돼.
부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장기영 부총리는 한일각료회담에서 2억 달러 추가 상업차관 도입을 이끌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1967년 10월에 해임되었어. 그의 '불도저' 같은 일 처리 방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쌓였고, 때로는 대통령의 지시와 다른 결정을 내리기도 해서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이 큰 이유였던 것 같아.
그 후 장기영 선생은 다시 한국일보로 돌아갔다가, 1973년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기도 했어. 하지만 부총리 시절만큼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 그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1977년, 61세의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어.
장기영 부총리, 그는 누구였나?
장기영 선생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서 일을 시작해서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역임했어. 은행을 그만둔 뒤에는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1964년 한국 경제가 막 성장하기 시작할 때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발탁되었지.
그는 부총리로 일하는 3년여 동안 '불도저'처럼 거침없이 일하며 한국 경제의 산업화를 이끌었어. 원칙이나 규정보다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었고,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유능한 직원들에게 직접 지시하는 것을 선호했지. 이런 방식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이런 리더십 덕분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해.
이제 장기영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다음 시간에는 '김학렬'이라는 또 다른 한국 경제 관료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