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 ‘금융 독립’의 숨겨진 이야기! | 우리금융그룹 X 최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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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금융 독립 이야기, 우리은행의 역사
안녕하세요! 역사 커뮤니케이터 큰별쌤 최태석입니다. 오늘은 종로 한복판에 있는 116년 된 건물, 바로 우리은행 종로 금융센터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예요.
1. 대한천일은행의 탄생: 금융 주권의 시작
- 1909년, 국권이 위태로운 시기: 이 건물은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경제가 외국 손에 넘어갈까 걱정하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 은행이죠.
- 고종 황제의 지원: 상인들과 관료들이 고종 황제께 은행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고, 고종 황제는 개인 자금 3만 원을 지원하며 힘을 보태주셨어요. 민간과 황실이 함께 만든 은행인 셈이죠.
- '하늘 아래 첫째 가는 은행':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에는 최고가 되겠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어요. 단순히 돈을 맡기고 찾는 곳을 넘어, 국가의 세금을 걷고 운송하는 중요한 역할까지 담당했답니다.
- 최초의 전화 도입: 당시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대한천일은행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화기를 도입해서 본점과 지점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했어요.
- 광통관 건물: 190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서양식으로 지어져 고급스럽고 신뢰감을 주었으며, 화재나 전쟁을 겪으면서도 원형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우리은행 종로 금융센터로 사용되고 있어요.
2. 일제 강점기: 금융 주권의 상실
- 이름이 바뀌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대한천일은행은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대한'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은 단순한 간판 교체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금융 주권을 지우려는 일본의 의도였죠.
- 일본의 통제: 조선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은행 설립이나 영업이 불가능해졌고, 우리 은행도 결국 일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어요. 이 시기를 '금융 주권 상실기'라고 부릅니다.
3. 광복 이후: 금융 혼란과 체계 정립
- 광복, 하지만 혼란: 1945년 광복 후에도 남북 분단과 38도선으로 인해 은행 지점들이 북한 정권에 의해 몰수되는 등 큰 시련을 겪었어요. 남한 지역 역시 화폐 혼란, 물가 급등 등으로 금융 혼란이 심했죠.
- 한국은행의 탄생: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50년 한국은행법이 제정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탄생했어요.
- 6.25 전쟁 속에서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은행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직원들은 고객 예금, 정부 자료 등을 직접 들고 피난길에 오르며 전쟁 속에서도 금융 서비스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는 나라 경제를 지키려는 금융인들의 사명감과 책임 의식이었죠.
- 박경리 작가도 은행원으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님도 1954년부터 1955년까지 우리은행 용산지점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셨어요. 당시에는 '박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셨고, 은행 사보에 시를 기고하기도 하셨답니다.
- 새로운 제도와 문화: 전쟁 후 우리은행은 직원 자격 고시를 도입하고, 국내 최초로 여자 농구단을 창단하며, 최초의 은행 광고를 내보내는 등 젊고 활기찬 금융 이미지를 만들어갔어요.
4. 우리나라 우리금융그룹: 현재와 미래
- 국민의 곁으로: 1960년대부터 은행은 국민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생활 금융의 중심이 되었어요.
- 합병과 변화: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며 상업은행,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2년에는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 글로벌 금융 기관으로: 오늘날 우리은행은 24개국에 470여 개의 네트워크를 갖춘 대한민국 대표 금융 기관으로 성장했답니다.
마무리
대한천일은행부터 시작된 우리은행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금융 독립의 역사이자, 우리 선조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소중한 자부심이에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우리나라 금융 독립의 역사와 자부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우리금융그룹 화이팅!